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0)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강은 드디어 바다가 되어 하늘과 만나게 되나니!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 제4구간—③ (청량산-‘퇴계시비공원’)
▶ 2020년 08월 16일 (일요일)
청량산(淸凉山)은 퇴계(退溪) 선생이 숨결이 깃든 곳이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선생의 유적을 찾지 않을 수가 없다. 내일은 아침 일찍 출행을 해야 하므로 오늘 탐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원도 태백(太白)이 낙동강의 발원지라면, 봉화 청량산(淸凉山)은 퇴계 선생의 도(道)가 발원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내일 일정은 오직 퇴계 선생을 찾아가는 여정이므로, 오늘 청량산에서 선생의 유적을 찾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과정이다. 오늘 저녁은 도산 탐방을 위한 '전야제'와 같은 날이다.
어릴 적 퇴계(退溪) 선생은 도산의 집에서 낙동강을 따라 청량산에 계신 숙부 이우 선생을 찾아 공부를 하러 다녔다. 선생이 다니던 길이 바로 오늘 날 12km의 ‘퇴계 예던 길’이다. 봉화군에서는 이 ‘퇴계 예던 길’을 연장하여, '청량사 산문'에서 '명호'까지 강변의 탐방길을 조성하여 ‘낙동강 예던 길’로 명명하였다, … 오늘 나는 낙동강 그 길을 따라서 내려왔다. ‘녀다, 예다’라는 말은 ‘다니다, 가다’는 뜻을 지닌 옛말로, 퇴계 선생의 연시조「도산십이곡」에 나오는 ‘녀던 길’이 바로 그것이다. …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덜고’ ― 퇴계「도산십이곡」(제9곡)
옛 성현은 지금의 나를 보지 못하였고 나 또한 성현을 만나뵙지 못했다. 내가 성현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 분이 '가시던 학문의 길(참다운 삶)'이 내 앞에 있다. 훌륭한 성인이 가시던 길이 앞에 있는데 내가 아니 가고 어찌할 것인가. 옛 성인의 삶을 따려르는 굳건한 의지를 표현한 시이다.
☆… 민박촌(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에서 청량교 건너면 바로 청량산 산문(山門)에 든다. 청량교 위에 서면, 좌우로 낙동강을 마주하고 있는 가파른 절벽이 있다. 다리의 좌측은 금강대(金剛臺)이고 오른쪽은 학소대(鶴巢臺)이다. 학소대는 퇴계 선생이 쓴「도산십이곡」에 나오는 ‘청량곡’으로, 예로부터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 [청량산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 청량지문(淸涼之門), ‘퇴계시비공원’
☆… 산뜻하고 고풍스러운 청량산 산문[淸凉之門]에 들어서면, 그 오른쪽에 아담한 ‘퇴계시비공원(退溪詩碑公園)’이 있다. 시비공원의 제일 윗자리에 퇴계의 시비(詩碑)가 자리하고 있고, 그 시비의 앞과 좌우에 퇴계의 삶과 철학이 담긴 ‘새김돌’이 있다. 시비 바로 앞에는 ‘思無邪’(사무사)가 예쁜 원구를 반으로 깎은 단면에 새겨져 있고, 시비 좌우에는 ‘毋自欺’(무자기)과 ‘毋不敬’(무불경)을 화강암 원주의 단면에 새겨놓았다. 시비의 전면과 후면에 세 편의 시(詩)가 새겨져 있는데, 전면에는 ‘讀書與遊山’[독서와 유산], 후면에는 ‘渡彌川望山’[미천을 건너 산을 바라보다]과 ‘約與諸人遊淸涼山馬上作’[여러 벗과 청량산에 노닐기를 언약하고 말 위에서 읊다] 두 편이다.
* [퇴계 선생의 좌우명] — ‘思無邪(사무사)’ 그리고 ‘毋自欺’(무자기)와 ‘毋不敬’(무불경)
☆… ‘思無邪(사무사)’는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에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논어(論語)』위정(爲政) 편에서, 공자가 말씀하셨다. “시경에 나오는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 一言而蔽之曰 思無邪) 요즘에는 ‘욕심이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일컫는 말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일찍이 생전의 퇴계 선생도 이 말을, 세상에 임하는 마음의 기조로 삼으셨다.
