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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금님: 비상비비상처가 범아일여, 최상위의 무기공, 우룡스님의 공삼매체험은, 최초의 무기공이라 했지요. 샨냐가 멸하는 단계, 적멸이라하는 건 부처님이요. 법공이라 칭하는 게 진심의 본성을 증득하는 거요. 반연이 끊어진 거구요. 님이 샨냐가 멸한다는 건 무념이라 하는 거구요. 무념이라는 건 생각이 멸한것이 아니구요. 생각을 낼때 초기에는 미세염이 없기에 무념이라 하는 거구요 이구절이 대승기신론에 있어요. 이게 무념을 염한다 하는 것이요. 적멸은 불의 경지요. 제대로 알고 하시구려. 님의 글에서 나타나는 마음은 반연된 거요. 생멸심이야요. 생멸심.. 적멸의 선정에 들어간 건 불입니다.
부처... 선가의 점검법에 열세째 단계로 점검해요. 선문촬요법어에 나오는데, 진심의 본성을 보는 단계가 아홉째요. 생사일여의 단계입니다. 겨우 아홉번째요. 아시겠소. 열번째가 입태일여, 열한번째가 주태일여이고 열세째 영겁일여입니다. 이 열세째가 성불의 단계요.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를 얻어서 성불한다고 합니다. 님의 글은 본성을 드려내지도 않는데 열세째 단계인 적멸의 단계를 이야기 합니까? 내참....
방문객님: 아래 적은 것은 형이 봤을 것이기에 지웠습니다. 경계에 있어서 "텅비고 환한 상태"라는 표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텅비고 환한 상태라고 표현할만한 상태는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우룡스님의 공삼매에선 행자에게 가장 강렬한 것이 텅비고 환한 상태가 아닙니다. '기억'입니다. 모르는 건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모르는데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어떤 체험을 하고 그 체험에 대해 행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중점이 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강렬했던가... 무엇이 그 상태를 특징 지우고 있는가... 형이 더 많은 경계를 알게 되길 바랍니다.
비단금님: 공삼매(空三昧), 포마(怖魔), 희마(喜魔), 비마(悲魔), 식광(識光). 한자를 적어놓은 뜻은 님이 잘 알겁니다. 님은 없음(님이 말하는 없음이요)을 체험할 즈음에 포마를 경험했다 했지요. 우룡스님이 이런체험은 분명히 마장이라 어른들께 물어보라한거지. 경전에는 능엄경의 50마장에서 기술되어 있소. 내가 그렇지않소 한번 읽어 보라 권하지 않소. 허하고 환한 상태를 空이라 한소식했다고 난리치는 경우가 무기공에 착했다고 하는 거구요. 마음이 없다고 빠지는 걸 단멸공에 착했다하는 경우고요. 님이 말하는 정도의 요가체험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도가서적에도 기술되어 있소이다. 님의 사랑방에서 탈출해 보시구려, 님이 말하는 건, 올바르게 길을 걸어온 이들은 다 아는 일입니다. 유마에서 말하지 않았소. 나의 견처는 자신을 바르게 보고 인간다운 삶을 사는 거라고... 내가 지난번 댓글에서 물어보았죠.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 불법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하고....
나홍선사의 십절목이란 것이 있소. 자기 점검법이요.앞단계는 생략하고 7. 갑자기 백이십근이나 되는 짐을 내려 놓는 것과 같아 단박 꺽이고 단박 끊는다. 그때는 어떤 것이 그대의 자성인가? 8. 이미 자성을 깨쳤으면 자성의 작용은 인연을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떤 것이 작용에 따름인가. 9. 이미 자성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초월해야 하는데,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10.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면 그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사대는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선자들은 스승이 없으면 이런 옛날 어른들이 하신 말씀을 자신을 점검하는데 사용하고 있소. 이런 점검법은 님의 생각과 같은가요. 다른가요. 한번 점검해 보시구려...
