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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2 - 해안을 달려서 도착해 구마모토성에 올라 가토 기요마사를 회상하다!
2월 23일 온천과 차(茶) 로 유명한 우레시노 에서 차를 내려 마시며 다도(茶道) 를 생각하고, 도서관 안에
카페가 있고 서가는 완전 개방식이라 한 해에 백만명이 찾는다는 다케오 도서관 을 구경하고는 다시
차를 타고 구마모토에 도착했는데 해가 지고 있으니 입장시간이 문제라.... 구마모토성 부터 보기로 합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옆 언덕길을 올라 정문에서 난 큰 도로를 만나
걸어서 언덕에 오르니 커다란 운동장 같은게 나오는데, 예전에 사무라이들이 살던 집들이
늘어섰던 니노마루 인가 본데..... 성벽의 모서리 가 마치 여인의 치마 처럼 날렵하게 뻗어
내려온 "산기즈미 (算木積み) " 양식을 구경하면서 구마모토성 텐슈카쿠(천수각) 로 찾아갑니다.
입구에서 보니 지진 으로 성벽이 일부 무느진 흔적이 보이는데.... 2016년 4월 14일 구마모토시에서 규모 6.5의
지진 이 발생했으니, 옆 동네 마시키마치(益城町) 에서는 진도 7의 격렬한 지진동이 감지되었는데 1995년
고베 대지진, 2004년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 2011년 도호쿠 대지진에 이어 4번째 큰 지진 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전에 한번 여기 구마모토성에 왔었는데.... 그때는 기차로 구마모토(雄本) 역에 도착해
2번 트램(電車) 을 타고 6정거장만에 구마모토조마에 (熊本城前) 역에 내려서는
도로를 건너서 5~ 6분을 가니 나무 숲에 가려진 구마모토조 (熊本城 웅본성) 가 보입니다.
성을 바라보는 발치에 해자였던 강 이 흐르고 강변에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공원에 큰 동상 이 위엄있게 앉아
있으니.... 이 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 로, 나고야성 에는 성 축조 공사에 일본에서 가장 큰 바위를 날라와
그 위에 올라선 평복 차림의 웃기는 가토의 동상 이 서 있었는데.... 여기서는 엄숙하게 무게를 잡고 있습니다?
구마모토성 (熊本城) 은 규모에서는 일본 4대 성 의 하나로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는 부산에서 울산으로 가다 보면 진하 해수욕장이 있는 서생에 서생 왜성을
쌓았고 그후 울산에 도산성도 짓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死) 후에 1600년의 세키노가하라 전투
에서 도쿠가와 편으로 참가해 승리한후 자기 영지로 돌아와 조선인 포로들 을 동원해 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구마모토성의 기와는 일본식이 아닌 조선식 이며 조선 포로들이 거주한 동네는 지금도 "울산마치"
라고 불리니.... 구마모토시 주오구 신마치 1초메~3초메로 우루산마치(蔚山町) 라는 전철역도 있는데,
구마모토성은 서생 왜성과 구조와 축성법이 매우 유사하며 주민 중에는 서생 왜성을 쌓았던 사람들도
끌고 온건지 서생 (西生, にしお) 이라는 성을 가진 후손이 많으며 또 울산 간장 은 구마모토 특산품 입니다!
구마모토성 은 무로마치 막부 때 히고국(肥後国) 의 수호 였던 이데타 히데노부에 의해 '지바성
(千葉城)' 이란 이름으로 처음 축성되었으며..... 그후 여러번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구마모토 성' 으로 이름도 바뀌었지만, 한자는 '隈本(구마모토)' 로 지금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가토 기요마사 가 구마모토로 전봉된후 1591년에 기존의 성 주변 구릉에 성벽을 두르고는 구마모토
의 한자를 '隈本(외본, 구마모토)' 에서 '熊本(웅본, 구마모토)' 으로 고치도록 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조선에서 서생왜성과 울산 도산성 을 쌓은 경험에다가 조명연합군에 포위됐을때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고생한 때문에 식용 토란 줄기로 만든 다다미를 짜고 성벽은 조롱박 으로 도배했습니다.
은행 열매 를 먹기 위해서 은행 나무와 소나무를 심었고, 심지어 성의 밧줄과 흙벽에 넣는
짚에도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를 사용했으며.... 흙바닥에도 토란 등의 작물을 심었고
또 해자에는 연근 을 심고 식수 부족을 막기 위해 성 안에 우물을 120개 나 팠다고 합니다.
