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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넘어 부끄러운 나의 5월
증 언 자 : 양강섭(남)
생년월일 : 1954. (당시 나이 27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국회의원 보좌관)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19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6월 30일 구속돼 상무대 영창에 수감, 내란 주요임무 종사자로 1심에서 10년형을 받고 2심에서 5년으로 감형, 대법원에서 1981년 4월 3일 잔형 면제로 출소했다. 그 후 전국민주회복협의회 총무간사,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총무국장을 거쳐 현재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다. 전남대 총학생회 출범 전·후, 도피에 이르기까지 박관현과 관련된 내용도 증언했다.
국민학생이 겪은 정치적 상황
6·25전쟁 직후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1954년 나는 영암군도 포면 수산리 선불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국민학교는 마을에서 4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는데 무우밥과 강냉이죽을 먹고 다니는 것이 너무 힘겨웠다. 다행히 분교가 생겼는데 양철지붕으로 된 엉성하기 짝없는 교실 두 칸과 항아리로 만든 화장실이 전부였다. 책상과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아 공부했지만 우린 그저 좋았다.
선불은 워낙 골짜기라 학교도 산속에 있었다. 교실을 늘린다는 기쁨에 손으로 땅을 파다 보면 사람의 뼈가 나오기도 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격변기였던 상황이라 국민학교생이었던 우리들도 정치상황에 아주 민감했다.
4·19혁명 이후에는 '자유'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졌다. 친구를 때리거나 남의 물건을 가져가도 '내 자유', 그러면 모든 것이 통용되었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후에는 재건복과 '재건'이 유행하였다. 그때는 무조건 '재건'이었다.
학교에서조차,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하여……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하고……."
라는 박정희의 혁명공약을 강제로 외우게 했다. 소갈머리 없이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외우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외우고 다녀 3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속에 남아 있다.
친구들과의 만남
나는 광주 서중 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하여, 다음 해에 동중학교에 들어갔다.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관현이와는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둘 다 반장이었기 때문에 쉽게 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명진과 잘 어울렸다. 시골에서 올라와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해 다른 길로 빠진 아이들도 많았지만 나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 옆길로 빠지지 않았다. 그때 기억은 공부를 잘했다는 것과 학생회 부회장을 했던 것 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관현이와는 광주고에 함께 진학했는데 당시 특별히 민족이나 민중에 대한 의식은 없었다. 단지 끈끈한 정으로서 묶어진 친구로 지냈다.
나는 서울대 진학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게 되었고, 누구나 다 그렇듯이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고 한때 불경에 심취해 방랑벽이 생겼다. 삼수를 해 1975년 전남대학교 문리대 인문계열에 입학했다.
입학과 동시에 4월 군에 입대했다. 논산에서 하사관학교 병장교육을 받고 차출되어 악명 높은 3공수여단에서 복무했다. 공수훈련은 말 그대로 극기훈련이었다. 임무 자체가 전쟁 발발시 적 후방에 침투, 대게릴라전을 수행하는 게릴라로서 훈련의 강도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첫 휴가도 20개월 만에 나올 수 있었다.
1978년 복학을 한 후 정용화라는 친구를 만났다. 용화는 같은 예비역이라 쉽게 친할 수 있었고 곧잘 의기투합이 되어 자연스럽게 현실에 대한 비판이 오고 갔다.
역사에 눈을 뜨고
이때부터 민족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초보적인 학습을 했다. 지금은 좋은 책이 많이 나오지만 그때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전환시대의 논리 등이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구해 산장이나 증심사 등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학습을 했다.
그렇게 우리가 사회과학의 기초를 공부하고 있는 중에 이른바 교육지표사건이 1978년 6월 29일 발생했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던져준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살벌한 유신체제 하에서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교수들이 잡혀간 사건은 침묵에 길들여진 우리를 자극하고 고무시켰다. 학생들은 곧바로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전남대 중앙도서관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교수들의 행동
나는 정문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몇 명의 여학생들에게 물수건과 우유를 준비시키고 용화와 내가 가방에 빵을 준비해 학교로 들어갔다. 지금 사대 건물이 그때는 숲이었다. 숲을 통하여 도서관으로 들어가다 모선생이 "저놈들이다"라고 소리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잡혔다. 도서관 앞에는 20-30명의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용화는 도망을 가고 나만 잡혔는데 나는 잡히면서 빵가방을 옆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은 비까지 내려 날씨마저 우중충했다. 나는 도서관 1층에 갇혀 있었는데 경찰들은 바로 농성해산을 위한 진압작전을 폈다. 농성은 페퍼포그, 최루탄 등에 무참히 무너졌고, 잠시 후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버스에 실려 서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18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날 밤 훈방되었다.
1백여 명의 학생을 강당에 세워놓고 교수, 상담지도관 연구사, 형사들이 지목하는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남은 18명이 보호실로 옮겨질 때 그곳에 있는 교수들을 봤는데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을 정도로 처절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교수들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 당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조사를 받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형사들은 정용화를 아냐고 물고 늘어졌지만 모른다고 버텼다.
그 사건으로 박현옥, 노준현, 박병기 등은 구속이 되었고 나는 열흘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집에 있는데 당시 학생처장이었던 송대현 선생이 학교로 불렀다. 송대현 선생은 나를 박물관 앞 숲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니그들 때문에 학교 문 닫게 생겼다. 문리대 폐쇄하라고 했다."
