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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1 강
41. 안식년과 희년(1)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말씀이다. 희년은 안식년으로 시작한다. 일주일을 단위로 안식일이 있었고, 칠 년을 단위로 안식년이 있었다. 그리고 일곱 안식년을 단위로 해서 희년이 있게 되었다.
1. 안식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레25:2-4).”
안식일은 하루 동안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안식년은 일 년 동안 사람과 땅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안식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보면 일을 마친 후에 안식했다고 하였다(창2:2,3). 이것은 사람과 함께 안식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을 안식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안식하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몸도 없고 육체도 없는데 쉴 일이 있겠는가. 사람을 안식하게 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안식하게 하는가? 풀을 만들어놓고 안식할 수 있는가? 물고기를 만들어놓고 안식할 수 있는가? 안식이 안 된다. 동물을 만들어 놓고도 아직 안식이 안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에 안식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을 완성해놓고 난 후에 안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참된 안식은 인격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을 완성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셨을 때 안식하셨다는 말은 곧 만드신 이도 안식하고, 만들어진 자도 안식이 됐다는 뜻이다.
A. 땅으로 안식케 함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하는 것이다. 1절부터 7절까지 ‘땅으로 안식하라’는 말이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레25:2).” 땅을 쉬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농사짓는 법으로 그냥 생각하면 휴경(休耕)이다. 그래서 농사가 더 잘되게, 땅도 피곤하니까 좀 쉬게 해서 다시 땅의 기운을 회복하게 하는, 그런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25:3-4)”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온전하게 하심 안에서 쉰다는 뜻이다. 즉 노력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왜 노력을 멈추는 것인가? 충분하게 열매를 거뒀으니까 노력을 멈춘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할 때 충분하게 창조했으니까 우리는 쉬어야 된다는 뜻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할 때 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았고 뭔가 부족하게 창조했다는 데서 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에 무엇인가를 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어떤 돌팔이가 와서 보고 자기 생각대로 덧칠하려는 것과 똑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생각할 때 항상 어딘가 부족하다고 여겨 그 부족한 것을 채우려 하다 보니 안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인생 그림을 망가뜨려 버리고 마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작품이라면 절대적으로 손을 대지 않아야 된다. 그래야만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다. 완전한 은혜 안에서,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손을 멈춰야 한다. 그래서 내게 정해주신 것 안에서 안식을 해야 된다, 손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준 것 이상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안식을 해야 된다.
B. 안식년의 소출을 전적인 은혜로 나눔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군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25:6-7).”
제 칠년의 소출, 즉 안식년의 소출은 땅 주인만의 소유가 아니라 공동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가축과 들짐승까지 다 같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풍성함. 그것은 만유적이다. 사람이 완성됐으면 풀도 완성되고, 물고기도 완성되고, 다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이 있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고, 인격이 없으면 모든 것은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이 온전한 인격이 될 때 모든 만유가 우리의 인격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속담에 ‘인왕산 그늘이 광동 팔십리에 미친다.’, ‘큰 나무 덕은 못 봐도 큰 사람 덕은 본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런가? 사람의 어떤 인격 때문에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못되면 식물, 동물 할 것 없이 다 괴로움을 받게 된다. 소를 잡는데 가보면 물을 먹여 잡는다. 이것은 잔인한 방법이지만 다 사람 때문이다. 인간이 잘못되면 결국 만유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 안식하게 되면 만유가 그 안식을 공유하게 된다. 그래서 제 칠년에 나는 작물의 소출은 주인(소유자)만 먹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공유해야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비로운 법칙인지 모른다.
C. 추수하지 못함을 삼배로 채우심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레25:20).”할 때, 우리의 생각으로도 그 말은 옳다. 해마다 농사를 지어서 먹는데 그 해에는 못 지었다면 틀림없이 못 먹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하겠다(레25:21)”는 것이다. 즉 안식년의 희년은 우리를 풍족하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것이 넉넉하게 경험되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눅12:25)”하신 대로 우리가 염려함으로 무엇이 더해진 것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예비해 두셨다는 것을 믿으면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아직은 다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보다 크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상하게 우리에게 풍요로움이 된다.