사무사
그리고 ‘毋自欺’(무자기)와 ‘毋不敬’(무불경)은 퇴계 선생의 평생의 좌우명이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시비의 좌우에 배치했다. ‘毋不敬’은 ‘매사에 공경스럽지 아니함이 없다’는 뜻이다. 오경(五經) 중의 하나인『예기』에 나오는 말인데, 송나라 때 대학자인 정자(程子)는 이 ‘毋不敬’을 예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예기』곡례에 이르기를 ‘사람이 몸을 수양함에는 언제나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고, 용모는 늘 엄숙해야 하며, 말은 부드럽고 명확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덕(德)이 절로 쌓아져서,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라.(曲禮曰 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했다. ‘敬’(경)을 바탕으로 한, ‘居敬窮理’(거경궁리)는 퇴계 선생의 가장 핵심적인 생활철학이며. 군자의 길이었다.
무불경
☆… ‘毋自欺’(무자기)는 사서(四書)의 하나인『대학』에 나오는 ‘성의(誠意)’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른바 ‘자기의 뜻을 성실하게 한다(誠意)’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毋自欺]이다.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성의(誠意)’는 수신(修身)의 바탕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自欺]이란, 마음속으로는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행하는 바는 그렇지 못한 것‘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는 것‘이다. 그것을 『중용』에서는 ’신독(愼獨)‘이라 했다.
무자기
* [퇴계 선생과 청량산(淸涼山)] — ‘청량산,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네’
☆…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은 평생 청량산(淸涼山)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청량산에서 12킬로 떨어진 곳에 선생의 집과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있다. 선생은 생전 도산에서 이곳 청량산까지 낙동강에 연해 있는 산길을 따라 수시로 오가며 명상을 하고 마음을 수양했다. 이곳의 청량정사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선생은 10세 소년시절부터 청량산에 있는 숙부 이우(李堣) 선생의 정사(精舍)에 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청량산은 퇴계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정진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곳이었다. 당시 퇴계가 오가던 낙동강 물길이 바로 ‘퇴계 예던 길’이다. 이렇게 청량산은 퇴계 선생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다. 청량산을 예찬하는 시[淸凉山歌]가 적힌 비(碑)가 ‘청량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선생은 '청량산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고 노래했다.
어느 곳인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만 何處無雲山 (하처무운산)
청량산이 더더욱 청절하다네! 淸涼更淸節 (청량갱청절)
정자에서 매일 먼 곳을 바라보노라면 亭中日延望 (정중일연망)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네! 淸氣透人骨 (청기투인골)
* [퇴계시비공원] ① ☞ [시비 전면] ‘讀書如遊山’(책을 읽은 것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네)
사람들은 말하기를 글 읽기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지만 讀書人說遊山似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今見遊山似讀書
공력(工力)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工力盡時元自下
깊고 얕음 아는 것, 모두 도랑으로부터 말미암네! 淺深得處摠由渠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바라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 坐看雲起因知妙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行道源頭時覺初
절정(絶頂)을 찾아가는 것,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絶頂高尋勉公等
노쇠하여 중로(中路)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老衰中輟愧深余
☆… 선생은, 산을 오르는 것이 학문을 하는 것과 같다고 전제하고[頭聯] 산이나 학문이나 있는 힘을 다하여 공력을 다하게 되면, 스스로 내려올 줄 안다고 했다. 학문을 이루게 되면 스스로 겸손(謙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 내려와 졸졸졸 흘러가는 도랑물을 보면서 그 깊고 얕음을 알듯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다.[頷聯]
고개 들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하늘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지상의 발길, 즉 현실 속에서 그 삶의 근원이 되는 시작을 깨닫는 것이다.[頸聯] 그런데 산의 정상(頂上)에 오르지 못하고 중로(中路)에서 그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尾聯] 당신이 이루지 못한 학문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성인의 도(道)를 이루는 것은 후학(後學)에게 당부하고 있다. 겸손이시다. 고절한 경지에서도 제자들을 믿고 공경하는 마음, 당신 스스로 겸손하신 것이다.
학문과 자연, 천지만물의 이치와 일상적인 삶의 근원을 사유하며, 고절한 학문을 위해 공력을 다하는 것은 산의 정상을 오르기 위해 뜨거운 땀을 흘리는 것과 같다. 퇴계 선생이 지니신 평생의 좌우명이 ‘毋不敬’(무불경)이다. 공경(恭敬)하는 마음은 곧 겸손함으로 드러난다. 당시 <도산서당>에 공부하러 오는 제자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선생은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꼭 문밖까지 나가서 정중하게 배웅했다는 일화가 있다.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지극하신 것이다.