교수가 어떻게 학생에게 협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후 나는 그 선생을 보면 알은체도 하지 않았고 교수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징계를 하리라곤 꿈에도 상상을 못 했는데 무기정학이 내려졌다. 집에서 쉬면서 왜 내가 찍혔는가를 생각했는데 용봉축제 기간에 생긴 사건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예비역들도 입영을 들어가야 했다. 우리가 입영갔다가 온 날은 6월 9일로 용봉축제기간이었다. 날이 가물어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속편하게 축제랍시고 술 마시고 노는 꼬락서니를 보니 속이 뒤집혔다. 우리는 축제분위기에 젖어 있는 학생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개자식들아, 기우제나 지내라. 이렇게 가문 날에 무슨 축제냐?"
대강당에서도 무슨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모교수가 꽃다발을 받았다. 내 주변의 어떤 학생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꽃다발 받았으니 한마디 해라."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나와 용화가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슨 일 나겠다는 생각에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겠다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미 교수와 지도관이 도열해 있다가 나와 용화를 지도관실로 끌고 갔다.
지도관실에서 사정없이 얻어터졌다. 그 일로 제적을 시킨다고 했으나 성진기 교수님이 책임을 지겠다고 하여 아무 탈 없이 넘어갔다.
아마 그때 일로 교수나 지도관들에게 찍혀 있었고, 교육지표사건이 터지자 잘 걸렸다고 무기정학을 때린 것 같았다.
선거에서 이기고
한 학기를 쉬고 1979년 1학기 때 무기정학이 해제되어 학교를 다녔다. 나는 나이도 먹었고 이제는 다른 곳에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는 생각에 공부에만 치중했다. 아마도 그 무렵이 대학에서는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공인감정사 시험에서 1차 합격하고 공부만 하면서 1980년을 맞이했다.
관현이는 1978년 교육지표사건으로 꽤나 충격을 받았다. 나, 용화, 관현이는 그전까지만 해도 3인조로 늘상 같이 어울려 다녔고 뜻이 통했던 친구들이었는데, 나는 무기정학을, 용화는 1년여 동안을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자 하찮은 사건이 뿌린 결과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1980년 관현이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 나는 선거에 개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부나 하겠다는 소시민적 이유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어느 날 갑자기 송선태와 관현이가 찾아와 선거 사무장을 맡으라고 했다. 관현이와 선태는 대변혁기인 엄청난 역사적 순간에 소시민적인 욕구는 용납될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선거 사무장을 맡았다.
선거과정은 참으로 눈물나는 일이 많았다. 관현이가 강학을 했던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모금해 가져오기도 했고, 활동가들에게 차비 명목으로 1000원씩 주면 차마 못 쓰고 저녁에 다시 가져왔다. 선배, 교수, 동문들이 지원을 했고, 활동가들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대인동, 서방시장으로 400원짜리 밥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다른 후보자팀에서는 여관을 빌려 선거대책본부로 사용했지만 돈이 부족했던 우리는 후배 2층 방을 빌려 썼다. 그때 쓴 전화비를 아직도 못 주고 있다. 지금 분위기와는 달리 그때는 이승만이 욕만 해도 전혀 새로운 분위기로 받아들일 정도로 분위기가 답답했다. 학생들 자체도 깨어 있지 못했다.
4월 9일 선거는 64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박관현이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때 그 기분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너나할것 없이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관현이는 원래 방랑시인 김삿갓에서 인용된 '방랑시인 박삿갓'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추는 춤은 너무나 유명했다. 그날 밤 시내로 술을 마시러 갔는데 접대부들이 환각제를 먹었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해롱해 있는 것을 본 관현이가 그들을 붙잡고 울었다.
관현이는 그런 친구였다.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성이 대단히 좋은 친구였다.
총학생회의 집행부를 구성하려 할 때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고 빠져 나오려고 했다.
공인감정사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7월달에 실습을 나가야 된다고 핑계를 댔으나 7월 실습 이전까지라도 도와달라는 관현이의 설득에 넘어가 결국 총무부장을 맡았다.
어용교수 퇴진문제
총학생회가 출범하여 체계도 잡기 전에 학생들의 불만은 여기저기에서 분출되었다.
서클연합회 회장인 문석환이 중심이 되어 상대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싸움이 터졌고, 김상진 열사 추모식 날 복적생이 중심이 되어 1차 어용교수 백서를 발표했다. 그것을 시발로 학교는 어용교수 퇴진문제에 휘말리게 되었다.
인사대에서는(회장 박선정) 선도적으로 싸움을 벌여 어용교수 방에 각목으로 문을 박아버렸다.
이런 일련의 문제들을 총학생회에서 주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했고 학생회 내부에서는 어용교수 방을 폐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했다.
'정침식'이라는 명목하에 베니다를 조그맣게 잘라 각목을 뜯어내고 문에 박았다.
'어용교수 퇴진'이라는 이슈로 4월 23일 도서관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밤이면 200-300명의 학생이 농성에 참여했는데 우리는 그들을 대상으로 초보적인 의식화 작업을 진행했다.
어용교수 퇴진이 되지 않는 것은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다. 현정부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어용교수 퇴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반정부투쟁으로 유도했다.