내가 처음 고향을 떠나올 때, 나는 미래가 어찌될지 알지 못하고 나왔다. 당장 급하니까 나온 것이다. 그 때 내 믿음은 막연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하나님이 다 책임질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막연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축복이 되었다. 학교에 들어가 보니 학생들이 “어디로 가나, 졸업하면 무얼 하나?” 하면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내게는 다른 믿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목적 없이 사람을 불렀겠는가. 무슨 일이 있으니까 부르지 않았겠는가?’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맨 먼저 파견이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삼배나 더 빠르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안식년에 대한 철저한 실행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안식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를 안식케 하는 하나님이고, 사람을 안식하게 하는 분이며, 인격을 조성하심으로 우리를 안식하게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2. 희년 - 오십 번째의 해(jubilee)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레25:8-10)”
희년은 오십 번째의 해를 말한다. ‘희년’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Jubilee’로 ‘크게 나팔을 분다. 크게 외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너무너무 기뻐서 크게 외치는 때라는 것이다. 이 희년은 결국 신성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의 경제적 균형을 위한 신성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헝클어져버린, 파괴되어버린 균형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균형 잡히게 하는 신성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땅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루 분배됨으로 각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다. 각 개인에게 준 땅은 영원히 각 개인의 것이며, 각 지파에게 준 땅은 영원히 그 지파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것이니까 영원히 그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균형이 깨졌는데, 예를 들면 병이 들어서 병 치료를 하다 보니 할 수 없이 밭을 팔게 되는 이런 문제이다. 이렇게 50년이 지나면 균형이 깨져버려, 어떤 사람은 많아지고 어떤 사람은 적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십 번째 해에는 이러한 불균형을 원상으로 회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다 똑같은 분복을 갖고 태어났지만 각자 여러 가지 사정들로 인해서 그런 분복들을 모두 팔아먹기도 하고 뺏기기도 했다. 희년은 이런 가련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묘사한 것이다. 새로운 구원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출생으로 부터 신성한 기업을 받았다. ‘사람’이라는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기업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창조되어진 신성한 기업인 것이다. 이 신성한 기업을 우리가 잃어버렸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것이다. 소유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존재를 잃어버리기 까지 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논밭을 팔아 열 마지기에서 준 것에서 두 마지기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받은 것을 다 팔아먹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자기 몸이 팔려가는 것이다. 결국 존재까지 팔렸다는 말이다. 소유가 팔리고 나면 존재도 팔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죄 아래 팔려진 인생의 모습이다. 성경은 이것을 죄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4).”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 각자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팔았다고 변명을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 ‘사정’이라는 것은 왜 생겨났는가? 육신 때문에 생겨났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인생의 복잡한 사정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히2:15)”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는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끝내는 곳이다. 즉 내 육신을 끝내는 곳이 십자가다. 내가 육신에 속하지 않아야 육신의 사정이 없어지지 육신이 그대로 있는 한 육신의 문제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희년이 온다.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오면 모든 사람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된다. 이것은 오늘 신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옴으로써 빼앗긴 인권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내게 오니까 잡다한 인생의 사정이 원인무효 되는 것이다.
우리는 출생으로 받았던 신성한 기업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따라 살도록 창조한 게 아니라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살도록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셨다. 신성한 기업을 우리가 분배받은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만들어 놓은 세상, 사탄이 놓은 올무의 구조적 사정으로 인해 범죄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이 사탄이 쳐놓은 그물로 인해 죄수처럼 무엇엔가 포로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는 희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어 인생의 분깃이 회복되는 희년이 필요하다.
A. 희년은 부활로 온 것
희년은 부활로 온다. 이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온 것이라는 뜻이다. 일곱 번 안식년이 지난(7×7=49년) 그 다음 해가 희년이다. 그러니까 50년째가 희년이다. 이것을 얼른 보면 안식년이 일곱 번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안식년이 여덟 번 있다. 왜냐하면 첫째 해가 안식년이고 마지막 해가 안식년이므로 안식년이 여덟 번이다. 여덟(8)은 성경에서 부활의 숫자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여기서도 칠이라는 숫자를 지나 여덟 번째라는 이 숫자는 부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덟 번째의 안식년, 그것이 바로 희년이다. 희년은 안식에 안식을 더한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의 충만함과 풍성함을 의미한다. 또한 부활 위에 부활을 더한 것을 의미하는 여덟 배의 안식을 말한다. 그래서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은 희년 안으로 간다는 말이다. 하루의 안식, 하루의 부활, 이틀의 부활, 사흘의 부활, 하는 식으로 일주일의 부활의 날이 안식일, 칠 년의 부활의 날이 안식년, 오십 년의 부활의 날이 희년으로 이것은 모두 다 부활 안에서 온 것이다. 사실 부활 이전에는 안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의 과정 안에서 있을 땐 안식을 얻지 못하다가 부활이 옴으로써 우리는 안식에 이르게 되었다.