견성했다는 건, 자신의 본성을 아는 거요. 그게 끝이 아니오. 그래서 오후 수행이요. 서산대사께서도 선가귀감에 공부의 시작은 돈오요. 자신의 본성을 보는 거구요. 공부의 끝은 점수라 했소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요. 본성을 보아 마음을 얻는 걸 구경지라 했지. 그래도 능지(일체를 아는)하는 불은 아니다 했소이다
옛 어른들이 한목소리를 나타내는 데, 님은 무상정등각을 비상비비상처에서 얻는다고 하셨죠.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에서도 야뇩다라샴약삼보리심을 증득하는 걸 불이라 나와있죠. 이런 것들도 지난번 유마에서 벌써 논쟁이 있었지 않았소?
자. 나의 견해도 충분히 나왔고, 님의 견해도 이미 잘 알고 있소... 이 정도에서 논쟁을 마칩시다. 십자기는 각자의 몫이 다 다르오. 그래서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하는 거요. 그게 인생살이로 나는 봅니다.
방문객님: 참... 형님도... 전 이제 요가는 안한다니깐요. 요가가 알려주는 경계는 다 알거든요. 그게 벌써 십년전입니다. 그러니까 요가 그만 둔지... 십년이 된겁니다. 요가 경계는 이제 저에겐 의미가 없어요. 일상만 저에겐 의미가 있어요. 우룡스님의 공삼매 다음의 요가 경계는 경을 봐도 없어요. 요가경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요가적 경계에 있어... 스스로가 공삼매라 이름한 것 다음에 드러나는 어떤 경계가 있다면... 공삼매라 이름한 것이 공삼매가 아닌 겁니다. 이 점은 요가에서든 불교에서든 부인해선 안됩니다. 어쨌건 형이 바로 그 공삼매를 알기 바랍니다. 그것을 알아야 일차적으로나마 선가에서 말하는 본성을 안다고 이름할 수 있어요.
맞지요? 그전에는 선가에서 말하는 본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어요. 제가 형과 부딪힐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형은 그 공삼매를 모르는데... 본성을 체험했다고... 형의 체험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하니 충돌이 있는 겁니다. 형의 경지를 인증하기 위해 경의 내용을 바꿀순 없습니다. 그건 말이 안돼죠.
그리고... 저는 아라한의 무상정등각을 비상비비상처에서 얻는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그건 경에도 반하는 말입니다. 자꾸 스스로 <공삼매를 일고 견성했다>고 말하기 위해... 경과 저의 말을 왜곡하시네요. 공삼매 이후에 어떤 요가적 경계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라한이 곧 부처는 아닙니다.
상좌에서도 아라한이 곧 부처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하진 않습니다. 실질적으론 부처로 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불교 역사가 아라한과 부처의 차이를 점차 긍정하는 쪽으로 전개된 탓에... 어쨌건 명시적으로 그러진 않죠. 제가 공삼매를 모른다 할 수 있지만, 공삼매 이후 어떤 요가적 경계가 있다고 하면 안돼요.
비단금님: 아우님! 고만하시게. 이곳카페에 적혀 있는 댓글을 다시 읽어 보시요(여러번말이요).. 꿍뱅이도 쓸데가 있어요. 아... 신체건강에 대한 tip이 생각나서 부언하면... 체표면 온도측정기로 이마와 손바닥의 온도를 측정해보세요. 수승화강입니다. 손바닥의 온도가 더 높으면 자연의 이치에 맞습니다.
방문객님: 그 자연의 이치는 도인의 일이라니까요. 도인의 관점에서 자연의 이치란 말입니다. 원칙적인 요가는 수승화강이 아니라 수강화승입니다. 이건 차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요가는 건강을 망치는 길의 하나입니다. 빨리 저 세상으로 가는 기법의 하나죠. 장생술이 아니라 해탈을 위한 거니까요. 하하하
인간이란게... 인간이 만든 꿈이 재밌는 겁니다. 별의 별 것들이 다 있거든요. 느낌의 호불호를 망라하여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시도되었죠. 정말 현란하고 장엄합니다. ... ... 저도 건강한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형아. 고마워요~
비단금님: 수승화강은 선도가 아니라 한방에 나오는 야그요. 아우님도 한번 측정해보시요. 우리직원들하고 나하고 측정을 다 해보았소.. 어떨것 같습니까? 우리직원들은 이마가 0.5도 내외로 높아요. 저는요. 손바닥이 더 높아요.
