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6일 한미우호협회의 한철수 회장(예비역 대장)과 전인영 편집위원은 전쟁기념관으로 백선엽 장군 님을 방문하여 한국전과 휴전 후 공직활동에 관한 귀중한 체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첫 번째 인터뷰 글(임진강・봉일천 방어전 및 다부동 전투)과 두 번째 인터뷰 내용은(평양입성과 운산후퇴) 후퇴・방어・반격 등 전투중심의 체험담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세 번째 인터뷰는 사범학교 및 봉천 군관학교 교육, 대한민국 창군 참여, 전쟁 초 1사단의 방어전, 전쟁 중 한국군 증강 계획 , 반공포로석방, 아이젠하우어 면담 및 1960년 5월 31일 전역 후의 공직활동관련 경험과 일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다음은 백 장군 님이 밝히신 자신의 인생체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920년 11월 23일 생으로 9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백 장군의 목소리는 힘과 위엄이 넘쳤고, 기억력도 놀랄 만큼 생생했다. 자신의 군 생활 및 공직활동에 관한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제한된 시간 내에 자세한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 하셨다. 백 장군의 경험담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백선엽 장군과 한철수 회장은 대만 대사 근무시절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한 회장은 2006년 12월 성우회 회원 13명이 미 국방부를 방문 했을 때, 자존심 강한 럼즈펠드 장관이 직접 나와서 백선엽 장군을 맞이했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을 4성 장군으로 유지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고 한다.
백 장군은 한국군 제3군단(3사단과 9사단)이 1951년 인제군 현리에서 패한 수모를 교훈 삼아, 밴프리트 8군 사령관의 한국군 교육과 훈련 및 조직을 위한 노고를 치하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양양 소재 군사 학교에서의 전술공부, 10만 명 규모의 모슬포 훈련소 설립, 4년제 사관학교 설립 등을 포함했다.
백선엽 장군은 참군인의 모델이고, 한국인의 자랑이며, 귀감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낳은 영웅으로, 국내외로부터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백 장군은 위기상황에서 주어진 임무와 책임을 기필코 완수하는 용장이며,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하는 지장이고, 남에게 겸허하며 믿음을 주고 배려할 줄 아는 덕장이다.
교사보다 군인의 길 선택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인 백 장군은, 아버님을 여윈 후, 어머님과 누님 및 동생 백인엽과 함께 평양으로 이사했다. 가족은 대동강 남 쪽 신리에 주거지를 마련했다. 총명하고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던 백선엽은 5년제 평양사범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1940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이어서 1941년 12월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위로 근무했다. 그가 군인의 길을 택한 큰 이유는 당장 교사가 되기보다,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원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만주국 장교로서의 생활은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대일 선전포고와 관동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로 끝났다. 백선엽은 만주로 간지 5년만인 1945년 9월 중순 경 평양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장이던 이종사촌의 권유로 비서실 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조선민주당 공식 창당일 11월 3일 이전부터, 조만식 선생의 민족진영 세력은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1945년 12월 17일 소련 군 당국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 김일성을 앉히는 등 북한의 소비에트 화를 적극 추진하면서, 민족주의 및 보수주의 세력은 설 곳을 잃고 38선 넘어 남하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대한 5년까지의 신탁통치를 결정한 12월 27일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해 민족진영 등이 반대하자, 소련 군 당국은 조만식 선생을 체포 하는 등 노골적 탄압으로 나왔다. 동생 백인엽이 남으로 떠난 지 열흘 후인 1945년 12월 28일에, 백선엽과 김백일 및 최남근 3인은 38선을 넘는 월남 행을 결행했다.
초고속 승진의 건군시절
연고가 없는 서울에 도착한 백선엽은 남한에서 군인의 길을 택했다. 1946년 2월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그는 9월에 부산 소재 제5연대 제1대대장이 되었다. 몇 달 후인 1947년 1월 1일 중령진급과 함께 제5연대장이라는 과정을 거쳐, 12월 1일에는 대구의 제3여단 참모장 발령을 받았다. 1948년 4월 11일에는 통위부 정보국장(국방경비대 정보처장 겸직)이 되었고, 그 해 11월 1일 28세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48년 7월 30일에는 제5사단장,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에는 29세에 제1사단장이 되는 초고속 진급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초고속 승진은 현 상황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당시 그토록 빠른 승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건군 초창기의 특수성과 긴장된 한반도 정세 및 군관학교 출신이라는 점들이 고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 지휘관으로서의 뛰어난 지휘통솔능력과 고귀한 인품이 초스피드 승진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한국전에서 입증된 탁월한 지휘통솔력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백선엽 장군은 영웅이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유능하고 겸손한 한국군 지휘관으로 기록되고 말았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은 여러 차례 그의 생존을 위협했으며, 한없는 고통과 희생을 강요했다. 그렇지만 전쟁은 도전에 굴하지 않은 그를 전쟁영웅이며 존경의 대상으로 변모시켰다.
백 장군은 제1사단장으로 부임한지 2개월 만에 전면 남침사태를 맞았으나, 그의 전략적 비전과 준비성이 파국을 면하게 만들었다. 그가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지휘관 과정을 밟기 시작한지 열흘 만에 전쟁이 터졌다. 6월 25일 전화 밸 소리에 잠이 깬 그는 작전참모로부터 적의 공격으로 전방이 대혼란에 빠지고 개성이 적에게 떨어진 것 같다는 다급한 보고에 접했다. 그는 수색 사단 사령부에서, 12연대와 통신이 두절되었고, 문산 쪽 13연대는 교전 중이며, 예비로 수색에 주둔했던 11연대는 진지투입 중이라는 현황을 들었다. 사단 병력 절반가량은 외출・외박 중이었다.
