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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중국과 동방이 연진[烟]으로 막혔는데
녹원(鹿園)의 학수(鶴樹)註 367367 석가모니가 녹야원(綠野苑)에서 설법한 것을 말한다.닫기는 어느덧 2천 년이 되었구나
해외로 유전해오니 참으로 경하일세
동국[東震]과 서천축(西乾)이 한 세상이 되었구나
註 367
석가모니가 녹야원(綠野苑)에서 설법한 것을 말한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지명 : 서천축
제4 탑상(塔像第四)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 >의상전과 부석본비를 비교해서 살펴보다(650년 (음))
의상전과 부석본비를 비교해서 살펴보다 ( 650년 (음) )
이상의 기록을 의상전(義湘傳)에서 살펴보면, “영휘(永徽)註 368368 당 고종의 연호로 650년(진덕왕 4)~655년(무열왕 2)에 사용하였다.닫기 초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지엄법사를 뵈었다”고 하나, 부석사의 본비[浮石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註 369369 당 고조의 연호로 618년(진평왕 40)~626년(진평왕 48)에 사용하였다.닫기 8년(625)에 탄생하여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영휘 원년 경술(庚戌)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까지 이르렀으나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용삭(龍朔)註 370370 당 고종의 연호로 661년(문무왕 1)~663년(문무왕 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신유(辛酉 ; 0661)에 당으로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아가 배웠다. 총장(總章)註 371371 당 고종의 연호로 668년(문무왕 8)~669년(문무왕 9)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668) 지엄법사가 세상을 떠나자 함형(咸亨)註 372372 당 고종의 연호로 670년(문무왕 10)~673년(문무왕 13)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서 장안(長安)註 373373 후주(後周) 칙천무후의 연호로 701년(효소왕 10)~704년(성덕왕 3)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임인(壬寅 ; 0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8세라고 하였다. 그러면 의상이 지엄과 함께 도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의 부처 어금니를 청했던 일은 신유(辛酉 ; 0661)에서 무진(戊辰 ; 06680)에 이르는 7, 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 고종이 강화도로 들어간 임진년(壬辰年 ; 1232)에 [왕이]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이다.
도리천(忉利天)註 374374 불교의 우주관인 3계(界) 28천(天) 가운데 욕계(欲界) 6천(天) 중의 두 번째 천(天)으로,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는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에 있다(定方晟, ≪佛敎にみる世界觀≫, 文明社, 1980).닫기의 하루 밤낮은 인간 세계의 1백 년에 해당되는데, 또 의상법사가 처음으로 당나라에 들어간 신유(辛酉 ; 0661)로부터 [본조] 고종의 임진(壬辰 ; 1232)까지를 계산하면 693년이요, [고종의] 경자년(庚子年 ; 1249)에 이르러야 비로소 7백 년이 되며, 7일 기한이 찬다. 강도로부터 나오던 지원(至元) 7년 경오(庚午 ; 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약 천제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부처님의 어금니가]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면, 선사 심감이 강도를 나올 때 가지고 와서 바친 것은 아마 부처님 진짜 어금니가 아닌 듯하다. 이 해 봄 강도를 나오기 전에 [왕은] 대궐에서 모든 종파의 고승을 모아서 부처님 어금니와 사리를 얻고자 정성껏 빌었으나 한 매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7일의 기한이 다 차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도 그럴 듯 하다.
21년 갑신(甲申 ; 1284)에 국청사(國淸寺)註 375375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국청동에 있었던 천태종의 본찰이다.닫기 금탑(金塔)을 보수하고 임금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더불어 묘각사(妙覺寺)註 376376 고려의 왕궁이 있던 지금의 경기도 개성시 영평문 밖에 있던 절이다.닫기에 행차하니 대중이 모여 경찬하고는 부처님 어금니와 낙산(洛山)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임금과 신하들과 대중이 모두 떠받들어 예배한 뒤에 함께 금탑 속에 넣었다.