선도술에서는 주천화후가 있죠. 처음에 단전에서 엄청 뜨거운 열기가 모이죠. 그리고 전몸으로 그 열기가 퍼지죠.
방문객님: 수승화강은 선도와 한방이 같습니다. 선도지술이 장생지술이다 보니 한방과 밀접한 편입니다. 중국적 문화가 그렇죠.
비단금님: 더구나 전 금강경의 범어에서 "아라한의 아뇩다라막샴보리"라는 표현까지 찾아서 형에게 제시했어요. 그런데 형은 제시한게 없잖아요. 형은 단지 부처의 앎을 무상정등각이라 이름하니 제가 제시한 경전 문구에도 불구하고 무상정등각은 아라한의 앎에는 붙일 수 없다는 거잖아요. 공이 의미가 깊듯...무상정등각도 깊어요.
위글은 님이 유마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방문객님: 아마... 형의 머리속에서 형의 기준에 맞춰 왜곡해 수용했을 겁니다. 잘 확인해 보세요.
그러니까요. 누차 일차적 의미의 열반 즉 없음은 아라한의 무상정등각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다시 잘 읽어 보세요. 저는 이제껏 한번도 비상비비상처를 아라한의 무상정등각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상황전개가 요가와 상좌 그리고 대승에 대해 간략히 적을 필요가 생긴 것 같기도 하네요.
비단금님: 이곳에서 <비상 비비상 처>는 무상삼매에 들기 직전과 직후라고 말한 적 있다... 중략...소위 불교의 아뇩다라막샴보리 즉 무상정등각은 아라한에서 부처까지의 경계를 총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자가 길을 감에 있어 부처를 논할 필요는 없다. 행자가 알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아라한의 무상정등각이다.
그리고 그 무상정등각이 '없음'이라는 말이다. 아뇩다라막샴보리는 하나의 순수한 상태이다. 그런데 본글에서 적었듯... 행자가 아뇩다라막샴보리에 이르면 견처(=의지처=마나스)가 있음에서 없음이 된다. 행자의 마음이 있을 때에도 없음이 견처이기 때문에 소위 현실이라 이름하는 것은 몽유병자의 그것처럼 몽환적이 된다고 했다. 견처(=의지처)는 바로 마나스이므로 곧 마음이다. 그러므로 있음에서도 <없음이라는 견처를 가진 마음> 즉 <아뇩다라막샴보리의 마음(아뇩다라막샴보리심)>은 얻어지는 것이다.(이는 무상삼매에 이른 요가행자와는 다른 점이다. 요가 행자는 참나(=진아=아뜨만=푸루샤)를 찾았다고 선언하며 없음을 참나라고 산냐를 일으키는 것으로 끝낸다.) 여기까지가 상좌불교의 아라한에 대한 설명이다.
방문객님: 여러번 지적하고 밝혔듯... 마나스에 관해선 유식30송의 견해와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유심론 내에서도 견해가 분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상비비상처는 산냐와 함께 하는 상태로 무엇이 있다고 할 것엔 다름이 없으니... 마나스가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는데요. 기억이 안나십니까?
비단금님: 위의 분이 적은 '공삼매'는 제가 지적한 무상삼매 즉 '없음'과 일치합니다 아우님이 한말 들입니다.
