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의 행정구역상으로 개성 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
분단체제의 통일운동
|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정치군인들은 수천 명의 혁신계 인사들과 학생들을 검거함으로써 통일과 민주화의 불씨를 신속하게 잠재웠고 그 뒤 오랜 암흑이 이어졌다. 남북 관계도 그랬다. 1972년, 분단 이후 최초의 당국 간 밀사외교의 성과로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됐으나 유신체제 성립에 이용됐을 뿐이다. 80년대에도 정부 차원의 간헐적인 남북 교류가 진행되었으나 양쪽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단되곤 했다.
88년, 3월에는 서울대생 김중기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와 27년 만에 6?10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고 5월에는 같은 대학 조성만 열사가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다.’라는 유서를 뿌리고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해 반미자주화운동을 각성시켰다.
|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반드시 통일운동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노태우 정권도 당시 분위기에 부담을 느끼고 89년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때 대학생들 2백 명 정도를 평양 축전에 보내겠다면서 청와대 차원에서 남북학생교류추진위원회 같은 걸 만듭니다.
재미있었던 건 나도 평양에 갈 수 있느냐는 일반 학우들의 문의와 신청이 학생회실로 굉장히 많이 들어왔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통일운동은 용공으로 매도됐었는데 이번에는 정부가 허가해 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던거죠.” |
‘통일의 꽃’으로 알려지기 전의 임수경은 한국외국어대 용인 캠퍼스에 다니면서 용인겮볐꼰熾?축전준비위 정책실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그 해 3월의 문익환 목사와 황석영 작가의 방북은 남한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김일성 주석과 2차례에 걸친 단독 회담으로 통일 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온 문 목사는 곧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 이후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었고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자당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를 불허한다고 6월 초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축전준비위에서는 정부가 허가해주지 않더라도 참가할 각오였어요. 평양 축전에 대표를 파견해야만 분단된 한반도 현실을 세계에 알릴 수 있고 한국의 대학생들이 분단 장벽을 부수는 일에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야 통일할 때에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목적의식이 있었던 거죠.” 전문환 씨의 말이다.
전대협, 축전 참가 대표 발탁
축전준비위는 이 시기를 즈음해 비합법적으로 평양에 파견할 대표를 물색했고 당시 정책실장이던 박종열은 임수경을 추천했다. 서강대의 실무회의에서 임씨를 처음 봤을 때 말을 재치 있게 하고 밝은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다는 박종열(38) 씨는 종로의 한 제과점에서 그녀와 따로 만나 방북을 제의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대협에서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대표를 두 명 정도 선발해서 비밀리에 평양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게 본인이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어요. (임수경 씨가) 30초 정도 고민을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 책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수락했어요.”
전대협 측에서는 북한에 갔다 오면 형량이 무기징역 정도 되리라 예상했기에 쉽지 않은 제의였고 발탁된 사람 역시 정말 무덤덤할 수는 없었다. 제의를 수락하고도 임수경은 막막함과 부담감, 가족들의 사랑과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미래를 버리는 선택에 대해 밤을 새가며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이 축전준비위에서 활동한 탓에 전대협의 입장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
또랑또랑하면서 당차게 울려 퍼지는 앳된 여학생의 목소리에 북녘의 동포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임수경을 태운 벤츠 승용차가 평양 시내에 들어서자 수많은 시민들이 차도까지 뛰어나와 차창으로 얼굴을 보려고 아우성쳤고 심지어 승용차 위에까지 올라가 차체가 우그러질 정도였다. 당시 임씨를 안내하기 위해 동승한 조선학생위원회 소속 학생들도 자기들끼리 “인민들이 저렇게 열광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북녘 주민들의 절절한 통일 염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순간의 감격을 임수경은 훗날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우리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분단의 설움으로 아파하고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루며 서로를 미워해 왔던가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 땅, 내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 눈앞에 펼쳐져 있는 하늘과 산과 바람과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들의 것 그대로였다.’
‘반제, 평화, 친선’을 주제로 한 평양 청년학생축전은 7월 1일부터 8일까지 계속됐다. 전 세계 180개 나라에서 온 1만 7천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참가한 이 행사로 평양은 축제 분위기였다. 개막식장에서의 절정은 단연 전대협 깃발을 흔들며 임수경이 입장하는 순간이었다.
15만 관중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남측 학생 대표를 환영했고 전광판에는 또렷이 ‘전대협’이라는 글자가 불빛으로 새겨졌다.
북녘에 울려 퍼진 통일 노래
축전의 다양한 행사에 참가한 임수경의 발언과 행보는 북한 주민들과 전 세계 취재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곳곳에서 자유분방한 화법으로 ‘하나 된 조국’과 ‘평화’를 외쳤고 전대협의 대표로서 북한 측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주적으로 행동해 더욱 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다. 북한의 조선중앙 TV가 붙인 ‘통일의 꽃’이란 애칭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과 북에서 자연인 임수경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축전이 끝날 무렵인 7월 7일에 임수경은 북측 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이 타의에 의해 겪어온 45년의 분열은 민족 비극의 45년이었다.’로 시작하는 <남북청년학생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 선언문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을 이룩할 것, 평화협정과 불가침선언의 체결, 두 개의 한국 정책 반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이는 분단 이후 남북학생대표 단체에서 나온 최초의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였다.
|
|
통일의 꽃이 건너온 분단의 벽
임수경은 정전 기념일인 7월 27일에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시도했으나 유엔군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 후 행진대열은 시위에 들어갔다. 한편 남쪽에서도 임씨의 방북에 대해 처음에는 경악했던 여론이 차츰 우려와 옹호의 분위기로 바뀌었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그녀의 안전한 귀환을 돕고자 문규현 신부를 파견하였다.
1차 판문점 귀환 실패 이후 임씨는 곧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북한 학생과 외국 청년 1백여 명도 이 단식에 동참했다. 유엔군은 판문점의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이유로 통과불허 방침을 고수했고 북한 측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외국을 경유한 귀국을 권유했다.
하지만 임수경은 단호했다. 분단체제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상징인 판문점을 가로질러 넘어옴으로써 한반도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분단의 장벽을 극복하려는 젊은이의 용기를 보이고자 했다.
마침내 광복절인 89년 8월 15일 오후 2시 20분,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시멘트 블록인 군사분계선을 훌쩍 넘어 남쪽으로 왔다. 그들은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됐고,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이른바 ‘38선’이 실제로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3년 5개월의 징역과 자격정지 5년 형을 살았고 관련자 60여 명이 구속되거나 오랜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글: 최영환,사진: 황석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