어용교수로 지목된 교수들은 내부에도 정득규 일파와 소신파로 갈라졌다. 소신파였던 사대 생물학과 정정의 교수는,
"거짓으로 사표를 쓸 수 없다. 사표를 쓴다면 당연히 물러나야 된다. 그렇지 않고, 사표를 쓰고도 강의를 계속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면서 끝끝내 사표 쓰는 것을 거부했다.
학생회 내부에서도 교수들의 사표를 선별 처리 할 것인가, 개별 처리 할 것인가의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다.
어용교수 사표문제로 인하여 영문과 범대순 교수와 국문과 손광은 교수를 찾아갔다. 아무리 어용교수라고 하지만 제자가 스승에게 물러나야 된다는 소리를 차마 맨 정신으로 할 수 없어 술을 먹고 밤에 찾아간 것이었다. 2층 서재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교수님께 호소했다.
"교수님의 잘잘못을 떠나 교수님 퇴진을 요구하면서 학생들이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잘잘못은 언젠가는 역사가 평가 할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에게 사도의 길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십시오."
라고 말씀을 드리자 교수님은 우리와 같이 무릎을 꿇고 그러겠다고 승낙을 했다.
손광은 교수님 댁을 방문했지만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다. 선생님의 사정을 알고 있는 딸들은 우리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고 우린 아이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면서 어깨를 다독거리고 나왔다.
솔직히 역사를 올바르게 조명하겠다는 대의명분이 없으면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사표를 쓰겠다고 약속했던 범대순 교수님은 그 다음날 쓰러져도 강단에서 쓰러지겠다고 사표를 쓰지 않았다. 교수님은 철석같이 믿었던 약속을 저버리고 배반했다.
그 당시 전남대에서는 집회마다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각 단대 회장의 인솔하에 소속 단과대 앞에서 '출발 도서관 앞으로' 집결하였다. 총학생회 활동의 중심은 '어용교수퇴진',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농성을 해제하고 본격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더 이상 어용교수 퇴진과 같은 자질구레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이 최대의 이슈였다.
민족민주화대성회 일정을 짜 각 단대별로 주동하는 일이 매일 되풀이되었다.
5월 14일 가두진출을 놓고 내부에서 가두시위 주동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다. 학생회장이 당연히 나가야 된다는 측과 학교에 남아 뒷수습을 해야 한다는 측이 팽팽히 맞서다 회장이 직접 나서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학생들은 전경과 대치상태에서 정문을 뚫으려고 오후 내내 싸우느라 점심도 못 먹은 상태였다.
총학생회장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 007을 방불케 하는 작전으로 학교를 빠져 나가 도청 앞 집회에 참석했다.
가두행진은 맨 앞에 태극기와 교수님을 선두로 진행되었다. 인문대를 비롯한 몇 개의 단과대학은 전남방직 앞으로 갔다.
그해 봄,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 투쟁이 각 사업장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전남방직 앞에서 노동자들에게 '봉급인상', '노동3권 보장' 등을 외치고 돌아왔다.
14일 밤부터 공수부대가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학교 사수를 위해 농성에 들어갔다.
15일에도 전날과 똑같은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있었다. 그때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 접수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한상석, 송선태, 정동년, 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등학생들을 동원시키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서 논의했다. 끝으로는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계엄 확대 소식
16일에도 도청 앞 집회는 계속되었다. 밤 늦게 횃불행진을 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가는 길은 밤에 어둠을 밝히는 횃불같이 명명백백하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 해 횃불을 든 사람을 각각 네 사람이 보호를 했고 경찰들의 호위 아래 전남대생은 노동청-광주고-산수동 오거리를 거쳐 도청에 다시 집결했다. 우리는 도청 앞 광장에서 5·16 군사쿠데타를 응징한다는 의미의 화형식을 거행했는데 분수대 위에서 약간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기자협회에서 나온 사람이라면서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을 칭찬해 주고 싶다고 해 마이크를 줬더니,
"여지껏 가만있다가 왜 이제야 하냐?"
면서 뭐라고 헛소리를 했다.
순간 도청 앞에 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물러가라 저놈 잡아라' 등등 고함을 치고 뭔가를 던지기도 했다. 대충 사태를 수습하고 그 사람을 학교로 데리고 갔다.
학교에서 잡아온 사람을 조사했는데 말도 횡설수설하고 수첩에는 김종필, 김대중 씨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일단 17일 다시 넘겨받기로 하고 경찰에 연락을 했더니 백차가 와서 데리고 갔다. 그러나 17일 전화를 하여 확인하자 경찰서에서는 그가 탈주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5월 17일,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앞으로 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날 오전에 MBC방송국에서 나, 박관현 회장 그리고 명노근 교수님과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같이 고생했던 활동가들이 상대 뒤에서 막걸리를 마신다고 하여 관현이와 함께 가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면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고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용봉축제 준비금 명목으로 3백만 원을 탔다. 몇몇 주요 인물들에게 상황이 어떻게 될 줄 몰라 도바리(형사들을 피해 다니는 것) 자금으로 조금씩 갖고 있게 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관현이와 나, 김영휴, 차명석, 문옥희 등이 무등산장으로 가기로 했다.
밤 10시쯤, 라디오에서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솔직히 표현하면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어떻게 된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을 해보자는 생각에 산장에 올라가 방을 잡고 TV를 켰더니 확실한 내용이 화면에 나왔다.