나 또한 이 모임에 참례하여 이른바 부처님의 어금니라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가 3촌 가량 되었으며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註 377377 일연(一然)의 제자인 혼구(混丘)의 호이다. 10살 때 무위사(無爲寺)의 천경(天鏡)선사에게 들어가 중이 되었고, 일연선사에게 배우면서 일연의 선석(禪席)을 물려받았다. 충렬왕 때에 대선사가 되었고, 고려 충선왕 즉위 후에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이 되었으며, 1313년 고려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왕사가 되었다. 그 뒤 은퇴하여 송림사(松林寺)에 있다가 1322년(충숙왕 9)에 입적하였다. 시호는 보감국사(寶鑑國師)이다.닫기이 기록한다.
註 368
당 고종의 연호로 650년(진덕왕 4)~655년(무열왕 2)에 사용하였다.
註 369
당 고조의 연호로 618년(진평왕 40)~626년(진평왕 48)에 사용하였다.
註 370
당 고종의 연호로 661년(문무왕 1)~663년(문무왕 3년)에 사용하였다.
註 371
당 고종의 연호로 668년(문무왕 8)~669년(문무왕 9)에 사용하였다.
註 372
당 고종의 연호로 670년(문무왕 10)~673년(문무왕 13)에 사용하였다.
註 373
후주(後周) 칙천무후의 연호로 701년(효소왕 10)~704년(성덕왕 3)에 사용하였다.
註 374
불교의 우주관인 3계(界) 28천(天) 가운데 욕계(欲界) 6천(天) 중의 두 번째 천(天)으로,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는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에 있다(定方晟, ≪佛敎にみる世界觀≫, 文明社, 1980).
註 375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국청동에 있었던 천태종의 본찰이다.
註 376
고려의 왕궁이 있던 지금의 경기도 개성시 영평문 밖에 있던 절이다.
註 377
일연(一然)의 제자인 혼구(混丘)의 호이다. 10살 때 무위사(無爲寺)의 천경(天鏡)선사에게 들어가 중이 되었고, 일연선사에게 배우면서 일연의 선석(禪席)을 물려받았다. 충렬왕 때에 대선사가 되었고, 고려 충선왕 즉위 후에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이 되었으며, 1313년 고려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왕사가 되었다. 그 뒤 은퇴하여 송림사(松林寺)에 있다가 1322년(충숙왕 9)에 입적하였다. 시호는 보감국사(寶鑑國師)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의상,지엄법사,의상,원효,지엄법사,지엄법사,의상,의상,지엄,고종,의상법사,고종,심감,장목왕후,무극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弥勒仙花·未尸郎·真慈師) >진흥왕이 원화를 뽑았다가 폐지하다(540년 (음))
진흥왕이 원화를 뽑았다가 폐지하다 ( 540년 (음) )
미륵선화註 378378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 수령인 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 집단 자체가 미륵을 좇는 무리로 일컬어졌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하여 결합된 동일 신앙 집단으로 보고 있으며(김영태, 「미륵선화고」, ≪불교학보≫ 3·4합, 1966| 김상기,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 ≪동방사논총≫, 1974), 나아가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특히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야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田村圓澄, 「半跏思惟像과 聖德太子信仰」, ≪韓日古代文化交涉史硏究≫, 1974, 58~59쪽). 그러나 이 시기에 화랑과 결부된 미륵신앙은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메시아주의적 성격보다는 이상국가를 건설하고 싶다는 왕실 및 귀족계급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이기동, 「신라 화랑도의 사회학적 고찰」,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361~363쪽).닫기∙미시랑∙진자스님
제24대 진흥왕(眞興王)註 379379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三麥宗)인데, 또는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의 대동(大同)註 380380 양(梁) 무제의 연호로 535년~546년에 사용하였다.닫기 6년 경신(庚申)에 즉위하였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흠모하여 일념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불사(佛寺)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승려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천성이 풍미(風味)하고 신선(神仙)註 381381 신라 고유의 현묘한 도인 풍류(風流)를 가리킨다.닫기을 매우 숭상하여 민가의 낭자 중에서 아름답고 예쁜 자를 택하여 받들어 원화(原花)로 삼았다.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인물을 뽑고 그들에게 효도와 우애, 그리고 충성과 신의를 가르치려함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하였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峧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는데, 모여든 무리가 3, 4백명이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하였다. [그래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고, 취하게 되자 몰래 북천(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프게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노래를 지어 동네 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노래를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중에서 찾아내고 곧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대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시켰다.