구마모토성의 원형은 부산에서 울산 가는 길에 진하 해수욕장 해안가 근처 산 위에 쌓은 “서생 왜성” 이니
그가 임진~정유왜란시 농성하며 쌓은 성으로 전망이 탁월하고 벚꽃 이 아름다운데, 성의 특색은 언덕을
올라가며 갈지자(之) 형태로 성을 쌓은 관계로 3면에서 공격군을 격퇴할수가 있으니 아주 견고한 성 입니다.
메이지유신후 서양이 취하기 전에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 이 일어나자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얻자면 종주국인 중국과 전쟁해야 하는데 전쟁준비 가 덜됐다고 거절하자,
격분한 메이지유신의 공신 사이고 다카모리 가 일으킨 1877년 서남전쟁때 1만 3천의 사쓰마군 공격
에 맞서 정부군 3천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구마모토성을 지켜내니 난공불락의 명성 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언덕을 오르면서 보니 구마모토성은 성루가 49개 에 100개가 훨씬 넘는 우물 이 있는 둘레가
12km 에 이르는 어마어마하게 큰 방대한 규모로.... 해자를 파서 강물을 끌어들인 후에
수십미터가 넘는 견고한 외성을 쌓았으며, 그 안에 다시 2차 해자 를 두르고는 내성 을 쌓았습니다!
구마모토성 안에 우물이 120개 인데는 처절한 사연이 있으니... 1597년 정유재란은 왜군 14만,
명군 11만 7천에 조선군 3만 8천 등 30만명이 싸운 전쟁인데.... 일본군은 1592년
임진왜란때 해로 가 이순신 장군에 막혀버리고, 육로 는 포장 도로가 없는데다가 의병에
의해 차단되고 겨울 강추위 로 고생한데다가 명군의 참전 으로 고전하니 교훈을 얻게 됩니다.
남부 4개도를 분할해 달라는 화평교섭이 결렬돼 1597년 재침한 정유재란은 장기전 이니.... 울산에서 순천
까지 28개 왜성 을 쌓고 늦봄이면 출진해 경상, 충청, 전라도를 초토화한 다음 늦가을에 남해안 왜성
으로 돌아와 추운 겨울을 안전하게 나며 휴식한 후, 다음해 늦봄에 다시 출진해 하삼도를 휩쓸면
멀리서 온 명군은 철수할 것이고..... 결국에는 조선의 경상, 충청, 전라도 를 얻을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2만을 부산과 주변에 남기고 12만 왜군이 북상 하자 맞선건 황석산성에 조선군 5백 과 남원성에 명군 3천
에 조선군 1천 등 4천 5백명이 전부니.... 권율등 경상도 조선군은 숨어 버렸고, 충청도 조선군은
도주했으며 명군도 전주, 공주 및 충주에서 후퇴하니.... 모리와 구로다군 4만이 천안을 점령하고
북상하자 경기도 남부 조선군이 도주한 가운데 9월 6일 직산에서 명군 해생과 파새 4천 이 전투를 벌입니다.
명군이 구로다군 1만과 싸우는 중에 모리군 3만 이 나타나자 중과부적으로 패해 수원으로 후퇴하니 서울은
멘붕 에 빠졌는데.... 9월 11일께 갑자기 왜군이 철수 하자 조정은 속임수라 여겼지만, 실은 음력 10월 2일
까지 남해안 28개 왜성으로 철수해 겨울을 나기 위함이니.... 그후 명군 양호는 가토 기요마사를 치기로
하는데, 서생왜성은 튼튼한지라 어렵다고 보고는 축성 시작 1개월 반 된 울산 도산성 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서생 왜성의 가토 기요마사 는 부하인 오다 가츠요시 를 시켜서 한달여 울산 도산성(학성공원) 을
쌓자...... 성이 완성되기도 전인 1597년 12월 22일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니, 명군은
5만 6천을 동원해 그중 2만을 양산 방면으로 보내 부산의 왜군 원군을 대비한 다음 명나라 경리
양호, 총병 마귀의 3만 6천명 에 조선군은 권율, 고언백, 정기룡, 이시언 1만 1천 5백 을 동원 합니다!
양호와 권율의 조명 연합군 4만 7천5백 은 이 한 싸움으로 가토 기요마사군 을 물리치고 임진왜란
을 종결 시키고자 가히 총력을 동원한 것이었는 데..... 이에 비해 왜군은 가토 기요마사군
1만 6천은 그중에 일부를 서생 왜성에 남겨야하니 병력의 열세 에다가, 미완성인 성 이 공격을
받으니... 서생 왜성에서 급히 달려온지라 식량이나 탄약 이 부족하고 미처 수성준비를 못했습니다.