☆… 퇴계 선생의 시상(詩想)을 깊이 음미하며 나의 마음에 담아본다. 사람에게 있어 높이 오를수록 겸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일상에서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의 삶도 무척 넉넉하고 행복할 것이다. 학문을 연구하는 것[讀書]과 산을 오르는 것[遊山]이 같음을 알 수 있다. … 평소에는 책 속에 빠져 진리(眞理)를 흠양하고 산에 오를 때는 하늘과 산의 정기를 받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는 일, 이보다 행복한 일이 있을까.
* [퇴계시비공원] ② ☞ [시비 뒷면] 절구 두 편. … ‘渡彌川望山’(미천을 건너며 산을 바라보다)
굽이굽이 맑은 물 여러 번 건너니 曲折婁渡淸淸灘 (곡절누도청청탄)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突兀始見高高山 (돌올시견고고산)
맑은 여울 높은 산 숨었다 다시 나타나 淸淸高高隱復見 (청청고고은부현)
끝없이 바뀌는 모습이 시상을 북돋우네 無窮變態供吟鞍 (무궁변태공음안)
도산(陶山)에서 이곳 청량산(淸凉山)까지 오는 길은 여러 번 강물을 건너야 한다. 그 길이 바로 지금의 ‘퇴계 녀던 길’이다. ‘맑고 맑은 여울[淸淸灘]’을 여러 번 건너고 나서 마주하는 청량산은 ‘우뚝 솟은[突兀]’ ‘높고 높은 산[高高山]’이다. 그 청량산을 바라보며 솟아나는 시흥(詩興)을 읊조린 것이다. 다음은 ‘約與諸人遊淸涼山馬上作’(여러 벗과 청량산에 노닐기를 언약하고 말 위에서 읊다)이다.
산에 살아도 산이 깊지 못함을 아쉬워하다가 居山猶恨未山深 (거산유한미산심)
이른 새벽밥 먹고 떠나서 다시 찾아오니 蓐食凌晨去更尋 (욕식능신거갱심)
눈에 가득한 뭇 봉우리가 나를 맞아 기뻐하며 滿目群峰迎我喜 (만목군봉영아희)
두둥실 구름모양 지어 맑은 시상(詩想)을 돕네 騰雲作態助淸吟 (등운작태조청음)
무엇보다 퇴계(退溪) 선생은 청량산의 맑은 정기로 심신을 도야(陶冶)하여 ‘동방의 성자(聖者)’가 되셨다. 특히 퇴계 선생은 이 청량산을 사랑하여, 일상 속에서 수시로 청량산을 오가며 명상을 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인격을 고양하였다. 그러므로 청량산은 퇴계 선생의 정신사의 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뚝한 암봉의 병풍 속에 자리 잡은 고찰 청량사 또한 불심이 깊은 연꽃도량이다. …
[연꽃도량 청량사 오층석탑과 야단법석] - 건너편 산이 축융봉이다
☆… 오늘 나는, 낙동강 맑은 강물이 흐르는 유서 깊은 청량산을 온몸으로 안았다. 저 멀리 태백산에서부터 먼 거리를 걸어와 이곳에 당도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땀을 흘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청량산의 정결한 기운과 선인(先人)의 높은 경지와 풍류를 가슴에 품는다. 심신(心身)이 한결 청정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인간이 인간을 충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특히 온통 거짓과 허위의식이 판을 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며 아프게 길을 걸었다.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삶, 그것이 바로 행복한 세상이 되는 길이다. 사람이 각자의 생각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살길이다. 그래서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씀하셨다. 겉으로는 동조하면서 속으로 자기 욕심만으로 사는 것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한다. 소인의 행태다.
* [낙동강이 흐르는 청량산] — 영양 일월산에서 분기한 덕산지맥의 끝자락
☆… 청량산문을 나와 청량교를 건너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어슴프레 땅거미가 내리는 청량산을 바라본다. 퇴계 선생이 사랑하셨던 청량산(淸凉山)이다. … 청량산은 몇 차례로 산행을 한 곳이다.