註 378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 수령인 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 집단 자체가 미륵을 좇는 무리로 일컬어졌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하여 결합된 동일 신앙 집단으로 보고 있으며(김영태, 「미륵선화고」, ≪불교학보≫ 3·4합, 1966| 김상기,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 ≪동방사논총≫, 1974), 나아가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특히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야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田村圓澄, 「半跏思惟像과 聖德太子信仰」, ≪韓日古代文化交涉史硏究≫, 1974, 58~59쪽). 그러나 이 시기에 화랑과 결부된 미륵신앙은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메시아주의적 성격보다는 이상국가를 건설하고 싶다는 왕실 및 귀족계급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이기동, 「신라 화랑도의 사회학적 고찰」,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361~363쪽).
註 379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380
양(梁) 무제의 연호로 535년~546년에 사용하였다.
註 381
신라 고유의 현묘한 도인 풍류(風流)를 가리킨다.
주제분류
사회>사회조직>화랑도>화랑
색인어
이름 : 미륵선화,미시랑,진자,진흥왕,삼맥종,심맥종,법흥왕,남모랑,교정랑,교정,남모,남모,교정랑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弥勒仙花·未尸郎·真慈師) >진흥왕이 화랑을 뽑다(576년 (음))
진흥왕이 화랑을 뽑다 ( 576년 (음) )
여러 해 뒤에 왕은 또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명령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처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를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고쳐 선행을 하게 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온순하게 하니, 5상(五常)註 382382 인·의·예·지·신을 가리킨다.닫기, 6예(六藝)註 383383 고대 중국의 교육 과목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이른다.닫기, 3사(三師)註 384384 제왕을 보좌하는 최고 관직인 태사·태부·태보를 말한다.닫기, 6정(六正)註 385385 6정신(六正臣), 곧 성신(聖臣)·양신(良臣)·충신(忠臣)·지신(智臣)·정신(貞臣)·직신(直臣)을 말하는 것으로 임금을 옳게 인도할 만한 재질과 덕망을 갖춘 신하를 가리킨다.닫기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국사(國史)≫에는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註 386386 진(陳) 선제(宣帝)의 연호로 569년~582년에 사용하였다.닫기 8년 병신(丙申)(576년)에 비로소 화랑을 받들었다고 하였으나, 아마도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註 382
인·의·예·지·신을 가리킨다.
註 383
고대 중국의 교육 과목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이른다.
註 384
제왕을 보좌하는 최고 관직인 태사·태부·태보를 말한다.
註 385
6정신(六正臣), 곧 성신(聖臣)·양신(良臣)·충신(忠臣)·지신(智臣)·정신(貞臣)·직신(直臣)을 말하는 것으로 임금을 옳게 인도할 만한 재질과 덕망을 갖춘 신하를 가리킨다.
註 386
진(陳) 선제(宣帝)의 연호로 569년~582년에 사용하였다.
주제분류
사회>사회조직>화랑도>화랑
색인어
이름 : 설원랑
지명 : 명주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弥勒仙花·未尸郎·真慈師) >진자스님이 미륵선화를 쫓다
진자스님이 미륵선화를 쫓다
진지왕註 387387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6년~579년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닫기대에 흥륜사(興輪寺)에는 진자(眞慈) 혹은 정자(貞慈)라고도 한다.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항상 당주(堂主)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아가 서원을 발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우리 대성(大聖)註 388388 석가모니를 말하기도 하고 덕이 높은 보살을 말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미륵불을 가리킨다.닫기께서는 화랑으로 화하시어 세상에 출현하셔서 제가 항상 거룩하신 모습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들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의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독실해졌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승려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의 수원사(水源寺)註 389389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공주목 불우조에는 “水原寺在月城山”이라고 되어 있다.닫기로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진자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며, 그 절을 찾아 열흘 동안의 행정을 한 걸음마다 한 번씩을 절하며 갔다. 그 절에 이르자 문 밖에 복스럽고 섬세하게 생긴 한 도령이 있었다. [그는] 고운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해서 작은 문으로 인도하여 객실로 영접하였다. 진자는 한편으로 올라가면서 한편으로는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잘 모르면서 어찌하여 [나를] 대접함이 이렇게도 은근한가?”라고 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저도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께서 먼 곳에서 오심을 보고 위로를 드릴 뿐입니다”고 하였다.
