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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공황상태
불안감
놓아버리면 용기, 중용, 자발성, 포용, 사랑이 샘솟는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 치료법의 핵심이 여기에 있구나!!
놓아버림 : 공포, 죄책감
우리는 공포가
공포가 지닌 다양한 모습에
친숙하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황장애에 빠지기도 하고,
공포로 마비되고 얼어붙은 가운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감이
엄습되기도 한다.
걱정은
만성적인 공포이며,
편집증은 극도의 걱정이다.
약간 불안한 것은 가벼운 형태의 공포다.
공포가 더욱 심각하면,
잔뜩 겁을 먹고, 조심스럽고 폐쇄적이고,
긴장하고 낯가리고, 말도 못하고
미신적이고 방어적이고 의심이 많고
위협을 느끼고 불안정하고 심하게 겁내고
수상쩍어하고 소심하고
궁지에 빠져있는 듯하고,
가책을 느끼고,
무대공포증에 빠지기도 한다.
아픔과 괴로움을 겁내고, 사는 일을 겁내고 사랑을 겁내고, 가까워지기를 겁내고, 거절을 겁내고, 실패를 겁내고, 신을 겁내고, 지옥을 겁내고, 가난을 겁내고, 조롱과 비판을 겁내고, 함정을 겁내고, 자신없어 겁내고, 위험을 겁내고, 반감을 살까 겁내고, 지루할까봐 겁내고, 책임을 맡는 것을 겁내고, 결정내리기를 겁내고, 지휘권 갖기를 겁내고, 처벌을 겁내고, 변화를 겁내고, 위험해질까봐 겁내고, 통제력을 잃을까 겁내고, 감정자체를 겁내고, 조종당할까봐 겁내고, 들킬까봐 겁내고, 높은 곳을 겁내고, 섹스를 겁내고, 홀로서기에 따르는 책임을 겁내고, 공포자체를 겁낸다.
원인을
자각하지 못하는 공포도 있다.
바로 보복에 대한 공포다.
이 공포는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되받아치고,
공격하고 싶은 기대에서 생긴다.
공포의 대상에 대한 분노가
공포 이면에 있다가,
공포를 놓아버렸을 때
종종 드러난다.
공포를 놓아버려서 극복하려는
자발성덕분에
그 다음 수준인 분노에 이른다.
이 공포, 분노 감정의 조합을
직시해 항복하면,
즉시 자부심과 용기의 수준으로 상승한다.
대중연설에 대한 공포
공포자체에 대한
공포 놓아버림은
아주 좋은 실험이다.
공포 겁내기를 멈추고 나면
공포도 단지
어떤 느낌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사실
공포는
우울증보다는 훨씬 견딜만한 것이다.
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사람은
놀랍게도 공포의 감정이 되돌아오면 반긴다.
절망보다는 공포가 낫다고 느낀다.
공포가 얼마나 쉽게 자가 증폭하는지를 이해하려면, 한가지 의식에 주목해야 한다.
"마음에 품은대로
실현되기 쉽다"
한결같이 마음에 품고서
에너지를 불어넣은 생각은
마음에 품었던 형태대로
삶에 나타나기 쉽다는 뜻이다.
이렇듯
공포는
두려운 생각을 낳는다.
두려운 생각을 마음에 품을수록
두려운 일이 일어나기 쉽고
그 일이 다시 공포를
증폭시킨다.
나는 인턴의사 시절부터 연설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동료의사들 앞에서 환자사례를 설명하는 일은 생각만해도 섬뜩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런 공포를 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 직원회의에서 환자사례를 발표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까지 생겨버렸다. 환자병력을 몇단락 읽었을 때부터 목소리가 떨리더니 점점 약해지다가 끝내는 멎고 말았다. 마음에 품었던 공포가 치솟으면서 당연히 연설공포가 더욱 증폭되어 연설 의욕마저 잃을 것이다.
이후로
오랫동안
내 능력을 한정하는
신념체계가 작동했다.
"나는 대중앞에서 연설할 수 없어"
"나는 대중 연설가가 아니야"
연설할 기회라면 어떤 것이든 모두 피했고, 그에 따라 자존감을 잃고, 활동을 피하고, 직업상 목표마저 제약을 받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공포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다.
신념체계가
이렇게 변했다.
"여러 사람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아,
난 말을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던 어느날 어떤 공개모임에서 말할 일이 생겼다. 자리에 앉아 공포에 직면할 용기를 낼 겨를은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어떤 일이 생겨야
최악의 사태라고 할 수 있을까?
음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이 끔찍이도 지루할 수 있겠지" 그러자 다른 사람이 연설을 지루하게 했던 경우들이 전부 생각났고, 그런 연설은 사실 흔해서 사람들이 지루해 하더라도 세상이 절대 끝장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공포 이면에 있던 자부심과
자만심도 놓아버렸다.
