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물을 머금은 구름이 낮게 깔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기세다.
장마철이라 울산역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부전역에서 출발해 강릉 가는 기차가 10시28분에 들어온다. 동해 벗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남은 경표가 모두들 귀찮았지만, 함께 온 아들 성빈이 때문에 어떡하든 하루 한 대 있는 기차를 태워보내야 한다.
시간은 날씨만큼이나 지리했다.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도 여유가 있었다. 10시 15분, 개찰이 시작되기도 전에 경표를 대합실 안으로 들이밀고 작별을 고했다. 언제 다시 볼 지 모르지만, 울산모임의 연장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경표의 등에 대고 모두들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기대는 일순 무너져 내렸다. 재춘이와 오키가 가야 한단다. 모임은 파장 분위기였다. 키 큰 재춘이 옆에 오키가 하얀 치마를 나폴거리며 사라져 가자, 울산역 광장엔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득 찼다.
남아 있는 형선, 명도, 말임, 진규, 현철, 종철은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하였다. 명도가 좋은 곳을 알고 있단다. 가는 길에 명도 차를 주차시켜 놓으려 명도집에 들렀다. 명도 아내가 베란다로 내려다 보았다. 조수석에 있던 말임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이때까진 서로 좋았는데......
상태가 영 안좋아 보이던 현철은 옆길로 새고, 다섯 명이 산을 올랐다. 울산경찰청 뒤를 오르는데 형선이 길을 잘 몰랐다.
"이쪽으로. 아니, 이쪽으로!"
뒷자리에 있던 명도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일렀다.
"이쪽이 어딘데. 운전하는 놈이 이쪽 저쪽이 뭐냐."
차가 비싸서 다행이지, 싼 차였다면 성질 급한 형선이 아무대고 쳐박았을 것이다.
소나무 숲엔 운동 나온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붐볐다. 시간이 일러 잠시 삼림욕이나 하고 가잖다. 앉을 자리가 없었다. 두 개 있는 평상엔 아주머니들이 둘러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명도가 시부적시부적 가더니 아주머니 옆에 소리없이 앉는다. 허공을 쳐다보며 모르는 척 딴청을 피자, 아주머니들이 일어나 자리를 피해버렸다.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로 고쳐 앉는 명도의 모습엔 점령군의 의기가 넘쳐 흘렀다.
다섯 명이 평상을 차지하여 앉고 눕고는 시원한 솔내음을 맡았다. 그 와중에 말임은 전날 모임 회계로 머리를 앓고 있다. 혹시나 해서 현금을 아껴두려고, 형선이더러 카드로 계산하라고 한 30만 원을 건넨다. 순간 명도, 진규, 종철의 눈이 빛난다. 현금 30만 원이 있는 걸 확인했는데, 그냥 넘어갈 친구들이 아니지. 결국 그 돈을 다 쓸 때까지 개기기로 하였다.
점심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인가 해물탕 집엔 손님이 없었다. 불도 꺼져 있었다. 전날 에어컨을 너무 틀어 휴즈가 나갔단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전기가 안들어오면 돈을 안 주겠다는 둥, 깎아 달라는 둥 형선이 아주머니에게 계속 농을 건넨다. 그런데 그것은 농이 아니라 형선의 본질이었다. 여자만 보면 허덕대는 형선의 본질. 창가에 앉은 형선은 밥이 들어와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건너편 골프연습장에서 샷하는 아주머니만 쳐다본다.
"아지매 들어왔다. 굿 샷! 애이, 또 나갔다......"
결국 아주머니는 형선의 시선을 피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물탕은 다 먹고 해물찜에 콩나물이 조금 남았다. 붕어낚시 간 현철이 갖다주면 되겠다고 말임이 싸달라고 부탁한다. 콩나물찜보다 더 맛있는 붕어찜을 현철이는 먹고 있을 지 모르는데.
집에 가야 한다는 진규를 납치하여 현철이 있다는 낚시터로 향했다. 산을 넘어 외곽을 달리는 차창 밖 공기가 시원했다. 낮은 산 아래로 산보다 더 낮은 구름들이 깔려 있다. 마치 개마고원을 달리 듯 구름과 어깨를 나란히 해 달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산 위에 귀곡산장이 있단다. 한복 입은 어여쁜 아지매가 운영하는 산장. 한번 들어가면 그냥은 못 나온다는 산장이.
"30만 원 다 쓰려면 저녁은 거기 가서 먹으면 되겠네."
진규가 호기심을 보인다. 딴에 남색을 드러낸다.