울산 도산성의 치명적인 약점은 "우물" 이 예루살렘성의 기혼샘 처럼.... 성 밖에 있는게 문제
라! 축성을 시작한지 겨우 한달 보름 되었으니, 히스기야왕 처럼 미처 수로를 성안으로
파지 못했던지라 포위당해 물이 없자.... 말의 피와 소변 으로 연명하는 처참한 지경 이었습니다.
명군 4만 3천에 조선군 8천 승병 2천등 5만 3천명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6천을 공격한 평양성
전투 처럼 명나라 대포 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는데..... 포탄에 성벽이 무느져도 왜군은
조총을 쏘고 육박전을 하며 목책을 새로 세우는 등, 열흘 가까이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해
갈증으로 탈진한 상태 치고는 믿을수 없을 정도로 투혼을 발휘해 결사적으로 "성을 사수" 합니다.
14일간에 걸쳐 벌어진 참혹하고 처절한 전투 에서 가토군은 며칠간 물 한모금 도 마시지 못해 갈증
에 눈이 뒤집힌 상태에서도 아귀야차 처럼 싸웠으니..... 부하 상당수가 전사하고, 목이
탔던 쓰라린 기억 때문 일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귀국 후 여기에 구마모토성 을 축성
하면서 외성과 내성에 2중으로 해자 를 두르고는 성내에는 무려 120개나 되는 우물 을 파게 됩니다.
울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히젠(사가)의 나베시마 나오시게 를 총대장으로 하는 모리, 호소카와 등 8만의
구원군 이 양산에 주둔한 명군 2만을 격파하고 내륙에서 울산성으로 진격하고..... 바다에서도
구키등 왜수군이 보급 을 대자 조명연합군은 대패하여 무수히 죽고 멀리 경주까지 허겁지겁 달아납니다.
이때 우복 정경세 는 선조의 명 을 받아 양호에게 줄 격려문을 휴대하고 안동 까지
왔다가 "아군이 참패했다는 소식" 을 듣고 낙담하여 벽에 "시" 를 남겼으니....
차라리 잠 깨고 싶은 마음이 없나니
하늘은 과연 누굴 미워하는가
군사들이 이리 자주 후퇴만 하니
어느날에 우리나라 중흥되려나
온천하에 영웅다운 사람 적어서
산하에는 원통한 한 더 불어나니
난간에 기대 임금계신 북쪽을 보며
한밤 내내 주룩주룩 눈물 흘리네
그후 1598년 9월 4로 병진 2차 전투 로 명나라 총병 마귀는 4만으로 재차 울산성 을 공격하는데 이번에는
준비가 된 가토군에게 조선군 대장 선거이가 전사 하는등 고전 합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
8천이 지키는 사천 선진리성을 공격한 명군 동일원 3만 7천과 조선군 정기룡 2천 2백등 4만 연합군이
대패 하고.... 시마즈씨가 명나라군과 조선인 코를 1만여개나 베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후퇴하는 것 이지요?
울산 전투에 참가한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 는 귀국후 울산 전투 상황을 기술하여 오오키가 그린 병풍
그림 이 사가현 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토와 나베시마씨는 히데요시 사후 귀국해 1600년에
동서 20만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關ケ原)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가담해 승전 합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구마모토성은 입구에 사무라이 2명 이 완전 무장으로 서서는 관광객들을
기쁘게해 주었는데 미나미 오테몬성루를 들어서니 또 갈지자 형태로 구불구불 돌아가며
축성했으니.... 천신만고 끝에 진공한 공격군은 또다시 3면에서 화살비와 조총 공격을
받는데, 성문을 지나 오르니 우뚝 솟은 엄청 높은 5층 천수각 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 합니다!
문을 통해 위로 올라가니, 어째 단조롭다 싶었더니..... 여긴 소 천수각 이라 전망만 구경하고는
다시 2층 까지 내려와 다시 대 천수각 을 찾아가는 데..... 천수각이 박물관 으로 개방
되는 관계로 성의 미니어쳐 모형도 와 무사의 장비에 생활도구 등 많은 유물을 볼수 있습니다.
5층에서 바라 보는 전망 도 훌륭한데, 천수각을 내려와 별도 건물인 혼마루 어전 에 들러서는 다실
스키야 에서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니....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수습하여 일본 통일 꿈을 키우던
오다 노부나가 는 히데요시에게는 서쪽 효고현의 다카마쓰성을 공격시키고 시바타 가쓰이에에게는
동쪽 후쿠이를 공격하도록 했는데, 교토 혼노지에서 부하 무장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죽습니다.