방문객님: ? 아직도 퍼다 나르는 중입니까? ? 위의 설명을 보세요. 정말 형의 기준에 억지로 끼워 넣고 있다니까요. 왜 그러는지 스스로를 한번 돌아 보세요. 몇 번이나 돌아 보라고 해도 그러시네... 공삼매 다음 경계는 없어요.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요가적으로도 그렇고 불경을 봐도 그러합니다. 이를 부정하면 대단히 곤란해요
비단금님: 저는 요. 우룡스님의 공삼매 체험을 최초의 무기공이라 했고, 최상위의 무기공을 범아일여라 했고요. 비상비비상처다 했어요. 이 비상비비상처를 덕숭문중에서는 요. 아공을 증득했다 한다고 했고. 생멸심을 증득하는 거다고 했소. 그리고 본성은 진심을 증득하는 거구요. 덕숭문중에서는 법공이라 했습니다.
방문객님: 대승에서 일상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요가적 경계로는 아라한의 무상정등각 다음의 경계가 없습니다. 나가르쥬나께서 "세속이 곧 열반이다"라고 말하신 점이 드러내는 바의 하나가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계속 요가적 경계를 추구하며 공삼매를 알고 본성을 안다 함은 이 무슨 경우입니까? 말이 안되는 거죠.
그러면 차라리 형은 우룡스님의 공삼매는 공삼매가 아닌데... 우룡스님이 공삼매라고 했으니 삿되다고 하세요. 그것이 형의 견해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경의 여러군데서 나오는 것을 무시하고, 형의 견해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경이 아니라 불자 개인의 견해를 타파해야 하는 겁니다. 저나 우룡스님은 삿될 수 있어요.
형아...육조 혜능조사께서 무심 즉 무기공이라 경계하시는 바는 없음의 경계라고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리푸타의 아라한과가 드러내는 것을 무심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왜 상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보지 않습니까? 그 견해는 지금도 동일해요. 이곳에 글 올리며 아직까진 견해가 바뀐 적이 없습니다.
비단금님: 그리고, 님이 말하는 없음은 무기라 하였소. 이건 이곳카페에서, 1년전 쯤에 한말 이요. 여기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요.
아우님!. 우룡스님이야기 하지 말소. 위에 적은 댓글도 읽지 못했소. 일종의 마장으로 보셨소. 능엄경의 50마장 말씀을 하셨소. 우룡스님의 공삼매는 오음이 멸할때 경험하는 거요. 이곳에 집착하면 마장이요
방문객님: 그건 마장이라면 마장이랄 수 있습니다. 오온이 멸하면 아무 것도 없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무심 즉 무기공이라 하여 선가에서 경계하는 바입니다. 대승에서 원래 아라한과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어쨌건 공삼매 이후에 어떤 요가적 경계가 있다 함은... 삿된 겁니다. 사리불 흉내내면서 대승을 파는 격이니까요.
비단금님: 아래 댓글에 적었지만 무심이 아니요 공심이요. 님이 적은 무심의 의미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육조단경에는 空心입니다. 탄허스님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석했소이다.
/// 헤능스님의 스승인 오조스님의 최상승론을 인용하면서, 무기심은 진심이 아니다라고 했지. 무기는 요샛말로 무의식이라 하면서, 유식30송의 이론으로는 7식, 8식이라 하지 않았소. 서산대사도 무기공이라 했지. 선자의 병폐라 했지. 그리고 무심이라 되어있지 않고 공심이라 되어있소. 마음을 비운다는 거요. 마음이 없음이 아니요. 님이 말하는 없음은 마음이 없음아니요?
방문객님: 윗꼬리말의 코멘트까지 포함한 답코멘트입니다. 그러니까... 없음에 탐착을 일으키면 '공'을 모른다 이 말입니다. 이는 제가 누차 설명한 바 입니다. 점심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저도 점심을... 하핫
비단금님: 그래서, 없음은 님의 언어라 하지 않소이까? 님의 언어로 없음은 마음이 없음이 아니요. 님은 상의 없음이 존재의 없음과 다르지 않다면서요? 유마에서도 없음체험이 자신 뽕 사라진다고 했잖소, 선가에선 그런걸 단멸공에 빠졌다 합니다. 무기공은 요. 우룡스님의 공삼매 표현처럼요. 환하고 허한 상태를 반야심경의 空으로 착각하는 걸 무기공이라 합니다. 이 또한 님의 불법이지.... 그래서 님의 중도의 空논리가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님이 다른이 들의 글을 볼때, 님의 있음과 없음의 논리로 봅니다. 나는 나다,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존재한다. 는 말씀을 이건 있음이라 없음을 모른다고 봅니다. 님이 견처가 그러합니다.
