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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판 스크랩 81회 무등산풍경소리 `나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2010년 5월 21일
돌다리 추천 0 조회 15 10.05.17 13: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1회 무등산풍경소리

 

부처님오신날

5·18 민중항쟁 30주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음악회

 

'나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저녁 7시

무등산 증심사 대웅전 앞마당

 

 

노래손님/

포크가수_박강수

일본민중가수_하라다 요시오(原田 義雄)

섬진강 도깨비마을_노래깨비아이들

증심사 합창단

 

이야기손님/

양금덕_근로정신대할머니

김희용 목사_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지장 스님_증심사 주지

 

사회/

돌다리 최명진 목사_미래에서온교회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전라도닷컴> "사람취급 안 하는 놈들 더 이상 낯짝 못들게"

 

 

어쩌면 할머니에게 지난 60여 년은 ‘잃어버린 세월’이다.
양금덕 할머니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다. 여느 집안과 마찬가지로 궁핍한 생활이었다.

나주초등학교(당시 나주대정공립심상소학교) 6학년 때인 1944년 5월 어느 날, 마사키 도시오(正木俊夫) 교장이 곤도(近藤)라는 이름의 헌병을 대동하고 교실에 들어와 “일본에 가면 집 한 채씩은 살 수 있는 돈도 벌고 여학교에도 보내준다”고 말했다.

 

“여기서 저기서 다들 손들었지. 그러자 다 놔두고, 우선 ‘급장’인 나부터 지목하더 라고. 급장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양 할머니처럼 6학년에 재학중인 친구 10명을 포함해 나주에서만 일본으로 떠난 어린 소녀들은 24명. 일본 시모노세키항으로 떠나는 연락선을 타기 위해 여수항에 도착한 또래 아이들은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 전남 지역 5개 도시에서 모인 138명이었다. 불과 13살~15살의 아직 철모르는 어린 소녀들이었다.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는 미쓰비시중공업이 운영하는 군수공장 중의 하나였다. 미쓰비시중공업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최대의 군수업체로, 전쟁의 특수를 톡톡히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에 건너간 이후로 양금덕 할머니는 하루 10시간에 가까운 중노동에 시달렸다. 물론 연필 한번 쥐어보지 못했다. 그보다 더한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약속한 돈 역시 1원 한푼 만져보지 못했다.


“월급이 얼마라고 가르쳐 주지도 않아. 모아 놨다가 나중에 고향에 가면 부쳐준다고. 우리가 뭐 알았간디. 그럴 줄만 알았제.”
해방 후 귀국해 돌아왔지만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안부’라는 차가운 시선이었다.
“선만 보면 다 좋다고는 해.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일본 갔다 왔다’는 말만 하믄 날까지 받아 놓다가도 다 자빠져 불어.”
결국 나주 인근에서는 혼사가 어려웠다. 혼령기가 다 돼서야 겨우 화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건축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영리하고 사람도 그만하면 잘 났어. 시가집 사람들도 징허게 좋아. 시아부지도 나밖에 모르고….”

 


아들 둘을 낳고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단란한 생활을 꾸려가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남편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다짜 고짜 일본 갔다 왔냐고 묻더라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여. 왜 더러운 짓거리 하다 와 놓고 속이고 결혼했냐고 따져.”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고통 받고 돌아온 힘없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다시 손가락질을 해 대던 때였다.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라는 구분도 통하지 않았다. 남편은 그때부터 자꾸 밖으로만 나돌았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을까.


“몇 년 만에야 남편이 들어왔는데, 무슨 머슴아 셋을 데리고 들어오더라고. ‘누구냐’고 했더니, 친구네 애들인데 어렵게 돼서 며칠 데리고 있기로 했다는 거여.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안 가. 그러더니 그 중 제일 막내가 어느 날 남편 보고 ‘아빠 아빠’ 하는 거야. ‘무슨 일이냐’ 했지. 그랬더니 댑대(도리어) 성질부터 내는 거여. ‘너는 일본에서 더러운 짓 하고 왔으면서, 내가 바람 좀 핀 것이 뭔 죄냐’고….”

병까지 얻어 돌아왔던 남 편은 급기야 1년도 안 돼 죽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남편은 밖에서 데리고 온 애들을 이미 호적에까지 올려놓은 상태였다. 도중에 낳은 딸 하나까지, 졸지에 6명의 아이들이 양금덕 할머니에게 남겨지고 말았다. 그 때 그녀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애들이 많다고 방도 누가 안 줘. 안 해 본 일 없었제. 광주 역전에서 리어카 놓고 껌도 팔아 보고, 대인시장에서 조구도 팔아보고. 어느 누구 집 제사 있다고 하면 가서 사자밥이라도 있으면 얻어다 먹였어. 그것도 아까워서 한 입에 다 못 주고….”
세월이 어떻게 간 줄 모르고 살아왔다. 뒤늦게 용기를 낸 것은 지난 1999년이었다.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 대한해협을 넘으며 재판을 쫓아다니기를 무려 10여 년.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 근로정신대로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도 1원 한푼 만져보지 못했다.