'일 났구나'하는 생각에 관현이와 영휴를 남겨두고 시내상황 점검을 위해 이곳저곳 연락을 해보고 11시 30분경 사전에 약속되었던 대지여관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김상집 선배한테서 빨리 피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상황이 이렇게 되면 잡혀도 학교에서 잡혀야 된다는 생각에 12시 5분 전 학교로 들어갔다.
학생회 사무실에서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흐트러 져 잠을 자고 있었다. 얘들을 깨우고 있는데 본부에서 이청조 섭외부장한테 전화가 왔다. 섭외부장은 아무것도 모르는지 군인들이 전화를 가설하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빨리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군인 트럭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으려고 했지만 솔직히 겁이 나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도망을 가기로 하고 예비역들과 현역들로 갈라져 예비역들은 군인들의 본부가 차려진 학군단 사무실 쪽으로 통과하기로 하고 현역들은 공대 쪽으로 도망갔다.
병법에 적의 허를 찌르라는 말이 있듯이 군인들은 설마 우리가 자기들 본부 앞을 통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는지 우리는 무사히 상대 뒤로 도망갈 수 있었다. 한편 군인들이 없는 곳으로 안전하게 빠져나간다고 공대 쪽으로 간 학생들은 '공대건축전'이 열리는 곳에 숨어 있다가 모조리 잡혀갔다.
원한의 5월 18일
시내상황은 시시각각으로 급변했다. 학생회 집행부였던 우리들은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피신 할 것인가로 2시간 가까이 토론을 벌였다. 어찌됐든 남아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쪽과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피했다가 훗날을 기약하자는 측이 서로 피 튀기듯 갈등을 겪다가 피해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낮에 관현이가 먼저 빠져나가고 나는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다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일 견디기 힘든 건 헬리콥터 소리였다. 계속되는 헬리콥터 소리는 총소리와도 흡사했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처럼 들려 괴롭기 짝없었다.
애인 집에서 은신하였는데 그 부모님께서 시내상황을 계속 보고 오시면서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피신할 것을 권했다.
상원이 형이 전화로 화염병 제조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신나에 모래를 섞으면 폭발성이 더 강하다고 전해 주었다. 전화를 받고 집에 있는데 전화가 도청되었다면 내 거처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옮겨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피신
19일 광주를 빠져나가려고 자가용을 빌렸는데 가는 도중 검문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나는 신문사 부사장으로, 차명석을 비서로 꾸몄다.
우리는 그렇게 조작을 해놓고도 겁에 질려 있었던지 순천 철도 건널목에서 일단 정지를 무시하고 달려버렸다. 철도 간수들이 우리 차를 정지시켰지만, 경우신문 부사장이라고 말하자 그냥 가라고 했다. 우린 고생한다면서 5천 원을 주고 갔는데 그때 심정이라는 것은 기가 막혔다. 그래도 신문사 부사장 빽이 좋긴 좋은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여수비행장 검문소에서도 검문을 했는데 경우신문 부사장이라고 했더니 신분증 검사도 하지 않은 채 부동자세로 경례를 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여수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다. 광주는 난리통에 온 시내가 아비규환인데 여수는 너무도 평화스러워 다른 세상 같았다.
자꾸만 광주 일이 걱정되면서 심리적으로는 불안해졌다. 사랑하는 내 친구들이 공수부대의 잔악한 만행에 쓰러져가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도망치는 모습에 심한 혐오감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들어가는 건 술밖에 없었다.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그런 상태에서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20일 돌산으로 가 관현이와 합류하였다. 돌산 방죽포 임해연구소 옆집에 방을 얻어 생활을 했다.
날이면 날마다 고통스러움과 죄책감에 들어가는 건 술밖에 없었다. 원래 관현이와 나는 술이라면 어디를 가도 빠지는 편이 아니었다. 하루는 매일 술을 마시고 죄의식에 빠지는 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하루에 소주댓병 이상은 마시지 않겠다고 합의했다.
분명히 광주는 난리가 났을텐데도 방송에서는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건 북한방송밖에 없었다.
21일 우리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해 준 사대 정정의 교수한테 전화가 왔다. 관현이 가명이 관수였는데 교수는 관수가 죽었다는 소문이 광주에 파다한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전화를 끝으로 전화마저 불통되었다.
그날은 초파일이었다. 우리들은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했으나 주위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눈치였다. 집주인이나 동네 젊은이들이 호의적으로 잘해 줬다. 그날도 동네 젊은이들이 놀러가는데 함께 가자고 해 배를 타고 임포로 놀러갔다. 놀러는 갔지만 기분이 나지 않아 옆에 있는 산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누군가 우릴 보고 반가워하며 뛰어왔다. 그는 인문대 후배였다.
순천에서부터 걸어서 오는 길이라고 했는데 반가움보다는 우리들의 위치가 탄로났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광주로 올라오려고 생각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육지로 들어갈 것인가, 밀항할 것인가로 말싸움을 했지만 그때의 우리들 처지로는 배도 없고 돈도 없어 밀항조건이 되지 않았다.
날마다 죽을 맛으로 이북방송만 듣고 있었다. 희망이랄까, 낙관적인 소식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영암집에서 붙잡히고
5월 27일 몇 시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새벽녘에 라디오에서 '정의가'가 흘러 나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관현이를 두들겨 깨웠다.
"관현아, 영휴야, 우리가 이겼는갑다. 빨리 일어나봐라."