방문객님: 아이참. 제가 안다 모른다가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없음 이전의 상태는 그리 강한 탐착이 일어난다고 할 것도 없다니깐요. 몇 번이나 한 말 아닙니까. 경을 무시한 형의 견해가 무슨 소용이예요. 육조단경에서도 무심에서 사리푸타를 예로 들고 있잖아요. 자꾸 경은 물론 저의 견해도 왜곡해서 자신에게만 맞추시네.
비단금님: 경을 왜곡한다?
저는 요 무식해서, 범어로 적힌 경전을 읽지 못하고, 한문을 번역한 아함경밖에 읽지 못했죠. 그 경을 인용하면서, 비상비비상처, 즉 무상정에서 무상정등각은 증득되지 않고, 멸진정에서 증득된다 했지요.
방문객님: 오늘 집에 들어 가서... 요가(선도지술), 상좌, 대승에 대해 간략히 적어 글을 올리겠습니다. 저의 신심을 배제하고... 건전한 일반인의 기준에서 객관적인 것에 맞춰 간략히 적겠습니다. 혹 늦어져도 내일까진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서... 계속 이야기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더 좋을 듯 합니다.
비단금님: "경에 보면 나와요. 비상비비상처등은 산냐와 함께 한다고. 산냐가 멸하면 적멸입니다. 아라한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말은 위쪽에서 쓴 님의 댓글입니다.
방문객님: 그래요. 비상비상처에서 산냐가 멸하면 아라한과가 드러납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제가 위에서 적겠다고 한 글은 신심에 미루어 별 도움이 안되기에 직접 다룬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불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니... 적어 보겠습니다
비단금님: 아우님! 님은 님의 길을 가세요. 나는 내길을 갑니다. 각자의 몫인 십자가가 있다지 않소?
방문객님: 그건 맞습니다. 불자가 십자가를 짊어 지는 것도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허물고 세우고 허물고 세우고 하다 보면 끝날 날도 오겠죠. 그럼 적겠다고 한 글을 안적어도 되려나? 하하하 나중에 뵙겠습니다.
비단금님: 영명의 <종경록>에 있는 자가공부점검법을 소개하면. 1. 견성해 마치 대낮에 물건을 보듯, 그렇게 지혜로울 수 있는가 2. 사람을 만나고 상황에 대처하는 등 모든 경우에 밝고 뛰어나 도와 상응하는가 3.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들의 말을 모두 살펴도 의심스런 곳이 없는가 5. 언제 어디서든 생각 생각마다 깨어 있어, 한 순간에도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6. 일체의 순경계와 역경계가 나타날 때마다 그 자리에서 모두 알아차려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가 7. 본체가 일어나는 곳을 알아 생사의 뿌리에 어지럽게 미혹되지 않을 수 있는가 8. 옷 입고 밥 먹을 때, 일을 맡아 처리할 때에도 일일이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가? 9. 부처와 중생이 있다 없다, 칭찬과 비방의 말을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가 10. 어떤 성인의 말에도 의문이 없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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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보통 인터넷에서는 3줄만 넘어가도 피로감이 몰려온다고 하죠.
진정으로 남의 말울 듣고, 남의 글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노력이 필요한거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기억하기 선생님한테 한 소리가 아닙니만요, 저야 이렇게 퍼다 주시면 길이에 상관없이 좋을 뿐입니다.
