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하도 뒤바꿔 놓아서 도무지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간 고려의 남북통일, 거란의 고려 침입, 고려의 천리 장성 축성, 고려의 여진 정벌 등을 통하여 군대의 이동 경로 또는 전투지역 상에 나타나는 지명들의 위치를 고찰해 보았다.
우선, 태조 왕건이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곳은 철원이었는데, 철원의 위치는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에 있는 요성고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은 즉위 직후 도읍지를 왕건의 출신지인 송악군으로 옮겼는데, 송악군이란 곳은 천성, 또는 천주로 불렸던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고려 초기의 도읍지 이동 추정지역
또 태조 왕건은 최소한 935년 이전에 도읍지를 다시 옮겼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 근거는 신라왕 김부가 935년에 고려에 나라를 바쳤는데, 태조 왕건은 두 딸을 김부에게 시집보내면서 '낙랑공주'라고 불렀다는 기록이다.
낙랑(맥)이란 곳은 바로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인데, 공주들이 태조 왕건을 떠나 지방에 따로 살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즉, 935년 당시에 고려의 도읍지는 낙랑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낙랑(맥)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더우기 거란이 926년에 대진국(발해)의 정리부를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928년에 아직 항거하고 있던 대진국(발해)의 동평부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란의 침입이 있는 상태에서 고려가 도읍지를 송악군에 그대로 두고 있었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928년부터 938년 사이에 발해 유민이 고려에 귀부했다는 기록이 8회 기록되어 있다.
즉, 928년 3월, 7월, 9월, 929년 6월, 9월에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부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거란족이 928년에 대진국(발해) 동평부를 공격하자 그 때까지 아직 항거하고 있던 대진국(발해) 유민들이 단순히 국경을 넘어 고려에 귀부한 것이었겠는가?
혹은, 아예 동평부를 갖고 고려에 귀속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여기서 거란족이 동평부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대진국(발해) 유민들이 거란을 물리치고 동평부를 갖고 고려에 귀속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 성종이 990년 10월에 요성(遼城)에 행차하는데, 바로 서도유수관(西都留守官)에게 잠시라도 임소(任所)를 떠나지 말도록 지시하고 있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요성(遼城)이 서도(西都), 즉, 서경(西京)으로서 요동성(遼東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려사』에 따르면, 서경(西京)은 태조 왕건(재위: 918~943년)이 처음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진국(발해) 멸망 직후 928~943년 기간 중에 고려가 요동땅을 차지함으로써 요동성(遼東城)을 서경(西京)으로 삼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서경의 위치는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로서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갈 사항은 상기한 고려의 도읍지 개경(평양)과 서경(요동성)은 고려 전반기의 개경과 서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의 개경과 서경이 이주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공민왕 대 쌍성총관주를 수복하고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압록수를 남쪽으로 넘어야 했으므로 고려 후반기의 개경과 서경은 최소한 압록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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