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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4일 수요일
[(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 학자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들을 위한 참생명의 산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광야에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5,6-10ㄱ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태 15,32).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15,30)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굶주림까지도 해결해 주시고자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에서 일으키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이는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15,30).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랑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을 데려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빵의 기적’은 치유 기적을 체험한 이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 바로 ‘군중’을 위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산으로 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어 주실 은총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대림 시기 동안 우리도 ‘군중’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은총이 필요한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죽음을 없애 주신 구원’을 체험시켜 줄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우리는 동료 인간들의 추위와 굶주림, 결핍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가장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피정 오신 분들이 내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영성 강의도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성찰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놓을 수 있도록 고백성사도 편안하게 보실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정성이 듬뿍 담긴 맛갈진 음식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좋은 프로그램에 앞서 잘 드셔야, 그뒤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리며 불만이 줄어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셨을 것입니다. 며칠 동안 당신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는 군중이, 먹을 것이 다 떨어져 굶기 시작하자, 선포하시는 말씀도 잘 안먹히는 분위기를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크게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말씀하시는 투가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안달입니다. 정말이지 귀찮고 짜증이 날 정도로. 예수님의 마음도 우리들의 어머니 같으시니,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훈훈해집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든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그럴듯하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름 위에 떠 계시기만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장밋빛 이상만 제시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구체적인 치유 활동을 통해서 참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굶주림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진실로 채워주셨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사화를 영적으로,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절대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필요성을 눈여겨 보십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당신도 느끼고 계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바 한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건강을 잘 유지하고, 굶주리지 않고, 고통받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의 추위와 굶주림, 결핍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는 물론 육적으로, 결국 전인적(全人的)으로 구원되도록 돕고, 그를 통해 천상 잔치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반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빵을 많게 하신 이 기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인 만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4천 명의 장정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들이 일곱 바구니에 흘러넘쳤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풍요로움, 즉 하늘나라의 풍요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이 완전무결한 기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 모든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이 기적을 통해 우리는, 하늘나라의 풍요로움과 천상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트 프리스코의 반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본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기쁨이지만, 반 모임에서 만나는 것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다섯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했습니다. 저를 포함 11명이 복음을 읽고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자매님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정재가 이런 대사를 하였습니다. “내가 해방될 줄 알았으면 친일파로 살았겠나!”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살았던 사람은 대한민국이 그리 쉽게 독립할 줄 몰랐습니다. 자매님은 암살 이야기를 하면서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산 사람도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가 있는 줄 알았으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을 텐데!”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믿기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복음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말씀을 나누면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학생 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충격받았다고 했습니다. 책은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명이라고 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고,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형제님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작년에 세례받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사제가 세례 대상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을 청합니다.’ 사제는 또 묻습니다. ‘신앙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세례받았을 때 응답했던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날과 그 시간’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고통을 느낀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고, 당신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면 인간입니다. 당신이 믿는 종교를 타인에게 설명하기보다는 당신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믿는 종교를 이해하게 하십시오.’ 톨스토이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함께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과거는 지금 하는 일이 쌓인 것이고, 미래는 지금 하는 일들로 채워지기에 인생에서 중요한 건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니 지난 일 때문에 후회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상태’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라고 말했습니다. 11명이 복음 말씀을 나누니 말씀의 식탁이 풍요로워졌습니다. 반장님이 본당 소식을 전하고, 실천 사항을 정하면서 복음 나누기를 마쳤습니다. 복음 말씀이 살아 있는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장애인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저도 반 모임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며,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반 모임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오 15,30)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사랑하고픈 사람과
사랑받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이 사랑받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안고픈 사람과
안기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안고
사람이 안기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주고픈 사람과
받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주고
사람이 받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먹이고픈 사람과
먹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먹이고
사람이 먹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낫우고픈 사람과
낫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낫우고
사람이 낫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일으키고픈 사람과
일어나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일으키고
사람이 일어나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네
살리고픈 사람과
살고픈 사람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살리고
사람이 사네
오늘의 성인
성 요한(John)
신분 : 신부,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 다마스쿠스(Damascus)
활동연도 : 650?-754년
같은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은 그리스 교부로서는 마지막 인물로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한 분이며, 성 로마누스 작곡가(Romanus the Melodist)와 더불어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치하에서 전 생애를 보냈지만,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 11월 11일)와 더불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성상 공경 논쟁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던 위대한 교부이다.
성 요한은 그의 대표작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에서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경, 구원론, 종말론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이 저서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의 "신학대전"에 버금가는 역저로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때의 다마스쿠스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성 요한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였고, 이 직책은 세습제였다. 그래서 요한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부친이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고,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친 외에 요한은 코스마(Cosmas)라 부르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코스마는 그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신학을 강조했다. 장성한 요한은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적 덕행, 특히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가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그의 스승 코스마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임 칼리프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자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고위 관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직하고 코스마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아직도 성상 공경 문제가 쟁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요한과 코스마는 책을 저술하거나 찬미가를 짓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장상과 다른 수도자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은 그의 스승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여라.” 이때부터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성서와 교부 문헌 연구 및 저술 활동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다마스쿠스 거리로 나가 광주리를 팔았다고도 한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 5세는 그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코스마를 마유마의 주교로 축성하고, 성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그런데 코스마 주교는 죽을 때까지 주교로서 양떼를 돌보았으나, 성 요한은 이내 수도원으로 되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다시금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이때부터 그의 저서는 도처에서 읽혀졌으나 반대자들의 질시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754년 12월 4일 고령으로 선종해서 마르 사바 수도원에 묻혔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0년 8월 19일 교령에서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 바르바라 (Barbar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306년?
같은이름 : 발바라
성녀 바르바라는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14명의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대중적인 성녀이다.
그녀의 출생과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이교도인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성녀의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을 물리치고 세상에 의해 딸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높은 탑 속에 그녀를 가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친은 성녀 바르바라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고는 격분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녀는 다행히 아버지의 분노를 피해 기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녀는 숨어 지내면서 일꾼에게 은신처에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창문을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은신처 또한 발각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도착하기 전 기적적으로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결국 붙잡혀 아버지에 의해 재판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ja)에게 넘겨져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배교하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 디오스코루스가 직접 성녀 바르바라를 참수했는데,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306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며, 순교 장소는 이집트, 니코메디아(Nicomedia),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토스카나(Toscana), 로마(Roma) 등 여러 곳으로 전해져 정확하지 않다.
성녀 바르바라는 번개나 광산과 포탄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이었다.
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번개에 맞아 죽음을 당한 것에 근거하며, 이러한 공경이 더욱 확산되어 후에 성녀 바르바라는 영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의 포병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또한 15-16세기에는 플랑드르의 작가와 이탈리아의 많은 건축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성녀 바르바라는 포병, 건축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바르바라의 상징물은 탑이며, 그녀의 상본에는 왕관, 종려가지와 칼, 탑과 공작, 그리고 그녀의 행복한 죽음을 상징하는 성작이 함께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