혼잣말과 비슷한 소리였습니다. 방문객님 글은 몇편 읽어봤는데, 정말 많은 인내심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시더라구요. 잘 안 읽혀집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소리를 하시니까 그럴테지만요.
무색계의 의식상태는, 유상과 무상을 자각하는 일등을 할 수 없죠... 그런 일들은 무자게 복잡한 것이거든요...
쭈욱 소위 없음을 부정하시는 편이신데요. 인정하기 쉽지 않죠... 그러니 선향님이 그 분의 견해가 옳다고 느껴지면, 그것을 따라가시면 되죠... 다만 그런 경우, 불교를 이해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불교에서 소위 "없음"이라는 법은 극히 중요한 문제이기에...제 입장에서는 소위 "없음"을 부정하는 경우, 반박을 할 수 밖에 엄거든요.
부처님께서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라고 분명하게 설하셨죠. 환멸연기등을 설하셨다구요. 상좌불교도 "니로다 삼마빠띠"라고 "소멸의 증득"을 이야기하구요. 대승불교에서 무심, 무념등은 흔히 거론되죠. 무심이나 무념이, 대상을 놓친 멍청한 상태를 칭하는 거겠어요? 그런 뜻일 수는 엄죠.
적은 적 있는데...일단 소위 무색계 선정들에 돌입하면, "비춤(각)"이 없는 일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무색계의 각 선정들은, 그 각각이 요가의 최고 경지들 중 하나입니다. 요가의 최고 경지에 이른 행자가, 갑자기 멍청함에 빠진다... 그런 일을 말하는 전승은 없습니다. 요가등 인도 일체 전승들은 물론 불교에서도 엄어요. 장구한 역사속에, 그 많은 행자들 가운데에도 없었는데...오늘날 갑자기 생깁니까? 무색계가 어떠한 상태들인지 모를 때에나 그런 말이 가능합니다.
"기억이 없는 상태"라는 말이, 좋은 표현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 경계를 가능한한 직접적으로 표현한 거죠. 그 상태는 분명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 상태가 알려지는 것은, 이미 "없음" 즉 "기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거죠? 이러한 알려짐을 두고 [무념을 비춘다(각한다)]고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의 무념은, 비상비비상처를 확립했다고 말하시는 분이 제시한 무소유처가 아니예요... 념은, 알아차림입니다. 념이 각이죠... 념이 있다면, 무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무념이 알려진다면, 무념을 념한 것이구요. 하지만 이는, 념이라기 보다는 추론에 가깝죠...
복잡하게 관계를 시설하는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무색계가 아닙니다. 다시 지적해 강조하지만, 무색계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욕계에서 가능하죠.
무색계는 매우 단조로운 세계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뻑 상태예요. 다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한 무색계선정에서 다른 무색계선정으로 옮아가는데, 옮아간 무색계 선정에서 무상을 알 수 있는가? 없어요... 일상에 돌아와야만, 앞의 무색계 선정은 무상하다는 판단이 성립합니다. 정작 옮아간 무색계 자체에서는 그러한 판단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면 유상과 무상에서의 상이 항상함이 아니라, "상(이미지, 판단)"이라는 뜻으로 보면, 어떤가? 그래도 마찬가지예요. 자뻑 말고는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는 것이 무색계입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까? 그러하다면, 아직 집중이 부족한 거죠...
자뻑 상태가 아닌 거예요. 합일 되지 않은 거라구요. 무색계에서는 합일을 벗어날 수 없어요. 오늘 올라온 글에서도 나오는데, 냄새를 맡으려고 해서 냄새가 없다는 직관이 성립했을 때, 그 직관에 자뻑 상태라면, 그 상태에서 있음이나 없음, 항상과 무상등등이 확고하게 알려지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한 거예요... 마음이 무한한 허공에 머물면, 무한한 허공은 없어요... 무한한 허공과 합일된 상태인데, 어떻게 무한한 허공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무한한 허공이라고 이름하나? 그것은 무한한 허공을 알아 무한한 허공과 합일하라고 제시된 거지, 무한한 허공이라고 계속 알라고 제시된게 아니예요...