그렇다. 연설은 끔찍하게 지루할 수도 있다.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미리 다 써놓아서 읽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즉석 연설을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공포가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할말을 미리 적어갔다. 단상에 올라갈 순간이 왔다. 비록 속으로는 잔뜩 겁먹은 채 풀기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읽기만 했지만, 연설이라는 위업을 이루어냈다. 연설이 끝나자 친구 몇명이 소감을 이야기했다. "좋은 내용인 건 맞는데, 확실히 지루하더라" 그렇지만 내면의 자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상황을 직면해 받아들이고 연설을 실제로 해낼 용기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기양양했다. 연설이 지루했다는 사실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해냈다는 점이었다.
공포와 장애를 극복했기에
자존감이 올라갔고
연설을 더이상 피하지 않았다.
한술더 떠 솜씨가 늘면서
발표를 시작할때마다
청중에게 경고부터 했다.
"저는 이 동네에서
말이 지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솔직히 아주 짜증날 수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청중이 웃었다.
그들의 웃음은
누구나 갖고 있을만한
인간적인 면모를 받아주겠다는 의미여서
공포가 가벼워졌다.
이를 통해
유머가 연설을 할때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머는
청중의 인간적인 면모를 파고들어
연민을 얻는 방법이다.
연민속에서
청중과 하나가 되면
청중이 응원하며
격려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공포를 받아들여 준
청중을 사랑하면
청중도
그들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사랑해준다.
감정의 수준에서
이렇게 진화를 이루고 나니
연설을 즐기게도 되었다.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이 생기면
마음에서 남을 웃길 수 있는 부분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완전한 항복과 함께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지 않고 즉석에서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경험이 쌓이면서 연설 실력이 느니, 연설할 일도 늘었다. 덕분에 이전에는 이룰 수 없었던 직업상 목표도 성취했다.
또한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하는 일도 생겼다. 몇 안되는 동료 인턴앞에서 환자의 병력을 읽는 일조차 겁냈던 사람이 긴 과정을 거쳐 텔레비전 방송에 나가 "바바라 월터스 쇼"의 수백만 시청자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겁나는 일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과정은
모두에게 이롭다.
이러한
학습과정이
자동적으로
삶의 여러 다른 영역으로
번져나갔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우리는 더욱 능력있고,
자유롭고, 행복해지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사랑의 치유효과
공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유행병같이 세상을 지배하는 감정이다.
또한
공포는 수십년간 임상에서
수없이 진료한 환자들을
지배한 감정이었다.
공포는 아주 폭넓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그 유형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랄정도다.
특히
공포는 생존과 결부된 것이어서
마음속에서
의견일치가 잘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구석구석 스며있는 공포로 인해
우리의 삶 자체가
공포를 물리치는데 쓸 장치들을 모은
거대한 집합체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대중 매체에서는
거듭 공포스러운 상황을 알려준다.
이를테면 아침뉴스에서 "테러리스트 집단이 음식에 독을 넣을 것이라 위협한다"라고 보도하는 식이다. 이런 주요 뉴스가 끊임없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 감정을 망라해 가장 무서운 것에 마음이 완전히 젖어들 기회를 더 많이 주려는 것 같다.
노래가사대로
'우리는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사이에 붙잡혀 있다'
마음의 상쇄장치를 다 동원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공포가
의식에 쏟아져 나와
불안발작이나 공포증이 나타난 사람에게는
불안신경증이 있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런
신경증에 효과가 있는 바륨이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진정제라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공포는 확대되기 쉽다.
전형적인 공포증 환자는
삶에서 나아갈 많은 길목에서
갈수록 커지는 공포감을 드러내면서
활동에 점점 더 제약을 받는다.
심한 경우에는 완전히 꼼짝 못하게 되기도 하는데 베티라는 환자의 경우가 그랬다. 34세인 베티는 워낙 야위고 헬쓱해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진료실에 들어올때 한아름 안고 있던 종이봉지 무더기에는 건강식품점에서 산 쉰 여섯가지의 비타민, 영양보충제가 들어있었고, 특별한 음식이 든 봉지도 따로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세균 공포증이 있었고, 곧 주위의 모든 것이 세균에 전염될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갖가지 전염성 질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암에 대한 공포로 발전하기도 했다.