히데요시는 다카마쓰성에 댐을 2개 만들어 물을 가둔후 상부 댐을 트뜨려 다카마쓰성을 공략중 교토에
심어둔 심복으로 부터 정보를 얻자 부하들은 한시바삐 철군 하자고 간언했지만 그는 우리가 유리한데
철군하면 적들이 변고가 있는가 의심 한다며 길을 차단하고는 배를 타고 성을 넘어 들어가 항복받은후
급속 행군으로 히메지성에서 재물을 풀어 백성들의 인심을 산후 교토로 진격해 주군의 원수 를 갚습니다.
1582년 6월 교토에서 후계자인 장남 오다 노부타다까지 죽은지라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 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전쟁을 벌이니 대치중에 히데요시는 후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주력을 이끌고 철수 하니
기세가 오른 시바타군은 시즈가타케로 진군하자 히데요시는 산악지대 52km 를 불과 5시간 만에 주파
하는 신공을 발휘하는데, 마을에 교섭해서 주민들이 햇불을 들고 길안내를 하고 물과 주먹밥 을 준비해
먹으면서 달렸다는데, 갑자기 히데요시의 대군이 나타나자 기겁한 시바타군은 패주하고 히데요시 승리라!
히데요시는 꾀주머니 이니 오다 노부나가가 적의 성을 공격하려고 그 앞에 성을 쌓을때 부하들은 3개월이
걸린다고 하자 그는 한달만에 쌓겠다며 책임을 맡은후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쌓아놓고 돌과 나무에
기와 및 철을 가져오면 현장에서 바로 돈을 지불 하니 순식간에 자재가 모이고, 성벽의 구간을 정해
돗내기로 바로 임금을 지불 하니..... 스노마타 이치야성 일화로 완공후 포상금을 받아 빚을 갚았습니다.
일본 이와미 은광산 이 포토시를 제치고 세계 1위 생산량을 달성하니 히데요시는 저 돈으로 임진왜란 을
일으키는데.... 그전에 저 은광산을 취하자면 길목에 자리한 돗토리성을 점령 해야 하는데, 상인을 풀어
돗토리의 쌀을 비싼 가격 으로 사들이니 성에 비축한 군량미 까지 상인의 손에 들어오자 비로소 대군을
몰아 농가에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고 농민들을 죽이자 놀란 농민들이 모두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니...
모리군의 원군이 올 길을 차단한후, 목책을 세우고 성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한채 굶겨서 성을 취했다는?
히데요시의 스승은 오다 노부나가 이니 1560년 6월, 5천 오와리국(나고야)을 스루가국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2만 5천 대군으로 인질인 17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선봉으로 삼아 공격해오자, 노부나가는 작전회의도
소집하지 않고는 술마시고 노래하니 모두 항복 하려는줄 알았는데.... 짚신 수발하던 히데요시를 적진에
보내 이마가와가 5천으로 후방인 오케하자마에 숙영한다는 정보를 받자, 즉각 출진해 2천은 자기 깃발
을 주어 대로로 진격시키고 그는 1천 결사대 로 산을 넘어 적진을 습격해 이마가와를 죽이고 승리를 합니다!
이런식으로 히데요시는 중부 일본을 장악한후 서부 일본 까지 제압하고 규슈에 상륙해 남쪽
사쓰마(가고시마) 등은 옛 영주 시마즈씨 등에게 통치를 허락했으나.... 북규슈는
히데요시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했으니, 구마모토 남부는 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구마모토 북부와 나가사키는 고니시 유키나가, 오이타는 구로다 나가마사 였던 것입니다!
이들 3명이 임진왜란때 총 9군중 제 1,2,3 군으로 선봉 이 되어 부산에 상륙해 조선을 세길로
나누어 북진해 스무날 만에 서울에 입성 했던 것이지요! 조선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 가 되어 명을 치고자 길 안내 를 했다고 의심 했으니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20일 거리인데 그 20일만에 함락 됐기 때문입니다? 전투는 없었다?
조선과 통상 으로 살아가던 대마도주의 장인이자 상인 출신 “고니시 유키나가 는 전쟁을 반대하고
화평 을 주장” 했으니 대마도주를 통한 화평노력이 실패해 전쟁이 터진 후에도 제1군으로 북상
하면서 포로로 잡은 울산 군수와 조선 선비 및 역관 들을 차례로 보내 조선 조정과 접촉 을
시도하는데.... 훗날 양국의 국서를 위조해 가면서 까지 전쟁을 화평교섭 으로 끝내고자 애를 씁니다.
