군화발에 짓밟힌 내 몸
증 언 자 : 조성철(남)
생년월일 : 1960. 5. 7 (당시 나이 20세)
직 업 : 양복점 기사(현재 양복점 기사)
조사일시 : 1989. 4
개 요
5월 20일 저녁 동명로에서 공수들에게 구타당함. 현재는 다시 양복점 일을 하고 있다.
도회지에서 기술을 배우려고
나는 담양군 용면에서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는 농사만으로는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소 2, 3마리를 기르고 한봉을 시작하여 겨우 가족들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용면의 산골에서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광주로 나왔다. 뚜렷한 목적은 없었으나 도회지에서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광주 병무청 사거리에 위치한 양복점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배우는 과정이라 보수는 전혀 없고 먹고 잠자는 것이 전부였다.
견습공 생활 5년 끝에 기술자로 인정받고 바지 만드는 과정을 마쳤다. 그 뒤 충장로 5가에 있는 양복점으로 옮겨 20만 원 정도를 받게 되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시골에 있던 여동생과 함께 동명동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1980년 5월,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충장로 5가에 위치한 양복점은 매일 최루가스로 인하여 일을 방해받곤 했다. 며칠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고(5월 19일로 추정) 그날도 금남로에서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밖이 무척 시끄러워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창문 틈으로 내다보았다. 충장로 5가 광주약국 부근에서 젊은 사람들이 충장로 4가 쪽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몇몇 젊은이들은 얼마 가지 못해 공수들에게 붙잡혔고, 4, 5명의 학생들은 부근의 지업사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동시에 지업사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셔터를 내렸다.
그때 쫓아온 공수들이 셔터문을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공수들은 쉽게 문을 부수고 열더니 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리면서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들은 쉬지 않고 학생들을 구타하면서 충장로 4가 귀퉁이에 경계를 서고 있는 공수들에게 데리고 갔다. 뿐만 아니라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죽여버릴 듯한 기세였다. 이것을 보고 있던 충장로 5가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공수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공수들에 대한 두려움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마음속으로만 '죽일 놈들, 니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어쩜 저럴 수 있을까' 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호기심과 분노에 이끌려
다음날(5월 20일) 양복점에서 일을 마치고 함께 일하던 형님 한 분과 같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금남로로 나왔다. 6시 30분경 형님과 나는 가톨릭센터 옆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하상가 공사장 주변에서부터 가톨릭센터 일대까지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금남로 4가 쪽에서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많은 차량들이 도청을 향해 오고 있었다. 맨 앞에는 버스들이 보이고 그 뒤를 택시들이 따르고 있었다. 맨 앞줄의 버스는 동구청 앞까지 진출했다. 시민들은 모두 흥분하여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고 승리에 찬 모습들이었다. 택시와 버스 기사들 역시 조금도 흔들림 없이 도청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바로 가톨릭센터 골목으로 돌아 중앙국민학교를 거쳐서 제봉로로 나왔다. 제봉로 역시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MBC방송국이 불에 그을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전남여고 담 쪽으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뭐라고 웅성거리고 외쳐댔지만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얼마 동안을 지켜보다 형님과 헤어져 동명동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보았던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고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해갔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호기심과 분노에 이끌려 동명로로 걸어나왔다. 동명로는 광주시민들이 남녀노소 구분없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민들은 동명로에서 노동청 쪽으로 물밀듯 몰려나갔다. 모두들 손에는 각목과 돌들이 쥐어져 있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대열에 끼여 각목을 들었다. 공수들은 노동청 사거리에 경계 총 자세로 1개 중대 병력 정도가 있었다. 시민들과 공수들과는 5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돌을 던지고 각목을 하늘 높이 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공수들이 쫓아 오면 도망을 가고 다시 공격하곤 했다.
갑자기 공수들이 시위대열 앞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 도망갔고 나도 잡히지 않기 위해 힘껏 뛰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서 그들 틈에 끼여 누군가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서려고 하면 다시 사람들이 밀려오고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뒤쫓아온 공수들의 곤봉세례를 받으며 군화발에 짓밟혔다. 순식간에 머리가 터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눈앞이 아른거렸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계림동 파출소 맞은편에 있는 이상현 외과병원이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습니까?"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 2명이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나는 5일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했다.
이상현 외과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은 지 11일 정도가 지났다. 터진 머리 상처 때문에 오랫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했지만 상처가 완쾌되지 않은 상태로 퇴원을 해야 했다. 이상현 외과에서 퇴원한 후 자취집에서 치료를 했다.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르자 머리 부위가 대강 치료되었고 몸도 차츰차츰 회복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해 가을 다시 양복점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 몸은 예전같지 않게 무겁고 일을 하기가 힘들었다. 현재는 일을 하면 쉽게 피로해지고 장시간 일을 하기가 힘들지만 거의 완쾌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기억력이 없다는 말들을 자주 한다. 나 역시도 요즈음에는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마음의 상태도 항상 불안하다. 이 모든 게 1980년 5월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이다.
1988년 5·18 부상자 신고를 하기 위해 진료증명서를 떼려고 병원에 갔다. 그러나 그 진료증명서는 없고 떼어낸 자국이 눈에 띄었다. 병원 원장에게 사정사정하여 진단서를 얻어내 신고를 할 수 있었다.
5·18 부상자로서, 광주시민으로서 내가 바라는 것은 5·18의 진실이 밝혀져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이 되는 것이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