그때 운전석에서 오발탄이 터졌다.
"이대로 강원도 가까?!"
"좋지, 가!"
느닷없는 형선의 제안에 말임이 맞장구친다.
"좋아, 말 나온 김에 가. 우린 자주 그래. 전에도 마산에서 술 먹다 눈 내리는 양수리가 보고 싶다고 운전해 가다가 눈길에 쳐박히기도 했어."
종철이까지 합세하자 명도와 진규는 안절부절이다.
"야, 가서 현철이 데리고 가야지."
현철에게 가면 흐지부지될 거라는 판단으로 명도가 결정을 뒤로 미룬다.
"그래, 거기 가서 생각해 봐."
진규까지 거든다.
결국 현철이를 찾아서 현철이 차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낚시터엔 현철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형선이 차로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현철이를 만나면 어찌 결정이 번복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하던 명도와 진규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다.
차는 낚시터를 내려왔다. 대세는 기울어갔지만 아직 차의 향방에 변수는 있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가기 싫은 사람은 지금 뛰어내려."
고민하던 명도와 진규는 형선의 말에 차창 밖을 쳐다보더니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떨궜다. 옆은 도랑이었다.
명도가 먼저 전화한다.
"친구 아버님 상 당해서 지금 강원도 올라가고 있어."
"문상 가는 사람이 옷도 안 갈아입고 그 차림으로 가요?"
베란다에서 말임이와 손을 흔들며 정겹게 인사하던 명도의 아내에게서 조금 뒤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당신과 친구들 기본이 꽝이예요.'
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명도가 바빠졌다. 무슨 일이 생기면 명도 아내는 창수에게 확인해 본다는 걸 아는 명도가, 창수에게 문자를 보낸다.
'동창 부친 상 강원도 가는 중'
곧바로 창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황한 명도가 전화기를 종철에게 건넨다.
"강원도 간다고?"
"어! 우리 동기 중에 전민주라고 아냐? 전민주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올라가는 중이야. 근데 너 지금 어딘데?"
"부산이야. 근데 전민주가 누구지?"
"응, 동기 중에 그런 애 있어."
"언제 돌아가셨냐? 오늘 돌아가셨냐?"
"응, 오늘 돌아가셨어. 언제 출발할 수 있는데?"
"저녁 때 돼야 돼."
"그럼 천천히 올라와. 우리 먼저 가서 일단 천곡 쪽에 가 있으께"
모두들 우습다고 키득대건만 종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능청을 떤다.
일단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맞춰 놓은 명도가, 조금 안심이 되는 듯 등을 시트에 깊숙히 기댄다.
이번엔 강원도 벗들에게 버림 받아, 기차 타고 올라가는 경표에게 전화했다. '아마도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묵호역에서 기다릴 것 같다고. 너는 결국 영남 친구들에게도 버림 받았다고.'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결국 영구에게 전화해 경표를 잡아두라 일렀다.
점심 먹고 남은 돈 28만 원을 쓰기 위해 차는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간다. 멀리 짙푸른 수평선이 비늘을 세운 듯 파르르 떨고 있다. 바다 바람이 시원하다.
역전의 용사 다섯 명을 태운 차는 지치지도 않는 지 금새 강원도로 들어섰다. 말임이 상아에게 전화를 건다.
(상아 글에서 계속됩니다)
첫댓글 너무 재미있다 드라마 같다 어제 글을 쓰다가 파출소에 조서 쓰러 가느라 끊어 졌었다 ㅋㅋ 마져 써야쥐 ㅋㅋ
얘기 넘 재밌고 멋지게 썼다..끝까지 함께하지 못한게 아쉽다...
먼말인고 했더니만 2박3일간의 드라마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연출은 형선.주연은 말임 현철 종철 스탭은 진규명도가 했나보네..ㅋㅋㅋ 못말릴 배짱들일쎄..대단들 혀~~~~
종철아........모두 잊고 열심히 근무하는데,새삼스럽게 들춰내면 나는 어떻하라구.........."전민주--wjsalswn"나가 이좁은 지구바닥에 존재하는한 영여영 잊지는 못할꺼야.....꺼이 꺼이........
울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잊어서는 안되지. 일상에 빠져 바쁘다가도 어느날 민주가 생각나거든 연락해. 언제든 함께 가주마, 명도야...
철아 나는할말이없데이 버림받은게 아니라 버림받을려고했다 왜 아들한데나만에추억만아니고그놈한테도추억은있어야하지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