베티는 공포를 조장하는 언론 보도를 모두 믿었고, 그래서 거의 모든 음식과 공기, 피부에 내리쬐는 햇볕까지 두려워했다. 흰옷만 고집하는 이유는 색깔있는 천에 들어있는 염료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진료실에서 절대 앉지 않았다. 의자가 오염된 건지 아닌지 두려워해서다. 처방이 필요할때면 처방전 묶음 중간에서 아직 누구도 손대지 않은 부분에 적어달라고 했다. 한술 더 떠 용지를 자기가 떼어내겠다고 했다. 내가 용지를 마지는 것도 싫어했는데, 그건 앞서 진료한 환자와 악수하면서 내게 세균이 옮겨 왔을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티는 항상 흰장값을 끼고 있었다. 전화로 진료를 받게 해달라고도 했는데, 진료실까지 오기가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진료 다음주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겁난다고 했다. 그래서 전화로 상담했다. 거리로 나가기가 겁난다고도 했다. 강도와 강간,공기 오염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동시에 자신의 증상이 악화될까 겁이 나 침대에만 있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리고 여타 모든 공포를 혼합해 자신이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베티는 약이 듣지 않을까, 약에 부작용이 있지는 않을까 겁이 났지만 반면 자신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란 공포에 약을 먹지 않을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나아가 알약에 질식할까 봐 겁이 나 스스로 고른 약마저 끊었다고 했으니, 처방받는 약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자기 가족과 이야기하는 것도 막았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자기를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몰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
몇 주간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다
결국에는 놓아버렸다.
그냥 완전히 포기하고 항복이 주는
후련함을 맛보았다.
베티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유일하게 남은 일은
베티를 사랑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베티를 마음에 떠올리며
사랑스럽게 여겼고,
전화로 이야기 할때마다
베티에게 최대한의 사랑을 보냈다.
그렇게
사랑요법에 들어간지 몇달만에
진료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아무런 이해도 얻지 못하긴 했지만 베티는 조금씩 나아졌고 공포와 장애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심리문제를 놓고 이야기하기가 몹시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몇달, 몇년이 지나도록
진료하면서 내가 한 일은
그저 그녀를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개념은 앞에서 무의욕을 다룰때 제시한 것과 같다.
즉
사랑같은 높은 진동수는
낮은 진동수에 대해 치유효과가 있는데,
베티의 경우에
낮은 진동수란 공포이며
사랑은 안심시키는 기제다.
그저 함께 있으면서
사랑하는 에너지를 보내
감싸 안는 것으로
다른 이의 공포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 사람에게 해주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치유효과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의 법칙을 하나 배울 수 있다.
"공포는
사랑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 잼폴스키는 사랑수업을 비롯한 일련의 저서에서 이 법칙을 중심주제로 삼았다. 이 법칙은 뉴욕 주 롱아일랜드 섬의 작은 마을 맨하셋에 있던 "마음가짐 치유센터"에서 치유법의 바탕을 삼기도 했다.
나는 이곳의 공동 설립자이자 의료고문이었다.
마음가짐 치유는
치명적인 죽음의 병을 앓는 환자들과 이루는 집단 상호작용에 관한 것으로
치유의 전과정이 공포를 놓아버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대체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이 법칙은
위대한 성자와
깨달은 치유자가 보여주는
치유와 기제가 동일하다.
그들이 방출하는
사랑의 진동은 강렬하기 때문에
그들은 존재 자체에
치유하는 힘이 있다.
이러한 치유력은 영적 치유를 가능하게 하고, 사랑을 보내는 생각을 통해서도 전송된다. 이렇게 사랑만으로 치유하는 전설적 존재들은 역사에 기록된 경우만 보아도 아주 많다.
예를들어
테레사 수녀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존재의 빛을 보내는 기제로
수많은 사람을 치유했다.
의식의 법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치유를
기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의식의 법칙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치유현상이 아주 흔하며
예견할 수도 있는 일이다.
높은 의식수준은
그 자체에 타인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고 일깨우는 힘이 있다.
사랑에 방해되는 것을 놓아버리면
사랑하는 능력이 점차 좋아져
그 에너지가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치유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점에
항복기제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치유에는 한가지 결점이 있다. 높은 수준의 사랑을 방출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동안은 치유상태가 유지되지만, 환자가 이런 존재 곁을 떠나면 병이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환자 스스로
의식수준을 끌어올리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사랑하는 생각 보내기에 치유력이 있다면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다 뭔가요? 가족이 그렇게 염려하는데 가족의 사랑은 왜 환자를 치유하지 못하나요? 가족이 환자에게 보내고 있는 생각의 종류를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그들의 생각은 주로
비통과 공포이며
거기에 죄책감과 애증이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햇빛과 같고
부정적인 생각은
구름과 같다고 상상할 수 있다.
우리의 높은 큰 나는
태양과 같은데,
우리가 품는
모든 부정적 생각,
즉 의심 공포, 분노, 억울함 등이
태양의 빛을 어둡게 해
결국 침침해진다.