이순신 판옥선 25척에 비해 30척을 보유한 부산 경상좌수영 박홍 이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하고
대포를 바다에 처넣고 배를 불사르고 수군을 해산 한후 도주했으며, 경상좌병사 이각과 우병사 조대곤
역시 도주하는데.... 1군 고니시는 부산에 무혈 상륙 후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각각 반나절도 안돼 서너시간
만에 함락 한후 포로로 잡은 울산 군수 이언성을 조선 조정에 보내나 처벌을 두려워한 군수는 도주해 버립니다.
반면에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 “가토 기요마사 는 이를 눈치채고 화평을 반대 하며 임금 선조를 붙잡아
조선을 완전히 굴복” 시키려고 생각하는데.... 우희수다가가 임금 선조를 추격하는 권리를 서울에
먼저 입성 하는 장수에게 주기로 하자 극심한 경쟁을 벌이는데, 한강방어군 김명원과 서울 수비대장
이양원이 도주하는 바람에 전투없이 고니시는 동대문으로 가토는 남대문으로 서울에 무혈 입성 합니다.
왜군은 서울 입성시 처절한 전투 를 각오했으나 임금과 대신은 물론 군사가 한명도 남지않고 모두 도망친
후라 총알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무혈점령 했으니!!! 선조 임금이 개성을 거쳐 평양 으로 도망친 것을
확인하고는 고니시 유키나가 와 가토 기요마사는 멱살잡이 까지 하며 서로 선봉(평양행) 을 다투게 됩니다.
꾀주머니 고니시 가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중재한 “제비 뽑기에서 술수를 부려서 또 선봉” 을
차지하고 평양으로 진격 하니, 분을 삭이지 못한 가토 기요마사 는 함경도로 진군해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포로 로 잡고 두만강 건너 여진족땅까지 침입해 분탕질 을 벌였던 것인데....
임진강에서 달아났듯 평양에서도 윤두수와 김명원은 대포를 연못에 버리고 전투 없이 도주합니다.
선조는 남도근왕군 6만 이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1,600에 대패했다는 소식에 낙담해 의주로 떠났고
고니시가 입성했는데, 만일 가토 기요마사 였다면 청천강을 건넜을 것이고 선조는 명나라로 달아났을
것이라? 와키자카 는 기고만장해 부산에 내려와 전공을 독식하려 도도, 구키, 가토, 구와야마등 9명 수군
장수들을 모두 따돌리고 해적 넷을 모아 잡군으로 나왔다가.... 한산도 해전 에서 이순신에게 몰살 당합니다.
평양을 무혈 점령한 고니시는 북진을 멈춘후 화평교섭 을 시작하니 심유경은 고니시를 속여 시간을 번후...
영하 전투를 마치고 3천리를 달려온 이여송의 명군 4만 3천에 조선군 8천과 승병 3천등 5만 4천은
여름옷으로 평양의 겨울 강추위에 절반은 동상에 걸린 고니시군 1만 6천의 평양을 탈환하고 기병만
이끌고 남진하다 개성 벽제관에서 왜군의 매복에 걸려 이여송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패주 하게 됩니다!
명나라는 전의를 상실 하고 화평교섭 에 들어가 해로가 막혀 보급이 차단돼 궁지에 몰린데다가
여름옷으로 겨울을 날수 없는 왜군은 식량 도 없으니명군과 합의하에 서울에서 철수합나다!
이 모든게 고니시의 술수 라고 생각한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에 성을 쌓고 기회를 노리다가
1597년에 재침하니 바로 정유재란 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 바람에 결국 철군합니다.
어린 히데요시 아들의 자리를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발톱을 드러내자 히데요시의 총신 미쓰나리가
서군 을 일으키는데....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인 가토 는 간첩 요시라 사건 에서 자기를 죽이려 했던
고니시가 밉고 거기다가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에게 자신을 참소해 소환당해 처벌을 받을뻔 했으니
도쿠가와의 동군에 가담했고 결국 도쿠가와가 승리하고, 히데요시 가문과 고니시는 멸망 했던 것입니다.
20만석 영주 가토는 고니시 근거지를 침략해 54만석 번주가 되어 그 재력으로 구마모토성을 축성한 것인데
그 영화는 자식대에 이르러 도쿠가와 막부의 의심을 받아 영지가 몰수되고 유배 당하니.... 구마모토성은
고쿠라의 번주인 호소카와씨 에게 넘어가고, 막부는 요충지 고쿠라는 일족인 마쓰다이라씨를 임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