잠시 후 [그는] 문 밖으로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우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 절의 승려들에게 지난밤의 꿈과 [자신이] 이곳에 온 뜻만을 이야기하고는 또 말하기를, “잠시 말석에서라도 몸을 붙여 미륵선화를 기다리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절의 승려들은 그의 정상을 허황된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의 은근하고 정성스러운 태도를 보고서 말하기를,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과 철인이 살고 있어 명감(冥感)이 많다고 합니다. 어찌 그곳으로 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자가 그 말을 좇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서 맞으면서 말하기를,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미륵선화를 뵙고자 합니다”고 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지난번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뵈었는데, 또 다시 와서 무엇을 구한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진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곧장] 달려서 본사로 돌아왔다. 한 달 정도 후에 진지왕이 그 소식을 듣고 진자를 불러 그 연유를 묻고 말하기를, “낭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면, 성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註 387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6년~579년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註 388
석가모니를 말하기도 하고 덕이 높은 보살을 말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미륵불을 가리킨다.
註 389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공주목 불우조에는 “水原寺在月城山”이라고 되어 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진지왕,진자,미륵선화,진자,진자,진자,미륵선화,진자,미륵선화,미륵선화,진자,진지왕,진자
제4 탑상(塔像第四)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弥勒仙花·未尸郎·真慈師) >진자스님이 미시랑을 만나다
진자스님이 미시랑을 만나다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를 모아 두루 마을을 다니면서 찾았다. 한 소년이 있었는데, 화장을 곱게 하고 용모가 수려하였으며 영묘사(靈妙寺)註 390390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 남천(南川)의 끝부분에 있었던 사찰로 635년(선덕왕 4)에 세워졌다. 사천왕사와 더불어 양지(良志) 스님의 작품이 가장 많이 간직되었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져 있던 장육삼존불을 비롯하여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모두 양지의 것으로 전한다. 그 뒤 764년(경덕왕 23)에 장육삼존불을 개금하였고, 1460년(세조 6)에 봉덕사의 신종(神鐘)을 이 절로 옮겨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이 절터에서는 금당터를 비롯하여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밖에 당간지주가 남아있으며,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간혹 발견된다.닫기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보자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분이 미륵선화다”고 하였다. 이에 다가가서 묻기를, “낭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성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그를 가마에 태우고 들어가서 왕에게 뵈었더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그의 자제들에 대한 화목과 예의와 풍교(風敎)는 보통과는 달랐다. [그의] 풍류가 세상에 빛난 지 거의 7년이 되더니 문득 간 곳이 없었다. 진자는 슬퍼하고 [그를] 생각함이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비로운 은택에 흠뻑 젖었고, [그의] 맑은 교화를 친히 접했으므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서 정성으로 도를 닦아 만년에는 [그] 또한 세상 마친 곳을 알 수 없다.