예수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했다.
성자나 의식수준이 높은 사람은
말뜻 그대로
부정성의 구름을 없애고
태양의 치유력을 최대한 내뿜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런 존재들에게는
자석과도 같은 힘이 있으며
그 힘이 몸이 가는 곳마다
군중을 끌어 당기는 것이다.
예를들면 인도의 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시가 생일을 맞았을때, 2만 5천명의 사람들이 찌는 듯한 열대의 태양아래 어깨를 맞댄 채 한덩어리로 서서 마하리시가 존재함을 축하하며 건강을 빌었다.
공포에 대한 저항을
끊임없이 놓아버려서
공포를 항복하면
공포에 묶여 있던 에너지가 풀려나와
사랑의 에너지로서 빛을 발할 수 있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사랑에는
가장 큰 힘이 있으며
이러한 사랑이 이름난 성자들의 힘이다.
또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힘이다. 부모의 존재는 아이가 자라면서 사랑을 배우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엄마의 사랑을 받은 아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자랄 때 생길 수 있는 가장 운이 좋은 일'이라고 했다.
자랄 때 운이 나빠
무조건적인 사랑속에 감싸이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흔히들
이런 경험이 없으면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 상처가 남아
평생 불구가 된다고 믿는다.
사실 그렇지 않다.
삶의 초기에
큰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공포가 적어서 유리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우리 모두가 본디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본성 자체가 그러하며
우리에게 흐르면서
우리가 숨쉬고 생각하게 해주는
생명 에너지의 본성자체가 그렇듯이
우리 모두는
동일 수준으로
에너지가 진동하는
사랑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스스로를 잘 살펴,
커져가는 공포가
자신의 본성을 가로막도록 놓아두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항복기제를 활용해
내면의 사랑을 재발견할 수 있고
부정성의 구름을 놓아버릴 수 있다.
이러한
내면의 사랑을
재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의 진정한 근원을 갖는다.
그림자 인정하기
우리가
무의식속에 감추고 있는 공포도
감정 성장에 장애가 된다.
그렇듯
우리가 직시하고 있고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영역을
칼융은 "그림자 shadow"라고 명명했다.
융은
자아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의 내면,
즉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 부른 것속에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들이
모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세상과 투사해
세상을 악으로 보고 규탄하면서
세상속의 악과 싸우는 일이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에
그런 생각과 충동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다.
생각과 충동은
인정하면 조용해진다.
일단 조용해지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생각과 충동에
무의식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잘 살펴볼때는
유머감각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단 잘 살펴보고 인정하면
그림자는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사실
유일하게 그림자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런 생각과 충동에 대한
공포 자체다.
일단
자신의 그림자와 친숙해지면
더 이상 자신의 공포를
세상에 투사할 필요가 없어져
공포가 신속하게 사라진다.
어떤 매력이 있기에
갖가지 형태의 아수라장을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가 끝도없이 나올까?
화면에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안전한 장면들이
모두 우리의 정신속에서
금지되어 있는 무의식적 환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동일한 영화를 잘 살펴보고 그런 영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이런 오락이 갖는 매력은 사라진다.
자신의 그림자에 담긴 내용을
인정한 사람은
범죄와 폭력, 무서운 재앙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타인의 의견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속 공포와
친숙해지는데 장애가 된다.
마음속에서는
타인의 동의를 기대하는
공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권위있는 인물을 포함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고
그 의견까지 합쳐 자신의 의견처럼 마음속에서 듣는다.
공포를 살펴볼 때,
칼융이 그림자속에 있는 금지된 것들의 저장고를
집단무의식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좋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용어는
그런 생각과 공상이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감정을 상징으로 표현한다.
또한
누구나 자신이 멍청하고 못생겼으며
귀여운 데라고는 없는 실패작이라는 공포를
남모르게 내내 품고 있다.
무의식적 마음은 예의를 모른다.
지극히 무례한 개념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노숙자를 죽여라'라는 말을 떠올리면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도를 갖는다.
운전할때 누가 끼어들면
자기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보면서
상대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주 솔직하게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상상해보라.
상대방 차를
도로밖으로 밀어내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주 박살내버려 절벽끝으로 밀어버려.
이렇지 않은가?
그것이 무의식의 사고방식이다.
유머감각이 도움이 되는 까닭은
잘 살펴보기만 하면
그런 이미지가 웃길 따름이기 때문이다.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다.
무의식이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그럴뿐이다.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거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의 동물적 마음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직하게 직시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해서
스스로 멜로드라마를 연출하거나,
자기비판에 열을 올리거나
비극적인 기분을 느낄 이유는 없다.
무의식은
원래 상스럽고 미개하다.