관현이를 깨워 귀를 쫑긋 세우고 방송을 듣는데 조금 있다가 시민들은 집밖으로 나오지 마라고 하면서 영어로 계속 방송을 했다.
아침에 상황 판단을 하는데 전쟁에서도 폭탄이 떨어진 곳이 안전하듯이 조용한 이곳보다는 어수선한 광주가 훨씬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광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여수에 사는 친구 도움으로 자가용을 빌려 영암 집으로 출발했다. 무려 11군데에서 검문을 받아야만 했다.
여천공단 입구에서 술취한 방위들이 무조건 총부터 들이댔다. 당시는 무서운 것이 사람이 아니라 무기였다.
장흥에 와서 또 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우리들이 도망가는 대학생들인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고맙게도 경찰은 밤 9시가 되면 도로가 차단되니 빨리 가라고 했다.
병영으로 해서 영암으로 넘어왔는데 비포장도로로 얼마나 달렸던지 승용차의 마후라가 깨져버렸다.
영암에서도 또 검문에 걸렸다. 경찰이 M16을 들고 서 있었다. 우리는 낚시질 갔다가 이렇게 됐다고 얼버무리고 있는데 마침 아는 경찰이 있어 아버지 이름을 대고 빠져나왔다.
뒷길 농로를 타고 집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고 새벽에 관현이와 영휴는 목포로 떠났다. 아버지는 관현이와 영휴를 용당까지 데려다주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관현이와는 영영 헤어져버렸다.
집에서는 마루밑으로 들어가 장판을 깔고 숨어 있었다. 시골의 집들도 대부분 마루가 높아 숨어 있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 달여를 그런 식으로 생활했다. 내가 잡힌 날은 6월 30일이다. 아버지가 내 문제를 타협하기 위해 학교로 총장을 만나러 갔다. 총장이 구제 방안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영문과 지도교수와 만나 대책을 논의하다 별다른 방법이 없음을 한탄하다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 뒤를 형사들이 미행했다. 그날도 비가 억수로 내린 날이었다. 내가 수갑을 채우라고 했으나 형사들도 차마 채우지 못했다.
갖은 고문과 폭행
서부경찰서에서는 거물이 왔다고 대접이 극진했다. 커피를 끓여주기도 하고 전혀 때리지도 않았다. 보안대로 인계되었으나 나는 운이 좋았던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보안대에서는 합동수사반으로 6시까지 넘겨야 되는데 나는 시간이 다 되어 보안대로 인계되었다. 보안대에서도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놈이다'라고 했다. 합동수사본부에는 차명석, 한상석과 같이 들어갔다.
합동수사본부에서는 6월 30일로 일단의 수사를 마무리하고 소주, 과일 등을 놓고 회식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차명석, 한상석)을 보고 첫마디가,
"야, 느그들 맷집 좋다. 조선대 애들은 작아서 때릴 맛이 안 났는데."
하면서 차봉갑이라는 수사요원이 늦게 들어온 죄로 열다섯 대만 맞으라고 했다.
나는 공수부대에서 매는 이골나게 맞아서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고스란히 맞았다. 진술서를 쓰라고 했는데 대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자 성장과정에서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적으라고 했다.
한참 후에 이상남(헌병 준위, 전남대 담당반장) 형사가 앞으로 오더니,
"야 이 새끼야, 여기가 어디인 줄 알아. 허리띠 풀고 신발 벗어!"
하면서 밧줄로 손을 묶고 눈을 가리더니 내 허리띠로 두들겨팼다. 건물 대들보에 손을 매달아놓고 두들겨패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깡다구가 있어 이빨을 악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악물고 있는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병 주고 약 준다고 어떤 놈이 오더니 눈을 풀어주고 소주를 주면서 맨정신으로 맞을 수 없다면서 소주 네 잔을 강제로 먹게 했다.
자기들은 소주를 먹으면서 구타를 했다. 관현으로부터 돈 받은 것을 '있다', '없다'로만 대답하라고 했다.
똑같은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은 낮에는 절대 때리는 법이 없었다.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무릎을 꿇게 하고 손과 발을 묶어 무릎 사이로 침대 마후라를 끼워놓고 허벅지를 지근지근 밟는다거나 곤봉으로 두들겨 팼다.
말 할 힘마저 없을 정도로 두들겨맞다가 뻗어버리면 엎어진 상태에서 오른쪽 손만 남겨두고 온몸을 지근지근 두들겨팼다. 그들은 영악하게도 글씨를 써야 하는 오른쪽 손은 절대 때리는 법이 없었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인간적 모욕이었다. 김성호 상사가 '울대'를 훑으면서,
"느그같은 놈들은 씨를 말려 자식도 못 나게 해야 된다."
는 소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모욕이었다.
내 담당은 보안사 소속 사복경찰인 윤재면 상사였다. 그 형사는 사흘째 되는 날 나를 두들겨패는 것을 포기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악랄하기로 소문난 조선대 담당 김용갑이 침대 머플러로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이미 온몸은 눈곱만큼의 감각도 없었다. 의식마저 가물거리면서 '퍽퍽' 소리만 가끔씩 들릴 뿐이었다.