청량산(淸涼山)은 백두대간 구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백병산과 동고산을 경유하여 남하하다가, 영양군의 북쪽 수비면에서 일월산으로 분기한 덕산지맥의 끝에 솟은 봉우리이다. 결국 봉화군 명호면 낙동강 물길을 만나면서 그 지맥을 다한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말 그대로다. 청량산 줄기는 낙동강을 만나 천인단애의 절벽을 이룬다. 김정호 선생은 신경준의 <산경표>(1750년)를 바탕으로 <대동여지도>(1850년)을 완성한 분이다. 우리나라 산세를 1대간(백두대간) 13정맥으로 한 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는 청량산은 봉우리마다 펼쳐진 수려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이다. 최고봉인 장인봉(丈人峰)을 비롯해 12개의 봉우리와 대(臺),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세운 청량사(淸凉寺)를 비롯한 절터와 암자 등을 품고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지로 알려진 ‘고운대’, 명필 김생(金生)이 서도를 닦던 ‘김생굴’ 외에도 고려 공민왕이 제2차 홍건적의 난(1361년)을 피해 피난을 와서 쌓았다는 ‘청량산성’, 최치원과 김생이 바둑 두었다는 ‘난가대’ 등의 역사적 발자취도 남아있다.
* [퇴계 선생과 청량산] — ‘청량정사'에서 공부하고, 스스로 ’청량산인‘을 자처하셨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1690~1756년)은 그의「택리지」에서, “청량산은 사면에 둘러진 석벽이 만 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가 없다.”고 표현했다. ‘장인봉’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청량산 모습도 아름답지만, 남쪽의 축융봉(845m)에서나 낙동강 건너에 있는 만리산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전경은 색다른 지형의 묘미를 보여준다. 퇴계 선생도 친구에게 보낸 시에서 청량산 봉우리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청량산 위에서 바라본 낙동강]- 내려다 보이는 산곡에 명호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과 35번 도로이다
[청량산 위에서 바라본 낙동강]- S자의 강줄기 [퇴계 예던 길] - 청량교와 관창리 관광촌이 보인다
[청량산 위에서 바라본 낙동강]- 가운데 뒤쪽의 있는 산이 건지산이다. 건지산 끝자락에 퇴계묘소가 있다
☆… 청량산에는 청량정사(淸凉精舍)가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어린 시절 숙부이자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운 곳이다. 이후 퇴계가 과거급제하며 벼슬생활을 하는 사이에도 이곳을 찾아와 학문에 정진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온 후에도 제자와 함께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 선생은 청량산을 '우리 집안의 산'이라는 뜻에서 '오가산(吾家山)'이라 불렀고 또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할 만큼 청량산을 아끼고 사랑했다.
* [청량산 정상, 우뚝한 장인봉] — 풍기군수 주세붕의「登淸凉頂」
청량산 정상은 ‘장인봉’이다. ‘丈人峰’이라는 글씨는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790년)의 글씨[집자]이다. 그 정상석 뒷면에 조선시대 유학자 주세붕(周世鵬)의 오언절구「登淸凉頂」(청량산 정상에 올라)가 새겨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산정에 올라, 청량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감회를 읊었다.
내 청량산 정상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자니 我登淸凉頂 兩手擎靑天
밝은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白日正臨頭 銀漢流耳邊
아래로 구름바다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附視大瀛海 有悔何綿綿
다시 황학(黃鶴)을 타고 신선의 세계로 가고 싶구나! 更思駕黃鶴 遊向三山巓
☆… 주세붕(周世鵬, 1495~1554년)은 풍기군수로 있을 때 조선시대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세운 분이다. 후에 풍기군수로 오신 퇴계 선생(1501~1570년)이 조정에 청하여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 [낙동강 종주 제3~4구간 트레킹을 마치며] — 하늘정원팬션의 밤, 유난히 빛나는 별들
☆… 내일은 이른 아침, 이곳을 출발하여, 낙동강 물길 퇴계 선생의 숨결이 깃든 ‘예던 길’을 따라, 도산에 이르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계상서당과 종택, 그리고 도산서원을 탐방하고, 이어서 낙동강 안동댐까지 종주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오늘, 해질 무렵 청량사 산문에 있는 퇴계 시비공원을 탐방한 것은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종주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날 청량산 ‘하늘 정원’의 밤하늘에 유난히 맑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숙소 앞에 벤치에 앉아 우주의 기운으로 큰 숨을 쉬었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