우리의 지성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우리의 무의식은
정글에 남아 여전히 나무에서 줄타고 있다.
그림자 측면을 살펴보는 시간은
얌전을 떨거나
비위가 약한 척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시간도 아니다.
무의식에서의 상징은
상징일 뿐이며,
천성자체가 원시적이다.
상징을
무의식으로 다룬다면
상징으로 인해 제약을 받기보다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림자를 계속 감추고
그 많은 공포를 억제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 결과 에너지는 줄어들고
감정면에서 사랑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식의 세계에서 감정은 유유상종하는 법이라
공포는 공포를 끌어당기고,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긴다.
공포를 많이 품을수록
무서운 상황을 삶에 더 많이 끌어당긴다.
각각의 공포에는 방어장치를 만들어낼 에너지가 더 필요해져
에너지가 전부 방어조치를 확대하는 일에 소모된다.
자발적으로 공포를 유심히 살펴
공포에서 벗어날때까지
공포를 연구대상으로 삼으면 즉시 보상을 받는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의식적으로 억제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공포를 쌓아 놓은 저장소가 있다.
이런 다량이 공포가 삶에 흘러넘쳐
경험하는 모든 것을 물들이고
삶의 환희를 퇴색시키고
안면 근육에 반영되어
외모에 영향을 주고,
체력이나 신체장기의 건강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만성 공포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억제한다.
신체운동학의 테스트 방법을 사용하면,
두려워하는 생각은
근력을 크게 떨어뜨리며
경락을 따라 주요장기로 가는
에너지의 흐름을 어지럽힌다는 사실을
즉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공포가
인간관계와 건강, 행복 등
모든면에서 해롭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공포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공상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공포덕분이다.
공포는
생존기제 전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된 방어기제인
공포를 놓아버리면
어딘가 취약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공포로 인해
우리는 삶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
공포야말로
몸에 닥치는 가장 큰 위험요소다.
공포와 죄책감이야말로
만사에 실패를 부르고
질병을 발생시킨다.
보호하기 위해 똑같이 하는 일이라도,
공포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다.
자기몸을 보살피는 일도
질병과 죽음의 공포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몸의 가치를 알고
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삶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도
그들을 잃을까봐 겁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까봐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보살피는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을 잘해내는 것도
우수한 성과를 원하고
동료를 위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업무를 문제없이 수행하는 것도
실직의 공포나 야망추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혜택을 받을 사람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겁나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 더 큰 성취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운전을 조심해서 하는 것도
사고가 겁나서가 아니라
자신을 깊이 존경하기에 안전을 위해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적인 차원도 마찬가지다.
같은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자기의 일처럼 느끼기에
타인을 보살피는 것이
신에게 벌을 받을까봐 두렵기에
사랑하려 애쓰는 것보다
진보가 빠르지 않을까?
"보호하기 위해
똑같이 하는 일이라도,
공포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다"
죄책감
우리는
공포가 취하는 특정 형태 중 한가지를
"죄책감'이라고 부른다.
죄책감은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잘못했으니 처벌을 받을 수있다는
느낌과 연관된다.
처벌은
바깥세상에서 다가오거나
감정상으로 자신을 처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부정적 감정에는
죄책감이 딸려오며,
따라서 공포가 있는 곳에는
죄책감이 존재한다.
죄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근력을 시험해 달라고 하면 근육이 순간적으로 약해짐을 알 수 있다.
"대뇌 반구의 동기화 상태가 깨지고,
경락의 에너지가 균형을 잃는다.
이렇게 죄책감의 본성은 파괴적이다"
죄책감이 파괴적이라면
죄책감을 찬양하는 찬가같은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들어 어느 정신과 의사는 잡지 기고문에서 죄책감을 찬양하며 단언했다. "죄책감은 우리에게 좋습니다" 그러면서 적절한 죄책감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제 죄책감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서,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는 길을 건널때 차가 오는지 보려고 양방향을 살핀다. 이런 습관이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 우리는 어렸을때 조심성이 없이 길을 건너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고 배웠다. 그렇게 해서 아이의 미숙한 마음에는 현실을 보는 눈 대신 죄책감이 들어앉는다. 또 다시 잘못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은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학습된 행동이다.
그러나
죄책감의 99%는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가장 경건하고
온화하고 악의없는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만신창이가 된다.
죄책감은 자신을 비난해 쓸모있고 가치있는 인간이 되지 못했다며 스스로 못을 박는 일일 뿐이다.
"죄책감은 공포처럼 널리 퍼져 있어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우리를 죄스럽게 한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마음의 일부가 말한다. 아니면 그 순간에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더 잘해야만 한다. 골프 점수가 더 잘나와야 한다.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책을 읽어야 한다. 섹스도 더 잘해야 한다. 더 맛있게 요리해라. 더 빨리 뛰어라. 더 힘세져라. 더 커라. 더 똑똑해라. 더 배워라. 사는 일이 두렵고 다가올 죽음이 두려운 가운데, 지금 이 순간은 죄스럽다.