1999년,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 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양금덕 할머니가

대한해협을 넘어 재판을 쫓아다니기를 무려 10여 년.

일본 정부는 “나중에 고향에 가면 부쳐준다” 던 임금을 해방 64년이 지나

‘99엔’ (한국돈 1300원)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광주시 서구 양1동 321-8번지. 할머니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달동네 7평짜리 무허가 단칸 방 하나가 전부다. 구걸하다시피 살며 여섯 자식을 길렀지만, 자식들은 어디 사는지 소식조차 듣기 어렵다.
사람 목숨이란게 이다지도 모질까. 육신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눈물마저 말랐다. 그러다가 또 열불 나는 소식을 들었다. 미쓰비시자동차가 한국시장에 진출한 건 2008년 10월경, 그런가보다 하고만 생각해 왔는데 급기야 광주에서까지 전시장을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속에서 열불이 나 죽겄어. 사람을 놀려도 이렇게 놀릴 수가 있는가. 64년 동안 내 임금도 돌려주지 않는 놈들이 자기들 차는 팔겄다고 그 짓거리를 하니….”

 

그런데 아주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뜻밖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오는 것이었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꾸려진 건 지난 2009년 3월. 도쿄 최고재판소 기각 소식에 안타까워하던 시민들이 뒤늦게나마 마음을 보태기로 나선 것이다. 1인시위가 시작된 것은 미쓰비시자동차가 광주에 전시장을 연 직후인 지난해 10월5일부터였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 모임이 있 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일본에 줄기차게 재판을 쫓아다닌 건 꼭 보상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죽기 전에 사죄라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물론 그 어느 누구하나 거들떠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들한 테는 며칠 강원도 단풍구경 갔다 온다고 말해. 동네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한 줄 안가? 서울에 있는 딸한테 다녀올 텐께 며칠 안 보일 것이여 해. 우리는 창피한 줄로만 알았고. 그런 마당에 세상에 나 같은 것이 뭣이라고….”
누가 나오라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직장인, 취업준비생, 대학교수, 학교 선생님, 목사, 신부, 수녀, 변호사, 시민단체 회원, 주부, 심지어 어린 중고등학생들까지…. 말이 1인시위지 이건 흡사 무슨 축제나 작은 집회 같다.

김선호 교장(광주 효광중)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10월말, 아직 한 낮 햇볕은 따가울 때였 다. 교장 선생님은 12시만 되면 영락없이 시원한 냉차를 준비해 왔다.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이었다. 날이 차가워지자 이제는 따뜻한 커피였다. 할머니는 이런게 도대체 뭔일인지 알 길이 없다.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최대의 군수 업체로, 전쟁의 특수를 누리며 대한민국 소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미쓰비시자동차가 광주에서 전시장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양금덕 할머니는 1인시위에 나섰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에 접어들면서 어느새 할머 니 자신이 1인시위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요새는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지도 모르겄어. 애들 소풍날짜 받아 놓은 것마냥 내가 꼭 그 짝 났당께. 날 새면 오늘은 누가 나올란고 설레. 내가 언사가 없어서 고맙다니 하는 말도 잘 못하제. 내가 반(半) 원은 폴쎄 풀었어.”
한 해가 저 무는 연말, 할머니는 뉴스의 초점에 있었다.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이 후생연금 탈퇴수당금으로 단돈 99엔을 지급키로 한 것이다. 한국 돈으로는 아이들 과자 한 봉지 값인 1300원이었다.


“그 돈 없어도 인자 살아. 내가 오히려 1300원 일본 보태줄란다고 했어. 어디 한번 잘 먹고 잘 살아보라고. 나한테는 우리 시민들이 더 커. 내 손 한번 잡아준 것 생각하면 너무나 고마워. 돈이 얼마가 된다고 해도 이젠 안 바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새해엔 더 웃기로 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자 더 악착같이 싸울라고. 내가 반신불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갈 거여. 아믄, 내가 짝대기를 짚고라도 기어이 1인시위에 나가 야제. 지금도 사람취급 안 하는 놈들 더 이상 낯짝 못들게 하고 말것이여.”


글=이국언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사무국장>

 

 

 

#일본민중가수 히라다 요시오(原田 義雄)

 

1952년5월18일 오사카시(大阪市) 히라노구(平野區) 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천성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나 소학교 1학년부터 오사카부립(大阪府立) 시각 장애자 학교에 입학해, 1973년 동 학교 음악과 피아노 조율 코스를 졸업한 뒤에 악기점에 근무하였습니다.

노래와의 만남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참가한 베트남 전쟁반대의 집회에서 받은 「간사이(關西) 합창단 노래 교실생 모집」 전단을 받고 합창단에 지원하면서이며, 그 후 연구생을 거쳐 92년7월까지 동(同)합창단에서 활동하였습니다.

