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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옥천사(玉泉寺), 지리산쌍계사 雙磎寺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지리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관장하는 말사는 43개이며, 4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쌍계사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723년(성덕왕 23)에 의상(義湘)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하였다.
그리고 한라산·금강산 등을 두루 다녔으나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하다가,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르렀다. 그곳이 꿈에 지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그 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중국에서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하였다.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50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된 명부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팔상전, 노전(爐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호로 지정된 적묵당(寂默堂),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3호로 지정된 설선원(說禪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나한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육조정상탑전과 청학루(靑鶴樓)가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된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된 금강문(金剛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일주문·대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7호인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 보물 제380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925호인 팔상전영산회상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인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인 불경책판이 있다.
대공탑비는 885년(헌강왕 11) 헌강왕이 입적한 혜소(慧昭)에게 진감(眞鑑)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어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887년(진성여왕 1)에 완성되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첫째로 꼽힌다.
이밖에도 육조혜능의 초상화를 안치한 7층의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로 지정된 마애불(磨崖佛)과 아자방(亞字房)의 터가 있다.
절에서 500m 거리의 암자인 국사암(國師庵)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았다는 천년이 넘은 느릅나무 사천왕수(四天王樹)가 있고, 신라의 원효(元曉)와 의상이 도를 닦았고 1205년(희종 1)보조국사(普照國師)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현재 이곳에는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쌍계사부도(보물 제380호), 쌍계사대웅전(보물 제500호), 쌍계사팔상전영산회상전(보물 제925호)과 일주문, 천왕상, 정상탑, 사천왕상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등 부속암자가 있다.
지리산 쌍계사는 서부 경남일원의 사찰을 총람하는 조계종 25개 본사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그 가치가 크다.
華嚴寺
1. 개요[편집]전라남도 구례군에 위치한 사찰.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전국의 사찰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거대한 중층 금당인 각황전으로 유명하다. 화엄사에는 이 각황전과 돌로 된 석등과 사자석탑, 불화 4 가지의 국보를 가지고 있다. 이름과는 달리 화엄종이 아니라 조계종 소속이다. 참고로 화엄종의 본산은 인천 남동구 간석동 만월산에 있는 약사사.
2. 역사[편집]화엄사가 위치한 구례군이 현재 전라남도에 속해 있기 때문에 화엄사가 백제와 연관된 것으로 많이 오인되고 있는데, 사실 화엄사는 신라의 고승들에 의해 창건되고 발전한 절이다. 사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지역은 원래 가야의 영토였고,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잔여지역을 신라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 애초에 절을 창건한 사람이 진흥왕의 총애를 받던 신라 고승 연기조사다. 진흥왕은 당시 새로 편입된 이 지역에 화엄사를 세움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지역 유화정책과 신라 불교 고유의 중요한 특징인 호국불교사상과 연관되는데, 실제로 화엄사는 화랑의 정신교육 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544년에 신라의 고승 연기조사[2]에 의해 창건되었다. 절 이름은 화엄경[3]의 두 글자를 따서 붙인 것. 선덕여왕 12년(643)에는 자장법사[4]가 화엄사를 증축하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7층탑, 석등롱(石燈籠) 등을 지었다.
화엄종을 개창한 원효대사는 화엄사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쳤다.
문무왕 때인 677년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긴것을 화엄사에 보관하도록 했다.[5]
경덕왕(742~764)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다.
헌강왕 1년(875년)에 도선대사[7]가 다시 증축했다...야 유명한 승려들 많이 나온다(...) 아무튼 이렇게 절이 쭉쭉 크며 잘 나가던 시기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시기인 선조 26년(1593)에 왜병의 습격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고 1630년부터 7년을 걸려 재건하였다. 절이 타버리자 뿔뿔히 흩어진 승려들은 산과 동굴에서 은신하다가 1630년에 다시 모여 이 절의 폐허를 본 뒤 분개하고는 이 '대화엄종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하고 절을 재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나마 한 번에 다 못하고 대웅전과 기타 건물은 1636년에, 각황전은 1703년에서야 재건이 완성되었다.(각황전을 1643년에 완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웅장하게 잘 재건했는지 숙종 27년(1701)에 화엄사를 선교양종[8]의 대가람[9]으로 하였다고 한다.. 킹 오브 절이라는 이야기.
한국 전쟁때 "적들이 숨을 수도 있으니 화엄사를 불태우라"라는 명령을 받은 차일혁 초대 경찰 총경이 "태우는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며 문짝만 모두 떼어 태울것을 건의하여 살아난 이야기가 유명하다.