우리는 죄책감을
잊고 사는 것으로
에써 죄책감을 피한다.
잊는 방법으로
죄책감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남에게 투사하고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된 죄책감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죄책감이 다시 나타나는 형태로는
자기처벌이나 사고, 불운, 실직, 실연,
질병, 피로, 탈진 등이 있고,
마음이 생각해낸 기발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즐거움과 환희, 생기를 잃는 일도 생긴다.
사랑이 삶을 상징하듯
죄책감은 죽음을 상징한다.
죄책감은
왜소한 자아의 일부이며,
죄책감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를 믿는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 사람이 던진
부정적 한마디가
그날의 행복과 환희를 한순간에 망친다.
육체적 질병이 있는 곳에
죄책감이 있을 공산이 크며,
죄책감은
우리의 내면이
본디 천진하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는 왜 그리도
많은 쓰레기를 믿는 것일까?"
"정말로
천진하기 때문일까?
" 자라면서 남들에게 들은 말을
사실로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남에게 듣는 말을
사실로 믿기 때문이 아닐까?
"내면이 천진하고 순진한 탓에
그동한 오만가지 거짓말을 믿었으면서
또 새롭게 오만가지 거짓말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때 알수 있듯이,
스스로 죄가 있다고 믿는 것은
바로 우리가 천진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면이 천진한 탓에
세상의 부정성을 모두 믿을 뿐 아니라,
그 부정성을 방치한 탓에 생기가 없어지고,
자신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며,
작고 불쌍한 왜소함에 스스로 만족하고 만다.
천진한 갓난아이가
그렇듯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고,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컴퓨터처럼 프로그램이 설치되도록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점을 아는 것이 곧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수련 코스나 의식확장 세미나가 있다.
여기선
뭘하는 것일까?
신개념의 복잡한 수련법이라도 익히는 걸까?
누군가
신비한 진실을 설명한 대로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일까?
의식수련법은 대부분 다음과 같이 압축할 수 있다.
믿고 있는 것,
매일 받아들이는 것을
자각하라.
이미 설치된 프로그램들을 잘 살펴보고,
이의를 제기하고,
해체한 다음 놓아버리자.
정신을 바짝차리고
세상에서 주입되는
부정적 프로그램의 노예가 되어
이용당하는 일에서 벗어나자.
그러면
프로그램의 본색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본색은
우리를 통제하고 이용하고
돈을 뜯어내고 헌신과 에너지와
충성을 갈취하려는 것이다.
믿고 있는 것,
매일 받아들이는 것을 자각하라.
이미 설치된 프로그램들을 잘 살펴보고,
이의를 제기하고,
해체한 다음 놓아버리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상에서 주입되는 부정적 프로그램의 노예가 되어
이용당하는 일에서 벗어나자.
그러면
프로그램의 본색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본색은 우리를 통제하고, 이용하고,
헌신과 에너지, 충성을 갈취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영화 "트론"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기제를 아주 멋지게 보여준다. 영화속에서 "마스터 컨트롤"이 하는 기능이 바로 프로그램을 주입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프로그램이 주입되는 진상을 알면,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새 컴퓨터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프로그램이 주입되는
빈 공간이다.
이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분노가 치민다.
분노하는 편이 체념,
무의욕, 우울, 비탄에 빠지는 것보다 낫다.
분노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이웃사람, 지하철 대화,
종업원이 무심코 뱉은 한마디,
갖은 헛소리에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관장함을 뜻한다.
우리의 기억장치에 들어온 것은
헛소리였다.
이 점을 알게되면
공포는 크게 줄어든다.
감정이 일어나도록 놓아둔 채
그 본색을 알아보고,
모든 헛소리를 집어치우고
모두 놓아버리는 일을
즐길 수 있다.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보고
내면이 본래 천진하다는 것을 알면,
자신을 미워할 수 없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남이 퍼붓는 비난을 믿지 않고,
가치있는 인간이 되지 못한 것으로
못박으려는 교묘한 시도에 당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힘을
되찾을 때다.
지나가던 사기꾼들에게
번번히 힘을 넘겨주는 일을
그만둘 때다.
그들이
우리의 공포심을 자극해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내거나
자기들이 내세우는 대의의 노예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의 에너지를 먹고산다.
이제 선택할 능력이 있기에
그 모든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내면을 탐험하다가
끔찍하고 지독한 참모습을 만날까봐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세상이 우리 마음에 설치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참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세워놓은 장애물이다.
