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설악산(<강원도의 힘>, 1998)에서 시작하여 춘천과 경주(<생활의 발견>, 2002), 제천과 제주도(<잘 알지도 못하면서>, 2008), 그리고 전주(<첩첩산중>, 2009)와 통영(<하하하>, 2010)을 거쳐 다시 서울로 입성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잠깐 외도를 하여 프랑스파리(<밤과 낮>, 2008)에서 삶의 탈근대적 현실과 맞닥뜨리지 못하는 비겁한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부터 시작하여 2010년에 발표된 <옥희의 방>까지 이어지는 대부분 영화들은 서울에 살고 있는 근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북촌방향>과 이전 영화들의 차이는 <오 수정>(2000)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를 비롯한 예전의 영화들이 서울의 내부에서 그 속에 살고 있는 근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일상적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에 <북촌방향>은 서울에서 탈주하여 전주나 통영, 혹은 춘천이나 제천에 살고 있는 성준(유준상 분)이가 서울을 찾으면서 서울의 근대적 일상을 아주 낯설게 탈근대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식민지 "근대의 풍경은 외부인들의 시선으로 더 잘 목격"되는바,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에 등장하는 근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식민지적 왜소함과 신자유주의적 허상이 만드는 일상적 삶의 파괴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성준이가 본래 왜소하고 열등함에 찌들어 있는 식민지 근대의 지식인이거나 오직 서구적 근대의 허상만을 좇는 신자유주의적 환상의 도덕적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서울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식민지 권력과 신자유주의의 상대주의적 지식의 문화에서 벗어나고자 서울에서 탈주(혹은 도피)하여 그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생산적이거나 혹은 도피적인 삶을 찾는 중이다. 그래서 예전에 잠시 영화감독이었던 성준이가 찾는 곳은 서울의 다른 곳들과 전혀 다른 "북촌방향"이다. 서울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가회동과 삼청동 그리고 인사동 등등으로 이루어진 "북촌방향"은 전근대적인 한옥 건물들과 근대적인 서양식 건물들이 어울려 지역성과 세계성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아우르고 있는 탈근대적 문화의 표본이다. 그러나 서울의 "북촌방향"은 서울의 일상이 아니라 서울의 근대적 일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삶, 우리의 문화 그리고 상생적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탈근대적 공간이다. 그래서 <북촌방향>에 등장하는 성준이는 "예전처럼 사고 치지 말고 오직 선배 영호(김상중 분)만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영호는 이미 서울의 근대적 일상에 찌들대로 찌들어서 그러한 근대적 일상에 저항하거나 탈주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신자유주의의 상대주의적 허무감으로 자신의 영혼을 죽이고 있는 사람이다.
예전처럼 사고 치지 말고 오직 선배 영호만을 만나기로 결심"하는 성준이의 의식과는 달리 성준이의 무의식은 예전의 연인이었던 경진(김보경 분)이를 만나는 것이다. 성준이의 무의식은 영화를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만나면서 드러난다. 그리고 성준이의 무의식은 곧 근대적 일상이 아니라 그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만의 삶, 우리의 문화 그리고 상생적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탈근대적" 욕망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연히 만난 대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무의식적으로 찾아간 도곡동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나온 성준이는 근대적 의식으로 탈근대적 무의식을 억압한다. 성준이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 의식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이루어진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덕,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들의 시선만으로 이루어진 양심 그리고 깨달음이거나 삶의 진리가 아닌 오직 "정보의 가치만을 가지며, 그것도 필연적으로 혼란스럽고 절단된 정보만을 갖는" 식민지적 근대의 지식체계이다. 성준이의 무의식이 경진과의 만남 속에서 "나만의 삶, 우리의 문화 그리고 상생적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특수하고 특별한 탈근대적" 욕망을 생산하는 반면에 서울의 일상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도덕과 양심 그리고 식민지적 지식으로 구성된 의식은 폐쇄적이고 파괴적인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일상적 패거리 문화 속으로 퇴보한다.