조계사 대웅전의 현판 편액 글씨는 바로 이 화엄사 대웅전의 편액을 탁본으로 복제해 가서 만든 것인데, 글씨는 선조의 여덟째 아들인 의창군 이광의 것이라고 한다.
각황전 외에도 원통전이나 대웅전 등 크기는 작지만 좋은 건물이 많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메인 전각이지만 오히려 각황전에 인지도가 밀려버렸다. 또한 석물들도 국보급들이 많으니 하나 하나 그냥 지나치지 말 것.
보통은 각황전 주변과 국보들만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꼭 각황전 남쪽의 계단 위로 올라가서 효대와 구층암이란 곳을 보는게 좋다. 웅장한 화엄사와 다르게 아담하지만 자연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독특한 건물로 사랑받고 있다. 한국 건축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이 본질이라고
구층암의 독특한 기둥. 저게 뭐죠? 뭐가요. 저거 기둥 말이에요. 모과라구요.
아무튼 화엄사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국보가 있다.국보 제67호이다. 본래 이름은 장육전이다. 각황(覺皇)이라는 말은 부처의 별명으로,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이다. 화엄사 대웅전보다도 더 크며, 크고 아름다운 정도가 대단해서 전국에서 손 꼽힐만한 중층 사찰 건물이다. 누각은 아니기에 2층은 없지만, 천장이 아주 높아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주 높고 두꺼운, 그것도 심하게 휜 통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진 기둥들 여러 개가 놓여진 모습도 인상적이다. 천장의 형태도 인상적인데, 가장 중심에 있는 천장은 바닥과 평행하게 놓여있지만 외각의 천장들은 지붕을 따라 비스듬하게 각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천장은 빗천장으로 부르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는 어려운 형태다.
불타기 전 원래의 장육전에는 이름대로 석가 여래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부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하기 때문에)하고 있다. 본래 건물은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가 3층 구조에 정면, 측면 7칸(쉽게 말하면 건물의 기둥 사이의 공간이 한 칸이다)의 규모로 건립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도중 왜병의 습격으로 이 절과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불상 역시 사라졌다. 원래 각황전 외벽은 석벽이었고, 화엄경문 글자 10조9만5048언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것 역시 이 때 깨어졌다고 한다.
이후 다른 건물은 인조14년(1636년)에 다시 복구하였지만, 각황전 건물은 그 규모 때문에 숙종 25년(1699년)에야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 29년(1703)년에 완성하였다.(인 12년(1643)에 재건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상량문을 보면 이에 동원된 인부는 3,015명으로, 왕족도 조력했을 정도로 큰 공사였다.[10]
이후 영조 44년(1768)년에 자운선사가 수리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인부가 980명 동원되었다. 헌종 13년(1847)에는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벽도 쓰러지려 하는 등 큰 손상을 입어 어사에게 요청을 하여 수리를 했다고 한다. 이후 광무 22년(1885)에도 수리한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는 기둥이 내려앉아 건물이 기울고 지붕이 파손되어 조선총독부에서 해체수리를 하게 된다. 36년부터 준비하여 41년까지 수리하였고, 총감독은 유명한 한국 고건축 학자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 해체 당시 마루널을 벗겨내었더니 신라시절의 건물 초석이 있었고, 검게 그을린 임진왜란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석 사이의 전돌역시 산산조각 나있었고, 뒷벽과 좌우 벽을 가득 채운 화엄경석의 산재된 작은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 의상의 필적도 검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고..
근대에 와서 원래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각황전으로 가져다 놓은 사진이 있는데, 그 전까지는 각황전에 불상이 없던 것인지 교체를 하거나 추가한 것인지는 확인바람.
현재의 각황전은 높은 기단 위에 서쪽을 바라보고 서있다. 정면 7칸(26.8m), 측면 5칸(18.3m), 높이 15m로 사찰로써는 상당히 크지만 역시 경복궁 근정전보다는 작다. 칸 수는 더 많기 때문에 가끔 근정전보다 크다는 잘못된 소리가 나온다. 천장도 특이하게 처리한 편이다.
본래 각황전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천은사 창건과 역사
남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절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낙 광대한 지리산자락이라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지금은 노고단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절앞까지 이어져 있고 화엄사까지 직통하는 도로가 놓여 있어 어렵지 않게 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독특하고 운치 가득한 수홍문을 건너 절을 찾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합니다.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그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더 없는 보람일 것입니다.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해석하여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 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하여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2)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고, 1749년(영조25)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1774년(영조50)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
※ 각황전 중건 설화
장육전 중건불사를 마음으로 결심하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계파 선사는 문득 지난 밤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지난밤 비로소 잠깐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 하얀 옷을 입은 신령스런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 계파[16]여! 그대가 지금 세운 장육전 중건불사에 대한 대발원은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라. 그렇게 큰 일을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를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려면 대웅전에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빼보았을 때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가 능히 될 수 있을 것이니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계파여!"