세상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참모습이다.
왜일까?
발견하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이상 통제하고 조종하고 이용하고
착취하고 노예로 만들고 가두어놓고,
헐뜯고 힘을 뺏을 수 없다.
그래서
내면탐험은
신비한 분위기와
불길한 예감에 싸여있는 것이다.
내면탐험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내면으로 들어가
환상을 하나씩 버리고,
거짓을 하나씩 버리고,
부정적 프로그램을 하나씩 버리면
내면은 더욱더 밝아진다.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더욱더 강하게 자각된다.
더욱더 가볍게 느낀다.
삶이 점차 수월해진다.
태초부터
위대한 스승들은
한결같이, 내면을 보고
참모습을 발견하라고 했다.
우리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
그 참모습을 알면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발견할 것이
죄책감을 느낄만한 무엇이라면,
뭔가 부패하고 악랄하고 부정적인 것이라면,
세상의 위대한 스승들이 한결같이 내면을 보라고 충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한사코 내면을
피하라고 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악이라 부르는 것 모두가 겉보기에는 악이 맞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맨 위만보면, 표면에 드러난 얇은 껍데기만 보면 악이 맞다. 이렇게 오인하는 것은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패하지 않았다.
무지할 뿐이다.
죄책감에서 오는 공포와
공포에 따르는 에너지를 많이 포기하고 나면,
어느덧 질병이나 이런저런 증상이 사라진다.
자존감이 증가하는 형태로
자신을 사랑할 능력이 돌아오면서
남을 사랑할 능력도 생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면
생명에너지가 다시 솟는다.
종교체험으로 변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극적인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용서기제를 통해 죄책감에서 홀연히 벗어남으로써 중증의 말기질환에서 벗어난 사례가 수없이 많다. 그들의 종교관에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죄책감이 줄어들면 생명 에너지가 다시 솟으며 평안과 건강이 따라온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치유해
스스로 감정 건강을 증지시키는 일에 관한 한
편집증적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
내게 죄책감을 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전부 파악해
그들이 주는 해로운 영향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공포와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동일한 동기를 얻어
행동할 수 있을지 자문할 수도 있다.
이웃 사람을
칼로 찌르지 않는 것이
단지 죄책감때문일까?
그 사람은
본디 천진한데다가
발전하려고 무던히 애쓰다 보니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마음에서
찌르지 않는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것이든
종교을 가르침을 따를 때도
죄책감과 공포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따르면
효과가 더욱 좋지 않을까?
죄책감이 과연 필요한지 자문해볼 수도 있다.
"죄책감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일이
과연 있을까?
" 오직
죄책감때문에 행동해야 할 만큼
우리는 그렇게 멍청한 것일까?
" 그렇게나
의식이 없을까?
" 적절히 처신하려는
동기면에서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마음이
죄책감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검토을 통해
이런 문제의 사회적 기원을 살펴보면,
중세시대가 저물려면
멀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종교재판이
더욱 새롭고 미묘한 형태의
잔인성을 띠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 행성위에서 번성중인
부정성 체계 한가지를
부지불식간에 믿었다.
잘못을 따지고
죄책감을 주는 것은
일종의 잔인성 아닐까?
우리는
타인이 자가 고문프로그램을
우리에게 주입하게 했고,
대신 우리도
타인이 스스로를 고문하게 함으로써
보복했다.
또
우리는 죄책감이
우리를 조종하게 했고,
우리도 동일한 죄책감 기제를 써서
타인을 이용하고 통제하려고 했다.
진정한 큰 나가 누리는 현실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억제하는 만큼,
실제로 경험한 이들에 대해서는 분개한다.
자신이 장애를 느끼는 분야에서
남이 활발한 것에
분개한다.
이 냉엄한 실상은 바닷가를 걷다 잡은 게를 들통 가득들고 오던 어부와 마주친 남자의 이야기에도 담겨 있다. 남자가 어부에게 물었다. 들통에 뚜껑을 덮어 게가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요" 현명한 어부가 말했다.
"그럴필요 없어요.
보시다시피 한놈이 들통을 빠져나가려고 벽을 타고 올라오면,
다른 놈이 다리를 물고 뒤로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뚜껑이 필요없지요"
계속해서
놓아버림으로써
밝아지고 자유로워지면
불행히도
이 세상의 본색 또한
게로 가득한 들통과 같다는 것이 보인다.
이때
부정성의 전체규모가
뚜렷해진다.
그동안 받아들인
부정적 프로그램의 규모를
완전히 자각하면
분노를 느끼고
부정성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바람을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놓아버리면
자유로워진다.