II.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
성준이는 타인의 견해들로 구성된 서울의 근대적 일상에서 탈주하자는 경진이의 호소에도 영호와 만나 신자유주의 지식인 패거리 문화의 일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일상은 식민지적 근대성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 즉 "도덕적 원한"이 만드는 "양심의 가책과 증오와 죄의식"의 일상이다. 성준이는 자신의 "삶을 모욕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가회동의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성준이가 중원(김의성 분)이에게 삶의 만남과 구성은 "인과론적 결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연과 사건"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만 근대적 일상의 "인과론적 결과"에 빠져들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덕적 원한"이다. 그러나 "도덕적 원한"의 근본적 가설, 즉 "선과 악의 이분법"은 영적 깨달음의 기독교가 권력화되고 제도화되면서 대중을 무지의 암흑으로 밀어 넣는 방식이고, 그것이 근대 기독교의 문자해석학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규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근대 속의 탈근대 철학자였던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서에서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마라"라는 말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되는 과일로 인한 "중독"의 문제이다. 과일이나 술, 혹은 음식과 마찬가지로 섹스하는 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중독"이 만드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인 것이다.
▲ 영화 <북촌방향>의 한 장면
"중독"의 측면에서 이 세상의 모든 만남에는 선과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일은 아담의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그의 고유한 본질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도록 결정할 것이다." 그 새로운 관계는 결코 선과 악이 아니다. 그 새로운 관계는 아담, 혹은 성준이를 생성적인 새로운 몸으로 "좋게" 생성시킬 수도 있고, 또한 파괴적인 권력과 폭력의 몸으로 "나쁘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관계의 만남이 만드는 좋음과 나쁨은 결코 사회적인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만남의 관계를 만드는 두 존재의 생산적 윤리의 문제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에서, 만남을 조직하고, 자신의 본성과 맞는 것과 통일을 이루며, 결합 가능한 관계들을 자신의 관계와 결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훌륭하다고(좋음이라고, 혹은 자유롭다고, 합리적이라고, 혹은 강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이와 반면에 "우연한 만남에 따라 살아가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지만, 정작 자신이 겪는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낼 때마다 한탄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열등하(나쁘)다고, 혹은 예속적이라고, 혹은 약하다고, 혹은 미련하다고 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관계 아래서 아무것이나 만나기 때문이다."
"도덕적 원한"이 만드는 "양심의 가책과 증오와 죄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은 나, 혹은 그(녀)의 독특함과 특이성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유사성"만을 추구하는 식민지적 근대의 지식이다. 식민지적 근대의 지식이 나, 우리, 그리고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독특함과 특이함을 사유하지 못하고 오직 서구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의 유사성만을 사유하여, 마침내 북한이나 중국, 혹은 베트남이나 쿠바,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등의 독특함과 특이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처럼 성준이는 자기 자신과 경진이, 그리고 자신과 경진이의 관계가 만드는 독특함과 특이함을 사유하지 못하고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만난 예전(김보경 분)이의 외양이 지니고 있는 경진이와의 "유사성"만을 발견한다. 마치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근대적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미국이나 서구 유럽의 유사성에 매혹되어 그와 다른 독특함과 특이함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성준이는 예전이가 가지고 있는 경진이와의 유사성만을 인식할 뿐, 보람(송선미 분)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함과 특이함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그는 "열등하고, 예속적이고, 약하고, 미련하게" 된다. 스스로 "유사성"만을 사유함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의 결과를 영화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 영화 <북촌방향>의 한 장면
근대 식민지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은 서구적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가 만든 "삼중의 환상"으로 작용한다. 첫째로, 그것은 "(근대적) 의식은 오직 결과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온갖 이미지들이 만드는) 사물들의 질서를 (문자해석학을 토대로 한 근대적 서열체계)로 전도시킴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메우는," 즉 현실이라는 자본과 권력의 게임에 임하는 "목적인이라는 환상"이다. 이러한 "목적인의 환상"은 현실의 다양한 관계들이 만드는 상호 생성의 좋음과 나쁨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이 나의 몸에 미친 결과를 오직 "목적인"으로서만 사유한다. 이것은 둘째의 환상을 만드는 원천인데,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것처럼 극단적 개인주의를 통하여 "자신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제 1 원인으로 간주하게 되고," 마침내 끊임없이 생성적 무의식을 만드는 "자신의 몸에 대한 억압적 권력을 내세우"는 근대적 의식이 지니는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이다. 그러나 현실의 무지가 드러나는 곳이거나 영화 속에서 성준이가 영화를 공부하는 대학생들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드러나듯이 "목적인이라는 환상"과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이런 곳에서 "목적인과 자유명령에 의해 행위를 하며, 영예와 처벌에 따르는 세계를 인간에게 마련해 놓은 신(혹은 운명)을 내세우는" 것이 바로 "신학적 환상"이다.