이렇게 말을 마친 신령스런 노인은 문득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눈을 번쩍 뜬 계파 선사는 이상스런 꿈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날짜를 짚어보니 마침 다음 날이 드디어 백일기도 회향일이었다. 자신의 백일기도에 드디어 부처님이 답을 주신 것을 알아차린 계파 선사는 묵묵히 그 꿈에서 준 계시를 실행하여 장육전 중건 불사를 할 수 있는 화주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파 선사는 대중 스님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자 대웅전 마당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산내 스님들과 대중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한 계파선사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대웅전에 차려놓고 차례차례 스님들이 들어가 먼저 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은 다음 그 물 묻은 손을 다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넣어 하얀 밀가루가 묻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벌써 열 댓명의 스님들이 그렇게 해보았으나 손에는 하얀 밀가루가 묻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구름처럼 많은 스님들이 마당 가득 줄줄이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끊고 맑고 밝은 부처의 마음을 깨달아 고통 지옥에 시달리는 중생 구제의 대원력을 세우고 출가한 수행자들이기에 누군들 장육전 대불사의 화주를 맡을 주인공이 결코 없지는 않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여대중을 넘는 산내의 모든 사람들을 다 실험해 보았으나 화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의 빛이 얼굴 전면에 감도는 계파선사는 자신의 장육전 중건불사를 위한 백일기도가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리는가 하고 깊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실험을 아직 안 한 누가 없을까?'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헤아려보는 순간 공양간 앞에서 중년의 공양주 보살이 캐온 봄나물을 다듬고 앉아있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에게 일러 나물을 다듬고 앉아 있는 공양주보살을 불러오게 했다.
계파선사의 말에 공양주보살은 마다하지 못하고 대웅전으로 들어가 먼저 물 묻은 항아리에 손을 푹 넣었다. 그런 다음 물 묻은 손을 그대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푹 넣었다. 그리고는 그 넣은 손을 대중스님들 앞으로 내밀었다.
"아! 이럴 수가……."
"밀가루 하나 묻지 않았다니!"
대중스님들이 공양주보살의 손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화엄사 공양간에서 오직 밥 짓고, 나무 해 불 때고, 나물 캐 나물 만들고, 국 끓여 올리고 설거지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런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대불사의 화주가 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이적입니다. 이로써 장육전 중건불사의 대화주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정해진 것입니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들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선사님 저는 아닙니다. 일자무식인 저는 오직 밥밖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거두어 주소서 선사님!"
파리하게 얼굴이 질린 공양주보살은 계파선사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양주보살님이 10년을 공양주로 열심히 일한 복력이 천여 대중스님들보다 뛰어나니 이렇게 오늘의 실험에서 신비로운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실험한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보살님께서 꿈에 나에게 지시한 것이니 공양주보살님을 화주로 선택한 것은 바로 문수보살님입니다. 그러니 이제 대시주자를 얻어 장육전 중건불사를 잘 이루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계파선사는 공양주보살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대중스님들도 공양주보살이 화주로 정해진 것을 알고는 공양주보살에게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의 중임을 맡기게 되었다.
꼼짝없이 그날 화주의 중책을 맡은 공양주보살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직 밥 짓고 부처님 앞에 조석으로 공양 올리는 일밖에 모르는 자신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장육전 대불사의 책임을 맡다니 자다가도 기절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화주로 정해진 바에야 어떻게든 부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엄하신 계파선사가 화주 소임을 딱 맡겨버린 판이라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저녁 공양을 지어 올리고 공양시간이 끝나자 공양주보살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았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 소임으로 맡은 화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맡은 바 소임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자꾸 머릿속으로 되뇌며 기도를 하는 공양주보살의 눈꺼풀이 어느덧 스르르 감겨 내렸다.
그러더니 그 눈앞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홀연 나타나는 것이었다.
"공양주보살, 그대는 화주를 맡은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아침 일찍 화주 소임을 실행하러 길을 떠나거라. 그리고 길을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거라. 알았느냐!"
공양주보살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노인은 없었다. 대신 부처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촛불 앞에서 반짝이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내일 아침 길을 떠나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고? 아! 이는 지리산의 주인인 문수보살님의 현몽이구나.'