고문에 못이겨 거짓 자백
처음에는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모진 것이 목숨이라고 스스로 끊지는 못했다. 김용갑은 의식도 없는 상태의 내 귀에 대고 일단 관현이한테 돈을 받았다고 말만 하면 때리지 않겠다고 유혹했다. 그 소리는 지옥의 사자들이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나중에는 이러다 맞아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살고 싶다는 갈등에 시달렸다. 이미 육체적 한계상황은 나의 의식을 압도하고 있었다. 절대로 '돈을 받았다' 는 소리는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받았다고 하고 다음에 처리하자는 생각에 관현이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입에서 받았다는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태도가 돌변했다. '양선생' 하고 호칭까지 바꿔 부르고는 맥주 한 박스와 담배 한 보루를 갖다놓고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피', '혁명', '민족', '민중'이라는 말을 되도록 많이 쓰라고 하여 편지지 열두 장 분량에 요구하는 대로 써줬다. 붉은 줄이 많이 있어야 한 대라도 덜 맞았다.
관현이에게 돈을 50만 원 받았다고 썼더니 또 두들겨패는 것이었다. 나는 받았다는 것만 시인하면 되지 않느냐고 대꾸했다. 형사들은 총학생회 총무부장이 8개 단대에 10만 원씩 줘도 아귀가 안 맞는다고 했다.
30만 원을 더 올려 80만 원을 받았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얼마짜리로 받았냐고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만 원짜리와 5천 원짜리로 받았다고 했더니 또 달려들어 패는 것이었다. 나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오만상을 다 쓰면서 달려 들었더니 만 원이면 만 원이지 무슨 5천 원짜리냐고 했다.
나는 "그러면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때리기는 왜 때리냐?"고 대들었다. 그들은 이미 정동년 선배가 김대중 씨로부터 학생들 선동자금으로 5백만 원을 받아 관현이에게 3백만 원을 줬다고 각본을 짜놓았다. 그런데 그 돈이 전부 만 원짜리인데 관현이로부터 내가 받은 돈이 5천 원짜리라고 했으니 자기들 각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내란죄로 몰리고
7월 3일 지긋지긋한 보안대에서 상무대로 이송되었다.
상무대에서 사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는데 전신이 퍼렇게 멍들어 내 몸이었지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상무대 영창에서는 6소대로 배정되었다. 내가 영창 안으로 들어가자 내 몰골이 말아니었던지 어떤 사람이 내 손을 잡고 변소 옆으로 데리고 가 엎드리게 하고는 물수건으로 찜질을 해줬다. 그 친구의 이름은 신만식이었다.
신만식은 그 일로 작살나게 얻어터졌다. 최루탄 파편을 맞아 엉망인 다리를 팬티만 입혀놓고 집중적으로 팼다고 했다.
상무대 영창생활은 한마디로 짐승 이하의 생활이었다. 날마다 보강수사를 한다고 불러 두들겨패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어느 날인가 조사를 받으러 갔더니 담당형사 책상 앞에 형법 조문을 걸어놓았는데 '내란죄' 부분에 체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상윤이 형에게 '형, 우리를 내란죄로 몰아갑니다'라고 했더니 형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내란죄는 중요임무 종사자들에게 10년에서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심각해졌다.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우리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은 미치도록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증인심문 시간
8월 10일은 정식 재판을 하기 전 증인 심문이 있었다.
대부분이 고문에 의해 날조된 사실이기 때문에 허위자백인지라 증거가 없었다. 그런데 검사 앞에서 재판 전에 증언을 하는 것은 증거로서 효력이 발생했다. 그들은 그걸 교묘히 이용하기 위해 사전 증인심문을 했다고 생각된다.
검사와 법무사가 심문을 하면 형사들이 뒤에서 녹음을 하는 간이재판이었다. 나는 그날 그동안 자백했던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관현이한테 10만 원짜리 한푼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자 검사는 왜 받았다고 했냐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 나는 뒤에 앉아 있는 형사들을 쳐다보면서 저 사람들이 두들겨패면서 그렇게 시켜 할 수 없이 인정했다고 대답했다. 형사들은 '너 두고보자'라는 표정으로 똥 씹은 얼굴이었다. 나중에 재판받을 때 내가 녹음 테이프를 내놓으라고 하자 그들은 녹음했던 사실조차도 부인했다.
사전 증인심문이 끝나자 나는 바로 김용갑한테 끌려갔다. 김용갑은,
"전라도 새끼들은 그런 게 나쁘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니가 그따위로 말할 수 있냐?"
작살나게 두들겨맞았다. 나는 하도 죽겠길래 검찰관한테 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검찰관 앞에 가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과정을 몇 번 되풀이 하자 김용갑도 지쳤는지,
"너같은 놈은 내 생전 처음 봤다."
고 포기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
나는 송정리 공군비행장에 있는 영창으로 이감되었다. 그때부터 영창생활이 어느 정도 편했다. 헌병들이 군인들과 똑같이 식사를 제공해 주었고 필요한 책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얼마 후에 홍남순, 이기홍 변호사, 조비오 신부, 김성룡 신부, 송기숙 교수, 명노근 교수, 김영철 형이 이감해 왔다. 그때부터 공군영창 안에서 돈진이라는 돼지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름 끝자를 전부 돈자로 바꿔 부르고(홍남돈, 조비돈 등으로) 운동을 한답시고 침상 위에서 꿀꿀꿀 소리를 내면서 기어다녔다. 지금 우리들의 생활이 돼지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조적인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검찰관 취조를 받고 오는데 나만 부르지 않았다. '또 무슨 꿍꿍이 수작을 부리느라 나만 부르지 않는 것일까' 하고 답답해 하는데 비가 내리는 날 나를 불렀다.