욕계에서는, 소설을 쓰기 쉽죠.
그리고 체험이 없으면 말로 합니다.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니, 아무 것도 엄고 무한한 허공만 있었다면서 공무변처를 안다고 해요. 하지만 공무변처가 아니니, 무한한 허공이 있는 거예요. 무소유처와 관련해 "아무 것도 없다"는 언명이 제시되기는 합니다. 그거는 식무변처와의 관계에서 그런 거죠. 그리고 식무변처에서 그걸 알라는 의미도 아니예요. 식무변처에서는 그런 마음을 낼 수 없어요. "아무 것도 없다"는 관념을 잡아 그 상태로 합일하겠다는 등의 의도를 낼 수 없단 말입니다. 그게 가능하면 식무변처가 아니죠. 현실에서 그러한 줄 알고, 강렬한 의지로 식무변처를 궁극으로 취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식무변처는 강렬하기에, 그 강렬함이 없는 다음 상태로 나아가라는 의미로 "아무 것도 없다"라는 언명이 제시되어 있는 겁니다. 현실에서 그렇게 알고 선정으로 돌입하라는 겁니다. 언제까지... 될 때까지... 될지 안될지는, 막말로 운수소관이예요. 무색계에서의 이행은 말 그대로 울퉁불퉁 그 자체입니다. 왜 그런가? 무색계에서는 그 어떤 의지적 노력도 할 수 엄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집중력을 가지고, 자동으로 이행하든가... 아니면 멈춰진 상태로 남겨지든가... 무색계의 신들은 의지가 엄습니다. 무색계의 의식상태에서는, 의지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가능하지 않아요... 노력할 수 있다면, 무색계가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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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ㅏ... 빼 먹은 부분이 있네요. 선정과 관련해서는 끝이 없는 거니, 더 말할 필요는 엄구요. 넷에서 단금이 행님이랑 저랑 의견일치를 보는 부분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단금이 행님이 잠적을 하신 후 다시 나타나셨는데, 의견 일치가 되었더라구요. 일단 큰 줄기에서 의견에 대립이 사라지면, 나머지는 옵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후 충돌이 엄었는데요...
좌우당간...단금이 행님이 잠적하셨을 때, 체험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교학 공부도 하시구요. 어차피 돈오점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체험 유무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죠... 그런데 체험파들은 아무래도 견해가 아주 강해서 말이죠. 저도 무지 강하죠?
위에 적었듯, 체험 유무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특별한 필요가 엄는 한, 타인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도 엄구요. 개인의 성취따위야, 제 알 바 아니란 말이죠...
솔직히 인용된 서술은 터무니 없는데요... 서술 내용을 아무리 좋게 봐도, 욕계 선정의 끝머리란 말이죠. 욕계 선정의 끝머리는 색계 선정의 끝머리와 대등해요. 그리고 인용된 내용은 분명, "없음(식의 소멸, 오온의 소멸)"을 부정하죠?
최대한 선해해서, 선향님처럼 이해하더라도...그와 같이 이해한다면, 선불교를 부정하는 거죠? 소위 견성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선향님이 바라는 바가 아닐 걸요?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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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계 선정은 빼어난 경계지만...빼어난 만큼, 열등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위에 적었듯, 무색계의 경계 그 자체에서는 노력할 수가 없어요... 수행할 수 엄는 거죠... 그래서 소위 상좌불교에서 거론되는 아나함은, 무색계에서 재생한 다음 반열반하지 않습니다. 무색계에 태어난다면, 바로 그 생에서는 반열반할 수 엄어요... 무색계가 어떠한 상태인지 모를 때에는, 의문이 들 수 있죠... 왜 아나함은, 비상비비상처에서 태어나 반열반하지 않는가? 하지만 무색계 선정이 어떠한 것인지 알면, 그러한 의문은 생기지 않아요. 또한 비상비비상처에 스스로를 확립시키면, 비상비비상처에서 태어납니다. 결국 다음 생에서도 반열반 몬해요.
