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20cm, 높이 16cm, 폭 16cm의 잿빛 청석입니다.
아무런 특별함이 없는 듯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그 자체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돌입니다.
청오석처럼 이 잿빛 청석도 물을 머금으면 검은 빛을 띱니다.
그러나 청오석이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표면을 가진 데 비해, 잿빛 청석은 거칠고 투박한 거죽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칠지만 어딘가 정겨운 질감은, 마치 오래된 동산처럼 푸근한 인상을 줍니다.
그 밑자리 또한 놀랍도록 평평해서, 그것이 이 돌이 지닌 본질적인 안정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토록 거칠고 불완전한 돌에 마음이 끌리는 걸까.
과거에는 세상과 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모두 그들의 문제라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혹은 그녀가 나를 올바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이 흔들리는 거라며 탓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격정의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세상과 관계에 대한 시선을 잠시 거두고, 나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돌처럼 나도 시간이 흐르며 다듬어졌습니다.
격렬한 물살에 깎이고, 때로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부드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나는 격정의 시간을 뒤로하고 수렴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나는 오래전에 쓰여진 대본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합니다.
이 대본은 내 기억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때로는 지금의 현실에 뒤처지는 순간도 많습니다.
나의 삶은 업데이트가 늦는 오래된 프로그램 같고, 심지어 가끔은 심각한 버그가 발생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 버그는 내 안의 오래된 사고방식, 즉 과거의 논리와 사고체계가 현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나는 그 논리로 현재의 직소 퍼즐을 억지로 맞추려 하지만, 퍼즐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 자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지체시키고, 창의적인 시도에 퇴짜를 놓는 것은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만든 합리화일 뿐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가 항상 이성적이고 논리적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었습니다.
가끔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 상태를 수용하는 능력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관심을 잠시 꺼버리고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상황이 자연스럽게 정리된 적도 많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운이 좋았습니다.
혹은 내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감정은 단조롭고 평화롭습니다.
예전처럼 격렬한 기쁨이나 슬픔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마치 잔잔한 강물처럼 천천히 흐릅니다.
이런 나의 기질은 아마도 지난 수십 년 동안 겪어온 크고 작은 실망의 유산일 것입니다.
강물이 깊은 협곡을 만들듯, 나의 사고방식도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시련과 고난에 깎이고 다듬어져 지금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종종 묻습니다.
나의 본성이 원래부터 싱거운 것이었을까,
아니면 세월이 끊임없이 물을 부어 끓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점점 더 싱거워진 걸까.
만약 내가 어느 순간 물을 붓는 것을 잊고 끓이기만 한다면, 즉 나의 경험과 사고가 더 이상 유연하지 못한 상태로 굳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치매나 중병이 찾아왔을 때, 나의 삶이라는 죽은 얼마나 짜고 걸쭉해질까.
그 생각에 마음이 잠시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가벼워집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잿빛 청석을 바라보며, 나도 이 돌처럼 단단하고 고요하게, 때로는 물을 머금어 검게 빛나는 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어딘가 푸근한 그 모습으로,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돌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