B. 희년의 7월10일,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가 퍼져나감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다. 그래서 나팔을 불라는 것이다.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레25:9)”라고 하였다. 이 속죄일의 나팔소리는 전국적인 것이다. 전국적이어야 완전한 희년의 선포가 속죄의 근거가 된다. 그러니까 속죄가 있음으로써 희년이 선포된다는 뜻이다. 희년이 선포되기 전에 먼저 속죄일이 선포된다. 하나님의 구속이 먼저 선포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먼저 선포되어 전국적으로 울려 퍼질 때 희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우리를 육신으로부터 해방시키셨던 것이다. 죽음에서도 삶에서도 해방되게 하셨다. 그래서 속죄일 후에 희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C. 희년에는 의무가 없음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레25:10)” 이 희년에는 의무가 없어진다. 내가 팔려갔을지라도 거기 살 의무가 없어지니까 다 자기 권리를 찾아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즉 완전한 자유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완전한 자유가 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깊은 옥에 갇혔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자유를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있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 옥문이 열리게 됐던 것이다. 옥문이 열렸다는 것은 바울 안에 있는 속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누구도 묶을 수 없다. 바울을 묶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깊은 옥이라도 바울을 가둬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D. 신성한 기업과 신성한 가족에게로 돌아감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25:10)” 이것은 신약의 희년에 믿는 이들이 그들이 잃어버렸던 신성한 기업과 신성한 가족에게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업은 인생의 본분이다. 인생은 하나님을 표현할 본분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것을 되찾는 것이 희년이다. 기업을 찾은 것, 이것이 희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업(분깃)을 생명같이 여겼다. 다말은 왜 그러했던가? 기업 때문이다. 룻은 왜 그랬는가? 기업 때문이다. 기업은 신성한 생명을 상징하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잃어버린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재적으로 말하면 교회로 돌아온다는 의미다. 생명이 아무리 있을지라도 가족이 없다면 축복을 누릴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 할지라도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축복의 생활을 누리려면 우리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 이 가족은 오늘날의 교회다.
우리가 이 신성한 기업을 회복하면 신성한 교회가 되고 신성한 나라가 된다. 우리의 과정들은 마지막에는 교회와 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개인에서 단체로, 하나에서 집단으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이것은 신성한 가족이다. 하나님의 권속이요(엡2:19)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는 말이 모두 하나의 가족이라는 뜻이다.
E. 땅을 팔거나 살 때의 값은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계산함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라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 살 것이요 그도 그 열매를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 값을 많게 하고 연수가 적으면 너는 그 값을 적게 할지니 곧 그가 그 열매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레25:14-16).”
땅을 팔거나 살 때의 값은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계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땅을 팔았는데 다시 돈을 주고 사 올 때는 남은 희년을 계산해서 산다는 것이다. 앞으로 희년이 2년밖에 안 남았다면 땅값이 싸지는 것이다. 그러나 희년이 10년 남았다면 땅값이 비싸진다. 왜냐하면 열매를 10년 동안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소유, 신성한 기업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제한 속에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2년이면 2년, 10년이면 10년, 연수가 정해져 있다면 그 정해진 기간 동안 열매를 거둘 것에 대한 값을 주어야 된다.
우리의 희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책정된다. 땅을 휴경하게 하는 것은 땅으로 완전한 소출을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규례다. 다르게 말하면 이것은 우리 인생을 쉬게 함으로 인격 안에서 완전한 안식을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희년이다.
만일 이 희년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빚을 청산하지 못하고, 영원히 빚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빚쟁이가 안 되게 하기 위해서 희년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너무너무 은혜로운 법칙이다. 우리가 빚을 탕감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빚을 져본 사람만이 희년의 소식은 복음이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게만 안다면 우리 속에서 희년이 매일 선포될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소유에 대해서 희년이 선포될 것이다. 자기가 자기 것인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에 대해 얽매이므로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그러니 아침부터 저녁, 잠잘 때까지 희년을 선포해야한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한 것처럼 오늘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전에 희년을 선포하고 자면 내일은 모든 것이 청산돼 다시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희년을 선포하고 매일 안식일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도는 너무나 신기하다.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의 생각으로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겠는가.
성경의 법은 아버지의 법이다. 은혜의 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망하고 헝클어졌을지라도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이 아버지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우리가 누릴 것이다.
아버지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내게는 은혜가 되지만 내가 가지고 있으면 은혜가 안 된다. 왜 그런가? 아버지 마음과 아들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에게 주고 싶어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니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어야 복이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면 우리에게 축복이다. 희년이 선포되면 우리는 자유해진다. 내 생명도, 내 소유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안다면 자유자가 될 것이다. 자유, 이것이 희년이다. 매일같이 우리는 희년을 경험할 수 있다. 안식과 희년, 이것은 아버지의 법이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법이지 통치자의 법이 아니다.
주님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희년을 선포하시는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그리고 그 안식을 직접적으로 우리 안으로 가져오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밖에 있던 법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축복이다. 우리가 날마다 안식을 선포할 수 있는, 희년의 나팔을 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 왔다는 것이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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