그냥 대충 대충 설렁 설렁 말하는 것 같지만, 대충 대충 설렁 설렁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위 대승불교권에서는 멸진정을 포함하여 9가지 선정을 논합니다. 상위에 위치한 선정이라고, 더 좋은 것만은 아니예요. 무색계라고 색계보다 빼어난 것은 아니예요. 색계라고 욕계보다 빼어난 것도 아니구요. 멸진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이라고, 선정보다 저열한 것도 아니구요. 수행과 관련해, 각 경계는 모두 나름의 단점이 있습니다. 물론 멸진정이 다 같은 멸진정은 아니겠죠. 오온의 소멸이라고, 다 같은 오온의 소멸은 아니죠. 오온의 드러남에 포텐셜이 다르듯, 오온의 스러짐에도 포텐셜은 다르다고 확신합니다...
요가에서 성취를 이룬 분들,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들 많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죠. 별 다른 성취를 이루지 못했어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들 많습니다. 제가 성철스님을 비롯해 스님들 비판하는 견해를 올리지만, 성철스님을 비롯해 훌륭한 스님들 많습니다.
성취와 존경할만한 분이라는 것은, 같은 궤가 아니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착각합니다. 견해에 대한 비판은, 견해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견해가 모자란다고 하여,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견해를 비판하면, "그 분은 훌륭한 분이다"와 같은 말을 흔히 듣게 됩니다.
가만 보면...훌륭하다는 말에는, 강요된 완벽성이 있는 듯...
특히 종교와 관련한 영역에서는 더 그런데요. 그러한 일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상대 전체를 자신의 평가에 맞출 까닭이 없습니다. 불법 하나도 모르는 할머니 불자일지라도, 그 신심만은 따라갈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그와 같이...불법 하나도 모르지만, 훌륭한 불자 많습니다.
저는 스스로 밝히듯...계행에서 나이롱이고, 호전적이며, 정통 교학을 제대로 암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 무지 많아요. 하지만 제가 빼어난 부분도 있는 거예요. 예로...쌩 기초교학일지라도, 교학의 현실 접목에서는 뛰어난 편입니다. 다양한 경험에서는 뛰어난 편이예요.
부처님의 소위 십대제자는, 모두들 아라한이었습니다..
많은 아라한 중 십대제자가 있는 것이고, 십대제자라도 각각 뛰어난 부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요가행자가 아니라 불자이고, 지금도 접할 수 있다면...비상비비상처에 항존은, 불법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해줬으면 합니다. 불교에서는...비상비비상처를 떠나면, 비상비비상처의 의식상태는 없습니다. 비상비비상처도 조건성립이예요. 비상비비상처에 있었다면, 글을 적거나 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가능하다면...위에서 제가 적은 내용, 무색계에서 그러한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려주면 더 좋죠.
자...위와 같은 지적이 있다고 해서, 그 분이 비상비비상처 내지 어떠한 경계를 성취한 바 없다는 뜻입니까? 인격을 폄하했나요?
견해에 대한 지적은, 견해에 대한 지적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뜻입니다.
[비상비비상처에 항존]이라는 표현은, 선향님처럼 받아들이기 어렵구요. 이현령 비현령도 한계가 있는 거죠. 그리고 일상에서 8식을 자각한다면, 역시 마찬가지가 됩니다. 일상의 의식상태에서는, 비상비비상처의 의식상태일 수 없어요. 요가행자들이나 그렇게 말하죠. 이러한 점은, [일상의 세가지 의식상태 등]이란 본글에서도 지적한 바 있어요.
불자라고 했고, [경]등을 잘 모른다고 했으니...[경]에서 부처님이 지적한 바는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그 분에게 더 유익하다고 판단해서, 그 분에게 알려주면 더 좋겠다고 했을 뿐...강요한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