설명하는 이가 말하기를, “미(未)는 미(彌)와 음이 가깝고, 시(尸)는 력(力)과 [글자]모양이 서로 비슷하므로 그 근사함에 가탁하여 수수께끼처럼 한 것이다. 대성(大聖)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아마 이 땅에 인연이 있었으므로 때때로 나타나 보인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고 하고 남에게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륵의 유풍이다. 길 옆에 섰던 나무를 지금도 견랑(見郞)이라고 이름하고, 또 항간의 말로는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註 390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 남천(南川)의 끝부분에 있었던 사찰로 635년(선덕왕 4)에 세워졌다. 사천왕사와 더불어 양지(良志) 스님의 작품이 가장 많이 간직되었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져 있던 장육삼존불을 비롯하여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모두 양지의 것으로 전한다. 그 뒤 764년(경덕왕 23)에 장육삼존불을 개금하였고, 1460년(세조 6)에 봉덕사의 신종(神鐘)을 이 절로 옮겨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이 절터에서는 금당터를 비롯하여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밖에 당간지주가 남아있으며,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간혹 발견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사회>사회조직>화랑도>화랑
색인어
이름 : 진자,진자,미륵선화,미시,진자,진자,미륵선화,미시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弥勒仙花·未尸郎·真慈師)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향기로운 자취 찾아 걸음마다 그 모습 우르러
간 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덕일세
홀연히 봄은 가고 찾을 곳 없더니
뉘라서 알았으랴, 잠깐 사이 상림(上林)註 391391 중국 진한대의 궁궐 정원인데, 후대에 대궐의 뒷동산에 대한 통칭이 되었다.닫기이 붉을 줄을
註 391
중국 진한대의 궁궐 정원인데, 후대에 대궐의 뒷동산에 대한 통칭이 되었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백월산 이름의 유래
백월산 이름의 유래
남백월이성 노힐부득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는 “백월산(白月山)註 392392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월촌리에 있는 산 이름이다.닫기은 신라 구사군註 393393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대이다.닫기의 북쪽에 있다. 옛 굴자군(屈自郡)으로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이다. 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는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이다”고 하였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 당(唐)나라의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에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그] 그림자가 못 가운데 나타났다. 황제는 화공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그리게 하고, 사신을 보내 천하를 돌면서 찾게 했는데, 해동(海東)에 이르러 [이] 산에 큰 사자암(師子嵓)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산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화산(花山)註 394394 백월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닫기그 산의 몸체는 하나지만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이라고 하였다.으로서 그림과 서로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 진위를 알 수 없었으므로 신발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두고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그] 신발의 그림자가 역시 연못에 나타났다. 황제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 이름을 백월산이라고 지어 주었더니 보름 전에는 흰 달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 뒤에는 연못 가운데에 그림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註 392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월촌리에 있는 산 이름이다.
註 393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대이다.
註 394
백월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주제분류
정치>신이>자연현상>땅·산·돌·물·바다
정치>신이>기타>기타
색인어
서명 : 백월산양성성도기
국명 : 당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부득과 박박이 승려가 되다
부득과 박박이 승려가 되다
[이] 산의 동남쪽 3천 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努肹夫得) 득(得)은 등(等)이라고도 한다.인데, 아버지의 이름은 월장(月藏)이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었다. 또 한 사람은 달달박박(怛怛朴朴)인데, 아버지의 이름은 수범(修梵)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범마(梵摩)였다. 향전(鄕傳)에서 치산촌(雉山村)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두 사람의 이름은 방언인데, 두 집에서 각각 다 두 사람의 마음 수행이 오르고 또 올라 지조를 지켰다는 두 가지 뜻으로서 이름 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으며 세속을 벗어날 고원한 생각이 있어서 서로 더불어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이가 모두 스무 살이 되자 [그들은] [그] 마을의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서남쪽의 치산촌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 절이 있어 정신을 수련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은 회진암(懷眞庵)에 살았는데, 혹 양사(壤寺) 지금의 회진동(懷眞洞)에 있는 옛 절터가 이것이다.라고 했고, 박박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이 산(梨山) 위에 있는 절터가 이것이다.에 살았다.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방외(方外)의 생각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육신과 세상의 무상함을 관조하고 서로 말하기를, “기름진 밭과 풍년든 해는 참으로 좋지만, 의식(衣食)이 마음에 따라 생겨서 저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고, 부녀와 집이 진정으로 좋지만, 연화장(蓮池花藏)註 395395 비로자나불이 있는 공덕 무량하고 광대 장엄의 세계를 이른다.닫기에서 여러 많은 성인들과 함께 놀고,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불법을 배우며 마땅히 성불(成佛)해야 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어야 함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마땅히 얽힌 인연들로부터 벗어나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지, 어찌 풍진에 골몰하여 세속의 무리들과 다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들은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고 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백호(白毫)註 396396 부처의 32상(相)의 하나이다. 눈썹 사이에 난 터럭으로 무량한 광명을 비춘다고 한다.닫기의 빛이 서쪽으로부터 비치면서 빛 가운데서 금색의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만져 주었다. 깨어나 꿈이야기를 하였더니 두 사람이 꼭 같았으므로 모두 오랫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이다.으로 들어갔다.
