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덕
진 연 숙
비밀은 남에게 알리지 않고 숨기는 일이나 알려지지 않은 실상이나 속내라고 한다. 얼마 전 나는 ‘비밀의 언덕’이란 영화를 봤다. 1990년대 초등학교 5학년인 명은이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여자 아이이다. 부모와 담임선생님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으나 받지 못해 목말라하는 소녀이야기이다.
그 시대에 신학기에는 가정환경 조사로 부모님 학력과 직업 등을 적어내야 했다. 명은이는 젓갈 가게를 하는 부모의 직업이 창피해서 회사원과 주부라고 거짓으로 제출한다. 부모님 참관과 교실 꾸미기 도우미를 반 엄마들이 해주는데 번번이 불참하는 엄마를 돌아가신 할머니 병수발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야무지게 반장 선거를 하여 당당히 반장이 된 딸에게 “왜 그런 걸 하냐고?” 엄마는 핀잔한다. 부모에게 인정도 칭찬도 받지 못하는 슬픈 마음을 비밀 일기장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명은이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글짓기 대회에 글 두 편을 제출한다. 한편은 생일 축하를 받는 사랑 받는 행복한 추억의 글과 하늘에 계신 할머니에게 억척스럽게 돈만 좇아 밤낮 일만 하는 엄마와 무기력하고 게으른 가장인 아빠를 원망하는 이야기 글이다. 그 중 가족에 관한 글이 최우수 작품상에 당선이 되었다. “상은 받고 싶은데 작품이 공개되는 건 싫어요. 사실을 썼지만 가족들이 알게 되면 맘이 불편할 것 같아요.” 그 일로 가족을 싫어하고 원망하지만 또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고 그 위의 계단을 한 발 두 발 오른다. 언덕 나무 밑에 흙을 파고 원고지를 묻는다. 자신의 12살이 같이 묻혔다. 가족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을 알아가는 명은이의 성장 영화이다.
영화를 다 보고 가만히 앉아 나는 되새김해 보았다. 그 시절의 명은이로 공감되고 이입되지 못했다. 아니 그 시절 나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왜 초등학교 5학년의 내 가족과 형제와의 일상들이 기억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몇 해 전인가도 초등 친구들과 옛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기억이 없어 말문이 막혀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부모와 나의 관계는 어땠는지를 되돌아보려 했다. 그 시절의 관계들이 사라졌다. 다만 듬성듬성 실타래를 엮듯이 학교 다녀온 뒤 가방을 마루에 던지고 친구들 집으로 몰려다니며 놀던 기억이 난다. 평범한 가족 일상의 소소함도 명절에 친척들과 놀던 일들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 관계에 사랑, 형제간의 우애, 질투, 동생들을 돌보는 언니로서 해야 할 역할들이 있었겠지. 내 의식 속에 내 마음속에 그 모두를 비밀의 언덕에 묻어 둔 것일까? 왜일까?
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부모님이 어쩔 수 없이 큰집과 외가에 번갈아 맡겼다 한다. 여러 어른과 사촌들 손에서 컸지만, 누구하나 정성스럽게 돌보지는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가족들에게서 짝짜꿍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웠을 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는 응원을 못 받았을 수도 있다. 홀로 어린 시절 빈집에 남겨졌던 때는 많이 외롭고 쓸쓸했을 것이다. 부모와의 소통의 부재로 혼자 시간을 많이 보내서였는지 어느 때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혼자가 편할 때가 있다.
그런 어린 시절이 있어서인지 살갑게 부모를 공경하는 말들을 하기가 어렵고 특히 엄한 아버지를 대하는 데는 아주 불편했었다. 몇 해 전까지도 어린 명은이가 내 마음속에서 자라지 못하고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외로움, 원망, 미움, 부모의 사랑을 받은 동생들에 대한 질투 등과 함께.
벽에 붙여 놓은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몇 해 전 내 생일에 엄마와 여동생, 남동생 네가 모여 축하해주고 있다. 케이크 초에 불을 끄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박수 치고 웃어준다. 스스로 애정결핍과 정서 부족이라 말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부모와 형제들이 있어 잘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이 떨어져 있었지만 늘 그리워하고 사랑했고 함께 살게 되었을 때는 보듬어주며 토닥여 주었을 것이다.
명은이처럼 어느 순간에는 엄마의 살짝 미소 지으며 응원해 주는 말 없는 사랑도 느꼈을 것이다. 속 깊은 사랑으로 한 번도 혼난 기억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았을 뿐이라 믿고 싶다. 이제는 조금씩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마음을 표현하고 전하며 트라우마처럼 단절되었던 내 가족 연대를 이어가려 노력한다. 좋은 일이었든 힘든 일이었든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사랑받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내고 싶다.
나는 지금 비밀의 언덕에 묻혔던 그 기억을 꺼내어 다시 들여다보고 싶다. 아니, 이젠 과거의 모든 일들은 굳이 기억해 내지 않아도 된다. 밝히고 싶지 않아 묻어 두었던 나의 슬프고 안쓰러웠던 옛 이야기들은 이젠 비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