열세의 제1사단이 어떻게 파주-봉일천에서 사흘이나 버틸 수 있었느냐고 묻자, 백 장군은 ‘임진강과 포병’ 때문이라고 겸허히 대답했다. 실은 백 사단장의 선견지명과 사전 조치들이 주효 했었다. 그는 인천 주둔 예비연대를 수색으로 이동시켰고, 학생 등의 도움을 받아 참호 진지를 구축해 놓았으며, 정비를 위해 개성의 포병부대를 수색으로 옮겨 놓았고, 횡으로 늘어선 배치를 예상되는 침투로 중심으로 재조정했었다. 제1사단이 사흘
동안 사투를 벌리며 버텼던 것은 백 장군 말대로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 덕이지만, 그의 탁월한 지휘통솔 없이는 성공이 힘들었을 것이다.
백선엽 장군의 출중한 지휘통솔력은 여러 곳에서 빛을 발했고 나라와 겨레를 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50년 8-9월의 다부동 전투와 전선돌파, 10월의 북진과 평양입성, 11월 1일의 극적인 운산 철수, 1951년 5월의 대관령 선점을 통한 중공군 공세저지, 1951년 11-12월의 공비토벌을 위한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임무수행 등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가나 과소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와 한미방위조약
중국어에 능한 백 장군은 북진 중에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심문하여 대규모 중공군 개입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군단과 도쿄 사령부 등 상부에도 보고되었다. 그는 중국어 실력 덕분에 제1군단장 시절 중공군 대표가 참석하는 휴전회담에 유엔군 측 대표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한-미 관계는 반공포로 석방문제와 방위조약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었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2만 7천 명 정도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자 미국과 공산 측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육군참모총장인 백 장군은 미국 측의 거센 항의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으나, 노련한 이 대통령은 오히려 침착하고 의연했다.
미국은 북진통일과 반공포로 석방을 주도한 이 대통령 제거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사태수습을 위해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월터 로버트슨 특사를 서울로 급파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내한한 로버트슨과 이 대통령은 18일에 걸친 회담 끝에 다음과 같은 각서 내용에 합의했다: (1) 한미안전보장 조약 체결; (2)최초 2억 달러 원조자금 공여를 비롯한 장기 경제원조 보증; (3)계획 중인 한국군 확장에 대해 육군 20개 사단과 상응하는 해・공군 설치; (4)한미양국 정부는 휴전 후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정치적 회담 중단; (5)정치회담에 앞서 한미 간의 정상회담 개최 등이었다. 그 대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수용하겠다고 양해했다.
한미방위조약 체결과정에서 백선엽 장군이 세운 공로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미국 방문 중, 백 장군은 함포로 한국군 제1군단 작전을 지원하고 휴전회담에 함께 참여했던 버크 제독의 아이크를 만나 보라는 조언에 힘입었다. 백 장군은 1952년 12월 4일 ‘대통령-당선자’ 앞에서 브리핑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아이젠하우어 대통령과의 면담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젊은 백장군은 대담하게도 미국의 ‘보장’을 요구했다.
전역 후의 분망한 공직생활
이 대통령에게 “군인으로 남고 싶다”며 장관 직 제의를 사양했던 백선엽 장군은 1960년 5월 31일 부로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사회는 다시금 그의 명성에 걸 맞는 봉사와 헌신을 요구했다. 그는 1960년 7월 15일 주중 대사(1년)를 시작으로, 3년의 주 프랑스 대사(아프리카 13개국 대사 겸임), 그리고 1965년 7월부터 주 캐나다 대사로 4년 4개월 근무했다.
1969년 10월 21일 백 장군은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14개월 봉사했다. 그의 교통부 장관 재직 중인 1970년에 요도기 사건이 발생했다. 백 장군에 의하면, 야시모토 일본 운수상이 인질석방을 도와준 한국 정부에게 무엇이든 보답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파리 지하철을 체험한 자신이 즉각 지하철 건설자금 융자와 기술 지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 해외기금 조건은 4.2% 이자에 7년 거치 20년 상환이었으며, 기술자 10인을 파견해 주기로 했다. 이러한 한・일 경제협력 결과로 1971-1974년 기간 건설・개통된 것이 지하철 1호선이다.
1971년 6월부터 충주 호남비료 사장으로 색다른 경험을 쌓게 되었다. 배경에는 1948년 숙군시절 백 장군의 배려로 목숨을 건졌던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진흥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는 총 12년 동안 충주비료, 나주비료, 석유화학, 에치렌, 팔프 공장 등 도합 14개 공장을 운영했다. 한국종합화학 초대 사장으로도 7년 동안이나 산업화 전투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지속적이고 정력적인 원로활동
백 장군은 전쟁기념관 건립 모금 후원회회장, 성우회 회장, 6・25전쟁 50주년기념사업 위원회 위원장,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장, 육군협회 회장 등을 역할을 쉬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또한 <군과 나>, <길고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더>,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등 수많은 저서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백선엽 장군은 지난 20여 년 동안 노구를 이끌고 군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하고, 건전한 국가안보 의식 고취 및 후세대 교육을 위한 저술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해 왔다.
그는 지금도 평화무드에 젖은 한국 국민에게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한국 땅 1인치라도 거저 얻은 것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오로지 겨레와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백선엽 장군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감사의 박수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