1992년 가을에 오카야마현(岡山縣) 히루젠(蒜山) 고원에 이주해 농업과 마사지를 하면서 음악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1979년 소편성의 연주 그룹 「프리덤」을 결성하여 현재도 활동중입니다.

음반으로는 「귀여운 아이여」, 「목숨 빛내」, 「사랑」, 「노래를 계속 부른다는 것」이 있습니다.

 

81회 무등산풍경소리에서 부를 노래는 <바람의 노래>, <자랑을 가슴에>, <Fight! 용기를 내라>, 그리고 <아침이슬>입니다.

'바람의 노래'는 아르헨티나의 가수 '유판키'의 수필을 기초로 안데스를 방랑하는 음유시인을 노래하는 곡이고, '자랑을 가슴에'는 나고야(名古屋) 미츠비시(三菱) 조선 근로정신대 어머니들이 처음으로 재판소를 향해 갈 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들에게 바친 노래입니다.

 

 

 

#포크싱어 박강수

 

 

<한겨레신문 2009-04-14>

양희은 잇는 '포크얼굴' 꿈꾸다

4집 '노래가 된 이야기'낸 박강수

 


최근 4집 <노래가 된 이야기>를 발표한 포크 가수 박강수(35)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가수’란 말을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전남 담양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팝송 하나 제대로 들은 게 없었다. 문화적 혜택을 볼 수 없는 지역이었고, “집에서는 어머니가 기독교 방송 라디오만을 듣고 계셨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낮에는 사무실에서, 밤에는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호프집에서 디제이들이 트는 음악들을 들으며 매력을 처음 느꼈다.

“숨겨진 잠재의식이었다고 할까요. 그곳에서 듣던 음악들이 너무 좋아지기 시작한 거예요. 아바의 ‘치키티타’(Chiquitita)를 듣는 순간에는 세상이 다 핑크빛으로 변할 정도로 ‘음악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모르고 있던 음악들을 하나둘 찾아 듣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가수의 길까지 걷게 되었다.

 

우연히 통기타 가수들과 함께 노래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목소리가 굉장히 독특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주위의 권유로 그때부터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5년여를 라이브 카페 등지에서 노래하다가 자신이 부를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노래하는 게 단순히 돈벌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면서 창작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다. 그래서 숭실대 실용음악과에 뒤늦게 들어가 이론 공부도 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면서부터 앨범 제의는 정말 많이 들어왔어요. 중간에 엎어진 적도 많고 녹음은 다 끝냈는데도 정작 앨범은 나오지 않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나를 돌아보게 됐죠. 나에게 접근했던 사람들은 돈을 벌 목적으로 앨범을 내려 했던 거지만 전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내가 만든 걸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컸고, 그런 심정으로 제 돈을 들여서 1집을 제작하게 된 거죠.”


1집 제작 뒤 꾸준히 앨범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딱히 홍보를 해줄 만한 매니저도 없었고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라이브 공연뿐이었다. 수년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라이브 활동을 펼친 결과 그의 팬카페 회원 수는 4천명을 넘어섰다. 그는 “아이돌 그룹의 10만 팬클럽 숫자가 부럽지 않은 든든한 후원자들”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이번에 낸 4집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앨범이다. 모든 노래를 직접 만들었을 뿐 아니라 편곡과 프로듀싱까지 직접 해냈다. 포크 가수로 분류되긴 했지만, 그동안 팝 스타일에 가까운 음악들도 많이 만들었던 그에게 이번 앨범은 ‘포크 가수’ 박강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줄 그런 앨범이다.

 

타이틀곡 ‘다시 힘을 내어라’는 덕유산을 종주하며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 문득 떠오른 멜로디로 만든 위로의 노래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여행을 가서 느꼈던 점을 노래로 담았다. 그전까진 성공에 대한 조급증이 있었지만 마다가스카르에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엔 인생관 자체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여행 다녀올 때마다 깨닫는 게 있다”며 “억지로라도 여행을 다녀야 할 것 같다”고 웃었다. 옛 포크 음악을 좋아하지만 ‘어니언스’나 양희은 말고, 조금 더 새로운 얼굴은 없는지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알리고 싶다는 박강수의 바람은 지금도 라이브 공연장에서 조용하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글 김학선 객원기자, 사진 김봉규 기자

 

 

 

#섬진강 도깨비마을 / 노래깨비 아이들

 

(사)섬진강, 도깨비마을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모습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도깨비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이 모인 단체입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음반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3회 물 사랑 동요제 초대공연 / 5월 전국음악제 / 아시아 문학인과 함께하는 5월 문학제 / 교육인적자원부 평생학습대상 시상식 여는 공연 / 창원 평생학습경연대회 / 울산 시노래 공연/ 기타 길거리 공연 및 각종 축제 공연에 참여해 왔습니다.

 

 

 

 

무등산풍경소리

http://cafe.naver.com/pgsori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http://cafe.daum.net/1945-815

 

박강수

http://www.parkkangsoo.co.kr

 

섬진강 도깨비마을

http://www.dokaeb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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