검찰관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받았던 기록을 타자로 쳐놓은 곳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지장을 찍을 수 없다고 거부하자 검찰관은 협박을 했다.
나는 화가 나 머리를 책상에 찍었는데 검찰관이 이름이 써진 삼각패를 재빨리 치우는 통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전에 상석이가 조사를 받으면서 삼각패에 머리를 찧어 혼줄이 난 검찰관은 내가 또 머리를 찧자 그냥 가라고 했다.
두번째 검찰관에게 불려갔을 때 김영휴가 잡혀와 있었다.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동안 내가 진술해 놓은 것과 이빨이 안 맞으면 어쩔 것인가를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검찰관은 우리를 내란죄로 몰기 위해 김대중 선생에게서 정치자금 받은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내가 절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자 검찰관도 기가 막혔는지 합동수사본부에서 나를 조사했던 수사관들을 불렀다.
수사관들은 나에게 협박과 사정을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끝까지 버틸 경우 내 애인 가족을 범인은닉죄로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하여 미칠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무자비한 저놈들에게 피해를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승낙을 하기로 했다.
나는 돈 받은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등학생 동원과 도청접수 부분은 빼주라고 서태경 검찰관과 협상을 했다. 결국 검찰관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러자고 승낙했다.
그전에 이기홍 변호사가 지장을 찍게 되면 절대 바로 찍지 말고 거꾸로 찍으라고 해서 전부 거꾸로 지장을 찍었다. 이기홍 변호사 얘기가 지장을 거꾸로 찍어놓으면 증거로서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대기실로 왔는데 정동년 선배가 있었다. 도저히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지만 사실대로 얘기했다. 정동년 선배는 "어쩔 것이냐" 면서 나를 위로했다. "선배님은 어떻게 하실라요" 하고 묻자 정동년 선배는 수괴답게 한번 더 버티겠다고 했다.
10년 구형을 받고
재판은 10월부터 시작되었다. 자기들 마음대로 조작해 놓고 몰아가는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재판이었다. 행여 우리들이 말을 맞출까 겁이 났는지 중요임무 종사자는 개별 심문을 했다.
나는 재판을 받으면서 검찰관하고 한 시간 가까이 말싸움을 했다. 모든 것을 부인했더니 돈에 대해서 물고 늘어졌다.
나는 학생회 예산인 1억 2천만 원에서 쓴 1천 2백만 원은 학생회 활동을 위해 쓰인 정당한 돈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은 한 번으로 끝이 났다.
집에서는 한가닥 희망을 걸고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변호사가 사건의 내용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얼마나 웃기는지 마지막 구형하는 날 재판정이 어디인지도 몰라 변호사가 헤매고 다니다 최후진술을 하고 있을 때에야 나타났다. 내가 변론이 필요없다고 하자 변호사는 서면으로 제출해 주겠다고 했다.
검찰관이 구형을 하는데 줄줄줄 읽고 강아지 똥 싸고 도망가는 것 같이 도망가 버렸다. 나는 10년을 구형받았다. 최후진술을 하라고 하길래 의병과 동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병은 양반들이 했기 때문에 나라에 충성한 것이고 동학은 쌍놈들이 했기 때문에 반역이냐? 지금 일련의 조치를 보면 개혁을 한다고 떠들고 있는데 총을 가진 자가 하는 건 혁명이고 학생이 하면 내란인지 나는 잘 모르겠으니 현명하게 판단해라. 내가 알기로 이 나라는 민주주의 나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 하자고 앞장섰던 사람들을 벌을 준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 학생들을 대표해 나에게 벌을 준다면 영광으로 받겠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앞장섰던 사람만 벌을 주는지 배우는 학생으로서 이해가 안 되니 재판장이 현명하게 판단하기 바란다."
그때의 우리들에게 최대의 관건은 재판을 당당하게 받는 것이었다.
다시 교도소로
1월 21일은 선고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는 "개정하겠습니다"를 신호로 애국가를 불렀다. 구형대로 선고가 되고 그날부로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정동년 사형, 김종배·박남선 사형, 윤석루 무기, 윤강옥·양강섭 10년, 이양현 7년을 받고 같은 방에 있었다. 가톨릭농민회 전국연합회 회장이었던 서경원 씨와 전국 기독교장로회 청년연합회 회장이었던 안철 씨 등은 바로 옆방에 수감되었다.
광주교도소 4사 전체에 수감되었던 우리들은 도청이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교도소는 면회도 안 되고 사식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10월 30일 이른바 10·30사건이 터졌다. 4사에서 시작된 난리는 일반 잡범들도 동조를 해 교도소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교도관들은 한 방에 40-50명씩 들어가 집단구타를 했다.
교도소는 여자만 없지 모든 것이 다 있는 곳이었다. 막걸리를 만들어 먹기 위하여 거짓으로 환자가 있다고 해 죽이 나오면 죽에다 원기소를 넣고 저녁마다 보듬고 잤다. 늦게는 일주일, 빠르면 3, 4일 만에 막걸리 원액이 만들어졌다. 그 원액을 한 잔씩 마시면 그 형편에서도 세상천지에 부러울 것 없이 기분이 좋았다.