공양주보살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친 후 비로소 화주 소임을 위해 길을 떠났다. 꿈에 노인의 말처럼 길을 가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무조건 붙잡고 장육전 대불사의 시주자가 되어 달라고 다짜고짜 부탁을 할 참이었다. 사실 그 방법 외에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의 좋은 방법도 없을 듯싶었다.
맑은 지리산 물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길 따라 내려가면서 공양주보살은 진달래 꽃이 피고 진자리에 파릇하게 돋아난 새순들을 바라보면서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며 여러 생각들을 자유로이 해보았다.
어젯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했으니 사실 그 일도 다 풀린 일이 아닌가. 적어도 천석지기나 만석지기 큰 벼슬을 사는 대감을 만나게 되어 무사히 일이 풀리게 되겠지하고 낙관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길을 가는데 진짜 멀리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이제 저 사람이 장육전 불사를 해 줄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훌륭한 시주자이겠거니 하고 공양주보살은 들뜬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가갔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다가가던 순간 공양주보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공양주보살은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공양주보살 앞에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누더기를 걸친 거지 할머니였던 것이다. 화엄사 앞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가끔씩 화엄사 공양간에 와서 나물도 캐주고, 불도 때주고, 잔심부름을 거들어주면서 한 끼 공양을 얻어먹고 가거나 누룽지나 과일을 얻어가던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거지 할머니였다.
돈 많고 권력 많은 대 시주자를 만나겠거니 했는데 저런 거지 할머니라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머리가 어지러워진 공양주보살은 그 자리에 짚단처럼 맥없이 풀썩 쓰러질 지경이었다.
절망의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공양주보살은 지난밤 꿈만을 믿고 안되겠다 싶어 다짜고짜 엎드려 말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우리 화엄사 장육전을 크고 훌륭하게 지어주소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이제 실성을 했나보네 그랴. 새로 장육전 불사를 한다고 계파선사님이 그러시더니 이제 아주 실성을 했어 그랴!"
"아닙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장육전을 새로 짓게 시주를 해주옵소서!"
거지 할머니가 그 말을 들으며 보니 공양주보살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거지 할머니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말했다.
"지리산의 문수보살님이시여!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면 장육전 불사를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저에게 가피를 내려주소서!"
거지 할머니는 수십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외더니 순간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지리산 깊은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 거지 할머니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스라이 저 아래로 몸을 던졌으니 죽었을 게 틀림없었다. 공양주보살은 어쩌다가 장육전 화주가 되어 애매한 생목숨 하나를 죽게 하였구나 생각하고는 큰일이다 싶어 마구 달아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새 육 년이 지났다. 한양 땅으로 도망가 주막집에서 막일을 하고 살던 공양주보살은 어느 부인의 심부름으로 창덕궁 앞에 나가게 되었다. 손님 하나를 만나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침 궁 안에 살던 어린 공주가 유모와 함께 창덕궁밖에 나와 놀고 있었다.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하는 어린 공주는 길가를 아장아장 달려 다니며 뛰어 놀았다. 그 옆에 서있던 공양주보살은 그 어린 공주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린 공주가 공양주보살을 알아보고 낡은 옷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우리 공양주보살님!"
그 어린 공주의 눈빛은 정말 공양주보살을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며 그 어린 공주를 안아 주었다. 그런데 이 어린 공주는 이상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이 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린 공주의 손을 공양주보살이 만지자 그대로 펴지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공주의 펴진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써져 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숙종대왕에게 전해졌다. 숙종은 공주를 낳고 손이 펴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몹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양주보살의 손이 닿자 펴지고 그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는 것을 보고는 그 내력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숙종은 공양주보살을 곧 내전으로 불러 들였다. 숙종 앞에 나선 공양주보살은 절을 올리고 나서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참으로 장하도다! 거지 할머니의 진실된 원력이 결국 공주로 환생하게 하였구나! 내 공주를 위하여 모든 비용을 내겠도다!"
숙종은 감격하여 말했다. 그러면서 장육전 중창을 할 비용을 바로 하사하였다. 장육전이 완성되자 숙종은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각황전이라는 사액의 뜻은 부처님을 깨달은 왕,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양주보살은 각황전 건물이 완성되는 날 먼 옛날 그 거지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혼자만 아는 깊은 미소를 짓고 물끄러미 각황전 처마 위로 펼쳐진 지리산과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여기서 숙종에게 공주가 없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는 것이 예의[17]
법철스님에 따르면 공양주보살은 거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관아에 쫓겨 청나라까지 흘러가게 되고 저 공주는 청나라 강희제의 딸이라고 한다. 강희제가 시주를 하고 숙종 임금이 도왔다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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