근대 식민지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은 <북촌방향>의 성준이가 자신의 도덕적 원칙으로 영호와 보람이의 관계를 예단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면서 자본과 권력의 게임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도덕적 원한"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나 법률이나 검찰의 명령이 근원적인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지배를 위한 근대적 서열체계이듯이 영호가 이혼하거나 별거하는 것은 사물의 질서를 깨트리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가족의 서열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성준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원한"의 무지는 예전이와의 관계에서 바로 드러난다. 관객들은 성준이가 예전이와의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그의 삶의 의지가 만드는 본원적 욕망이 아니라 "유사성"만을 추구하는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의 작용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영화의 말미처럼 그 다음 날이거나 혹은 그 언젠가의 어느 날에 성준이가 또다시 "유사성"을 토대로 보람이와 닮은 영화 팬(고현정 분)을 만나서 더욱 나빠지는 것은 신학적인 원죄의 운명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이 무지에서 비롯된 "자유명령이라는 환상"이 만든 "신학적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은 <소설>의 주인, 예전이처럼 느낌도 감각도 없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욱더 큰 문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노예의 삶을 지식이나 도덕으로 포장하여 타인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III. 탈주하라! 그(혹은 그녀)와 새로운 탈근대의 영토를 만들라!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고, 관객들은 쓸쓸하게 현실의 삶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간다. 삶은 저렇게 더럽고 환멸스러운 것인가? 사랑은 언제나 내 삶을 더욱더 나쁘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삶은 내 느낌과 감각을 더욱 더 새롭게 만드는 것이고, 사랑은 내 느낌과 감각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감염되거나 감염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더욱더 커다란 느낌과 감각의 덩어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다른 지역들에서 서울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다른 지역들로 갔을 때의 차이이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여행을 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관계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도덕적 원한"이 만드는 삶의 파괴성을 깨닫게 되고, 서울에서 통영으로 여행을 갔다가 다시 서울에 온 두 남자의 이야기인 <하하하>는 서울의 일상에서 벗어나 통영에서 새로운 삶의 느낌과 감각으로 충만해진 풍자의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웃음을 제공한다. 그러한 깨달음과 풍자가 서울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서울의 신자유주의적 삶의 일상이 온갖 자본과 권력을 통하여 식민지 근대성으로 퇴행시키기 때문이다. 성준이의 식민지적 퇴행성은 근대의 "도덕적 원한"에 갇혀 경진이와 함께 서울을 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탈주하라! "도덕적 원한"으로 당신의 삶을 판단하고 재단하려는 근대적 지식으로부터 탈주하라! 당신에게 원죄 의식을 강요하는 모든 근대적 제도와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라! 그러나 탈주는 결코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나 <하하하>에서 보는 바처럼 순간적인 깨달음이나 풍자의 해탈은 이룰지언정, 탈주는 결코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탈주는 친구나 연인 관계를 만드는 둘 이상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혹은 그녀)와 함께 탈주하여 새로운 탈근대의 영토를 만들라! 그 영토는 새로운 친구들과 연인들로 가득 찰 것이 분명하다. 그 영토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느낌과 감각의 세계이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 원한"으로 만들어진 주인과 노예의 "목적인이라는 환상", "자유명령이라는 환상", "신학적 환상"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 영토는 또한 새로운 친구나 연인관계의 지식을 만들 수 있다. 지식은 끊임없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벗어나 친구나 연인 관계의 느낌과 감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모든 친구나 연인의 관계를 생성시키는 좋은 지식과 그 관계를 파괴하는 나쁜 지식이 있는 것이지 선과 악의 이분법을 통하여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생성시키는 친구나 연인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환원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