첫댓글 아픔과 괴로움을 겁내고, 사는 일을 겁내고 사랑을 겁내고, 가까워지기를 겁내고, 거절을 겁내고, 실패를 겁내고, 신을 겁내고, 지옥을 겁내고, 가난을 겁내고, 조롱과 비판을 겁내고, 함정을 겁내고, 자신없어 겁내고, 위험을 겁내고, 반감을 살까 겁내고, 지루할까봐 겁내고, 책임을 맡는 것을 겁내고, 결정내리기를 겁내고, 지휘권 갖기를 겁내고, 처벌을 겁내고, 변화를 겁내고, 위험해질까봐 겁내고, 지휘권 갖기를 겁내고, 통제력을 잃을까 겁내고, 감정자체를 겁내고, 조종당할까봐 겁내고, 들킬까봐 겁내고, 높은 곳을 겁내고, 섹스를 겁내고, 홀로서기에 따르는 책임을 겁내고, 공포자체를 겁낸다.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보고 내면이 본래 천진하다는 것을 알면, 자신을 미워할 수 없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남이 퍼붓는 비난을 믿지 않고, 가치있는 인간이 되지 못한 것으로 못박으려는 교묘한 시도에 당하지도 않는다.
- 자신의 힘을 되찾을때다. 지나가던 사기꾼들에게 번번히 힘을 넘겨주는 일을 그만둘때다. 그들이 우리의 공포심을 자극해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내거나 자기들이 내세우는 대의의 노예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의 에너지를 먹고산다. 이제 선택할 능력이 있기에 그 모든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모든 공포의 근원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들었습니다
'죽음이란
의식(영)이 옷(육체)을 벗어 놓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한 과정'
이라는 깨달음이 올 때 웬만한 공포는 거의 다 사라지고 자유로워지지요
'내가 죽거든 잔치를 열어라
육체라는 눅눅한 옷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뽀송뽀송하고 홀가분하랴?'
하고
미리 쓰는 유언에 적어 놨네요ㅋ
높은 의식수준은 그 자체에 타인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고 일깨우는 힘이 있다. 사랑에 방해되는 것을 놓아버리면 사랑하는 능력이 점차 좋아져 그 에너지가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치유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점에 항복기제의 가치가 있다
저도 미리쓰는 유언 생각해봐야겠네요 ㅎㅎㅎㅎ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
오늘의 삶이 마지막이라면 정말 그 반응이 내가 정말 원한 것일까?
@문형철 나는 천국을 보았다 두번째 이야기/이븐 알렉산더 지음
책 읽고 있는데
좋네요ㅋ
죽음을 내 삶에서 아주 중대한 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ᆞ
@사랑챠크라 죽음
요즘 제 사고의 중요한 지점이 바로 죽음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문형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면
삶 속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듯 합니다ㅋ
@사랑챠크라 아! 그렇군요
두려움 놓아버림을 더 잘해야겠네요
요즘 놓아버림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놓아버림에 좀더 의도를 가져봐야겠어요 ㅎㅎㅎ
"자기 몸을 보살피는 일도 질병과 죽음의 공포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몸의 가치를 알고 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검토을 통해 이런 문제의 사회적 기원을 살펴보면, 중세시대가 저물려면 멀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종교재판이 더욱 새롭고 미묘한 형태의 잔인성을 띠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 행성위에서 번성중인 부정성 체계 한가지를 부지불식간에 믿었다. 잘못을 따지고 죄책감을 주는 것은 일종의 잔인성 아닐까?
놓아버리면 자유로워진다.
"사랑하는 생각 보내기에 치유력이 있다면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다 뭔가요?
가족이 그렇게 염려하는데 가족의 사랑은 왜 환자를 치유하지 못하나요?
가족이 환자에게 보내고 있는 생각의 종류를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그들의 생각은 주로 비통과 공포이며 거기에 죄책감과 애증이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고마우신 원장님, '기도'와 '시각화'로 동생을 치유할 수 있길 소원하는 제가 명심할 대목입니다.
어디서 읽었는지 생각이 안 나 검색어를 바꿔보고 원장님께 메일로 여쭤보기도 했는데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 홀가분하고 날아오를 듯한 기분입니다.
창밖의 보름달도 환합니다.
뮤즈님 응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축복합니다 ㅎㅎㅎ
자기몸을 보살피는 일도 질병과 죽음의 공포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몸의 가치를 알고 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삶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도 그들을 잃을까봐 겁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까봐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보살피는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을 잘해내는 것도 우수한 성과를 원하고 동료를 위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업무를 문제없이 수행하는 것도 실직의 공포나 야망추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혜택을 받을 사람때문이라
사랑수업
중고책 사서 읽기 시작!!
그동안 받아들인
부정적 프로그램의 규모를
완전히 자각하면
분노를 느끼고
부정성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바람을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놓아버리면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