박박스님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잣집 8자 방을 짓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고 하고, 부득스님은 동쪽 고개의 첩첩한 바위 아래 물이 있는 곳에 역시 방장(方丈)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하여 향전에는 부득은 산 북쪽의 유리동(瑠璃洞)에 살았는데 지금의 판방이고, 박박은 산 남쪽의 법정동(法精洞) 뇌방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상반된다. 지금 살펴보면 향전이 잘못되었다.각자의 암자에 살았다.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불[彌勒]註 397397 인도 바라내국의 바라문집에서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하늘에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석존 입멸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면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고 한다. 그 때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하여 3회의 설법으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닫기을 구했고 박박은 아미타불[彌陀]註 398398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의 이름이다.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이 부처님은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이상국 건설을 기원하고 또 48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 끝에 성불한 존재라고 한다.닫기을 예배하고 염송하였다.
註 395
비로자나불이 있는 공덕 무량하고 광대 장엄의 세계를 이른다.
註 396
부처의 32상(相)의 하나이다. 눈썹 사이에 난 터럭으로 무량한 광명을 비춘다고 한다.
註 397
인도 바라내국의 바라문집에서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하늘에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석존 입멸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면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고 한다. 그 때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하여 3회의 설법으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註 398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의 이름이다.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이 부처님은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이상국 건설을 기원하고 또 48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 끝에 성불한 존재라고 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노힐부득,월장,미승,달달박박,수범,범마,부득,박박,박박,부득,부득,박박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부득과 박박이 관음보살을 만나 부처가 되다(709년 4월 8일(음))
부득과 박박이 관음보살을 만나 부처가 되다 ( 709년 04월08일(음) )
3년이 채 못된 경룡(景龍)註 399399 당 중종(中宗)의 연호로 707년~710년에 사용하였다.닫기 3년 기유(己酉) 4월 8일, 즉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었다. 날이 저물 무렵에 나이 스무 살쯤 된 아름다운 자태를 한 낭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을 풍기면서 뜻 밖에 북암(北庵) 향전에는 남암(南庵)이라고 하였다.에 와서 묵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쳤다.
가는 길 해지니 산은 첩첩 저문데
길 막히고 인가 멀어 이웃도 없네
오늘은 이 암자에 묵어 가려 하오니
자비로운 화상이여 노하지 마소서
박박이 말하기를, “난야(蘭若)註 400400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원을 말한다.닫기는 청정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삼으니, 그대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오. 이곳에 지체하지 마시오”라고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기(記)에서 말하기를, “나는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었으니 혈낭(血囊)으로 [나를]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다.낭자가 남암 향전에는 북암이라고 하였다.으로 돌아가서 다시 앞서와 같이 청하자, 부득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디로부터 이 밤에 왔소?”라고 하니, 낭자가 대답하기를, “담연(湛然)하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현사(賢士)께서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것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註 401401 범어로 정각(正覺)·도(道)를 얻기 위해 닦아야 할 길을 말하기도 한다. 부처의 정각을 특히 대보리라고 한다.닫기를 이루어 드리려 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게(偈)註 402402 범어 gatha의 음역이다. 일반적으로 운문체의 가요(歌謠)·시구(詩句) 등을 뜻한다.닫기한 수를 주었다.