1심과 2심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석방되었다. 나는 2심에서 5년으로 감형이 되었고 대법원에서 1981년 4월 3일 잔형면제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우리들의 석방을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그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먹었다. 출감하던 날은 먼저 석방된 후배들과 친구들의 배려 속에 혼자서 소주댓병을 다 마셨다. 나는 바로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그때의 심정으로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다. 날마다 저수지로 낚시하러 가 혼자서 소주댓병을 마시는 일이 계속되었다. 삶에 대한 의욕도,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경찰에서는 정기적으로 체크를 했다. 삶 자체가 감시를 당한다는 생각에 무엇인가, 아무것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리하는 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 광주로 올라와 후배들과 자연식품 클로렐라 장사를 시작했는데 빚만 지고 말았다.
그 뒤 이양현 선배와 같이 문화방송국 옆에서 '백제화공'이라는 화공약품 가게를 했지만 그것도 3개월 만에 망했다.
허규정, 위성삼, 박선정 등과 함께 교양사를 차렸지만 이번에는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1982년 10월 관현이가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쓰러져 전남대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위의 형이 전남대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근무했던지라 형의 가운을 빌려 입고 중환자실로 들어가 관현이를 만났다.
내가 관현이에게 힘을 내라고 하자 관현이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관현이는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영안실에서 마지막으로 분향을 하고 나는 경찰들에 의해 격리되었다. 사회안전보호법에 의해 영암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그들의 감시하에 있었지만 관현이 장례식을 치르려고 몰래 빠져나왔다. 영광으로 갔으나 보지 못했다. 목포에서 저녁내 술을 먹었다. 아직도 관현의 마지막 모습을 못 본 것이 가슴에 한으로 맺혀 있다.
나는 1982년 12월 12일 12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전두환이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날이라 똑같은 것이 두 번 되면 상쇄된다는 말에 12월 12일을 영원히 죽여버린다는 뜻에서 그날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 때문에 처가와는 말이 많았지만 그대로 밀고 나갔다. 결혼 후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다 1984년 복학하여 대학 들어간 지 11년째에 접어들어 1986년 드디어 졸업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1985년 겨울부터 홍남순 변호사가 주도했던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총무간사로 윤강옥, 위성삼 동지와 전남 일대의 군단위에 약칭 전민협을 결성했다.
1986년 5월 18일 망월동에서 성명서를 내는 것을 기점으로 민주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를 결성해 사무부처장 겸 총무국장 일을 했다.
대통령선거를 치른 후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윤강옥, 위성삼 동지와 전남 일대를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다. 심지어는 여의도 집회와 보라매공원에도 갔는데 보라매 공원에서 김대중 씨한테 실망했다. 김대중 선생이 중대한 발표를 한다고 하길래 후보를 사퇴할 줄 알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재벌도 살려주겠다, 모든 걸 용서하겠다는 말을 하자 기가 막혔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그 엄청난 인파를 데리고 청와대까지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리 서울역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서울역에서 해산을 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그 사람들과 청와대 앞에서 공정선거 보장과 과도내각 수립을 외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결국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일당에게 도둑질당하고 끝이 났다.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88년 국회의원 총선거에 임박해 어떻게 다시 한 번 대통령선거 때와 같은 열풍으로 이 지역을 이끌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4월 5일 광주역 집회를 계획했다.
그날 집회가 성공리에 끝남으로써 이 지역에서 평민당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고향 영암은 위성삼(현 민주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 총무국장)과 같다. 4·26 총선 때 영암에서는 민정당에서 이완희가 출마했는데 돈을 엄청나게 뿌려 영암은 상당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나와 성삼이는 어떻게든 민정당을 박살내야 된다고 생각하여 영암에 상주하면서 일을 했다.
선거에 깊이 관여하고 지원하면서 유인학 의원과 인연을 갖게 되었다. 원래 유인학 의원은 전남대 학생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4·19 때와 6·3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했던 분으로 사적으로는 고등학교 선배이자 집안 사돈이 된다.
선거가 끝나고 유인학 의원 보좌관을 맡아주라고 해 고민을 많이 했다. 선배들이 모여 어떻게 되든 의회에 들어가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고 가라고 결정하여 지금은 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다.
1988년 8월 18일 고 박관현 열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해 회장을 하고 있다. 사업회의 1차 목표였던 이장 문제는 11월 13일 시신을 탈취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망월동으로 이장하였다. 이제는 기념논총을 발간할 예정이다.
기념탑 건립은 전남대 중앙도서관 앞 연못에 분수대를 만들고 광주시민 전체 군상에 박관현과 전남대학생을 묘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기념탑 건립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이 밝혀지고 이른바 광주에 대한 보상이 끝나,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열사들의 시신을 찾아 제대로 안장을 해 준 연후에 건립할 계획이다.
이 땅의 역사는 민중들에 의해 이끌어지는 시기가 오고 있고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야기지만 통일은 구태의연한 마음자세와 낭만적인 사고로는 절대 이룩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겸허한 자세를 갖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면서 역사와 민족 앞에 지상명제로 대두된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나는 비록 현직 의원 보좌관이지만 광주특위 청문회는 정치적인 쇼에 불과할 뿐이다고 생각한다. 만약 청문회에서 5·18 민중항쟁의 진상이 규명되기를 바란다면 그야말로 그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다. (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휴일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