해 저문 첩첩 한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없네
소나무와 대나무 그늘은 더욱 깊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 더욱 새로워라
자고 가기를 청함은 길 잃은 탓 아니고
높으신 스님을 인도하려 함인 것
원컨대 나의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냐고 묻지 마소서
부득스님이 게를 듣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부녀자가 더럽힐 곳이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수순(隨順)함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인데, 하물며 궁벽한 산골에 밤이 어두우니 어찌 홀대할 수야 있겠소?”라고 하고,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하였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염송에만 전념하였다. 밤이 이슥하여 낭자가 [부득을] 불러 말하기를, “제가 불행히도 마침 해산기가 있으니 화상께서는 짚자리를 좀 깔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은은히 밝히니 낭자는 벌써 해산하고 또 다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노힐의 마음에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불쌍한 생각이 더욱 더해서 또 통을 준비하여 [그] 속에 낭자를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켰다. 조금 있다가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서고 물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노힐이 깜짝 놀라자, 낭자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께서도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노힐이 마지못해 그 말대로 좇았더니, 홀연히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갗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그 옆을 보니 문득 하나의 연화대 (蓮臺)註 403403 부처나 보살이 앉는 자리로 연화좌(蓮華座)라고도 한다.닫기가 생겼다. 낭자는 그에게 앉기를 권가 통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大師)가 대보리(大菩提)를 성취하도록 도운 것입니다”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박박은 노힐이 오늘밤에 틀림없이 계를 더렵혔을 것이니, 그를 비웃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르러 보니 노힐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을 발하고 [그] 몸은 금빛으로 단장되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드리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하니, 노힐이 그 연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박박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업장(障)이 무거워서 다행히 대성을 만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대덕註 404404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1, 명문당, 1993).닫기은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으니, 원컨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 마시고 일을 모름지기 함께 했으면 합니다”고 하였다. 노힐이 말하기를, “통에 남은 물이 있으니 목욕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박박이 또 목욕했더니 역시 앞서처럼 무량수(無量壽)를 이루어 두 존상이 엄연이 상대하였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드물고 드문 일이다”고 하니, 두 성인이 [그들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설해주고 온 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755년)에 신라 경덕왕(景德王)註 405405 신라 제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닫기이 즉위註 406406 천보 14년 을미는 755년에 해당하는데 이 해는 신라 경덕왕 즉위 14년이니 본문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닫기하여 고기(古記)에는 천감(天監)註 407407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로서 천감 년간은 502년~519년이다.닫기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이 즉위註 408408 천감(天鑑)이라는 연호는 없다. 혹 천감(天監)을 잘못 쓴 것이라 하더라도 천감(天監)은 양(梁) 무제의 연호로 502년~519년에 사용하였으므로 천감 24년은 있을 수 없다. 또한 법흥왕 즉위년은 514년이므로 천감 13년에 해당한다.닫기했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그 앞뒤가 뒤바뀐 것이 심할 수 있을까?이 일을 듣고 정유년(丁酉歲)(757년)에 사자를 보내 대가람을 창건하고 백월산남사(白月山南寺)라고 하였다.
광덕(廣德)註 409409 당 대종의 연호로 763년~764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고기에는 대력(大曆)註 410410 당 대종의 연호로 766년~779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이라고 했는데, 또한 잘못이다.갑진(甲辰) 7월 15일(764년)에 절이 완성되었다. 다시 미륵존상을 조성하여 금당에 봉안하고 편액을 현신성도(現身成道) 미륵지전(彌勒之殿)이라고 하였다. 또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강당에 봉안했는데, 남은 물이 모자라 [몸에] 두루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편액은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고 하였다.
논의하여 말한다. 낭자는 부녀의 몸으로 감응하여 섭화(攝化)한 것이라고 하였다. ≪화엄경(華嚴經)≫註 411411 원래는 ‘부처의 화엄(華嚴)이라고 이름하는 대방광(大方廣)의 경’으로 한역하여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 경은 부처가 성도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일곱 곳에서 여덟 번 집회하고 설법한 내용이 장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설법의 장소는 점차 상승했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이는 설법의 내용과 부처의 교화의 뜻을 표징하고 있으며 특히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서 귀결하는 구성은 불교의 목적이 지상의 오늘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닫기에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선지식(善知識)註 412412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자를 이른다. 선우(善友)·친우(親友)·승우(勝友)·선친우(善親友)라고도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선재동자의 구도 과정에서 55인의 선지식을 만나는데, 어떠한 모습을 하였더라도 불도(佛道)에 인도하는 자는 선지식이다.닫기으로 11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음이 환해탈문(幻解脫門)註 413413 열반의 문호로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을 이른다. 해탈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닫기과 같다고 했으니, 이제 낭자가 순산한 그 미묘한 뜻도 여기에 있다. 그가 준 글을 보면 애절하고 완곡하여 사랑스러우며 완연히 천선(天仙)의 의취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수순함과 다라니(陁羅尼)註 414414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를 말하니, 능히 무량·무변한 이치를 섭화(攝收)하여 잃지 않는 염혜(念慧)의 힘을 일컫는다. 곧 일종의 기억술로서 하나의 일을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일까지 연상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며 선법(善法)을 능히 지니므로 능지(能持)라 하기도 하고 악법을 능히 막아주므로 능차(能遮)라 하기도 한다. 보살은 남을 교화하기 위해 다라니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얻으면 한량 없는 불법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대중 가운데 있어도 두려움이 없고 또한 자유자재로 정교한 설법을 할 수 있다. 후세에는 이 기억술로서의 다라니의 형식이 송주(誦呪)와 유사하게 되었으므로 주(呪)와 혼동하여 주를 모두 다라니라고 일컫게 되었다.닫기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끝 구절은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소서’라고 했어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유속(流俗)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註 399
당 중종(中宗)의 연호로 707년~710년에 사용하였다.
註 400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원을 말한다.
註 401
범어로 정각(正覺)·도(道)를 얻기 위해 닦아야 할 길을 말하기도 한다. 부처의 정각을 특히 대보리라고 한다.
註 402
범어 gatha의 음역이다. 일반적으로 운문체의 가요(歌謠)·시구(詩句) 등을 뜻한다.
註 403
부처나 보살이 앉는 자리로 연화좌(蓮華座)라고도 한다.
註 404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1, 명문당, 1993).
註 405
신라 제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註 406
천보 14년 을미는 755년에 해당하는데 이 해는 신라 경덕왕 즉위 14년이니 본문의 내용이 잘못되었다.
註 407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로서 천감 년간은 502년~519년이다.
註 408
천감(天鑑)이라는 연호는 없다. 혹 천감(天監)을 잘못 쓴 것이라 하더라도 천감(天監)은 양(梁) 무제의 연호로 502년~519년에 사용하였으므로 천감 24년은 있을 수 없다. 또한 법흥왕 즉위년은 514년이므로 천감 13년에 해당한다.
註 409
당 대종의 연호로 763년~764년에 사용하였다.
註 410
당 대종의 연호로 766년~779년에 사용하였다.
註 411
원래는 ‘부처의 화엄(華嚴)이라고 이름하는 대방광(大方廣)의 경’으로 한역하여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 경은 부처가 성도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일곱 곳에서 여덟 번 집회하고 설법한 내용이 장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설법의 장소는 점차 상승했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이는 설법의 내용과 부처의 교화의 뜻을 표징하고 있으며 특히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서 귀결하는 구성은 불교의 목적이 지상의 오늘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註 412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자를 이른다. 선우(善友)·친우(親友)·승우(勝友)·선친우(善親友)라고도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선재동자의 구도 과정에서 55인의 선지식을 만나는데, 어떠한 모습을 하였더라도 불도(佛道)에 인도하는 자는 선지식이다.
註 413
열반의 문호로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을 이른다. 해탈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註 414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를 말하니, 능히 무량·무변한 이치를 섭화(攝收)하여 잃지 않는 염혜(念慧)의 힘을 일컫는다. 곧 일종의 기억술로서 하나의 일을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일까지 연상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며 선법(善法)을 능히 지니므로 능지(能持)라 하기도 하고 악법을 능히 막아주므로 능차(能遮)라 하기도 한다. 보살은 남을 교화하기 위해 다라니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얻으면 한량 없는 불법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대중 가운데 있어도 두려움이 없고 또한 자유자재로 정교한 설법을 할 수 있다. 후세에는 이 기억술로서의 다라니의 형식이 송주(誦呪)와 유사하게 되었으므로 주(呪)와 혼동하여 주를 모두 다라니라고 일컫게 되었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색인어
이름 : 성덕왕,박박,부득,부득,부득,노힐,노힐,노힐,박박,노힐,노힐,노힐,박박,노힐,박박,경덕왕,마야부인
서명 : 화엄경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푸른 빛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느 길손 저문 날에 구름사립 두드릴까
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갈 것이지
나의 뜰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소서
이상은 북암을[기린 것이다.]
골짜기 어두우니 어디로 가리
남창 아래 저 자리에 머물다 가오
깊은 밤 백팔염주 가만가만 굴리노니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들까 두려워라
이상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십 리 소나무 그늘 오솔길 더듬어서
밤 절간 방문하여 스님을 시험하네
세 차례 목욕 끝나 날 새려 하는데
두 아이 낳아 놓고 서쪽으로 갔다네
이상은 성랑(聖娘)을 [기린 것이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