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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는 이적에 나타내시고 있는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 ‘온 이스라엘의 구원’ - 에 대한 이해
마태복음 8장 5-13절/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병행구절. 눅 7:1-10)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후, 발걸음을 가버나움으로 옮기셨습니다. 이때의 시점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마태복음 4:12부터 진행되어 시작된 제1차 갈릴리 전도 사역(4:23-25)에 이어서 제2차 갈릴리 전도 사역을 행하시는 여행으로 넘어갈 즈음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이 때, 곧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직후에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인 8:5-13(병행구절. 눅 7:1-10)에서 대하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입니다. 예수께서 이 이적을 행하심이 산상설교(5-7장)가 있은 후 산에서 내려오시고 나서(8:1) 마태복음 8:2-4의 문둥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에 이어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마태복음 8:2-4의 문둥병자를 고치는 이적은 산상설교 이전에 행하신 것으로 있는 제1차 갈릴리 전도 사역의 여행을 시작하시며 첫 번째 행하신 이적으로 있은 일입니다만, 마태복음 8:5-13에서의 백부장의 종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은 산상설교 이후에 행하신 것으로 제1차 갈릴리 전도 사역의 거의 끝에 이르러서 행하신 이적, 곧 제2차 갈릴리 전도 사역이 시작(눅 8:1-3)되기 전에 행하신 이적에 해당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실 때 가버나움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는 한 백부장 - 이방인이며 로마군대 장교. 로마에 직속한 군관이 아니고 헤롯 안디바의 관할하에 있었음 - 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지금 자기 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종이 중풍병으로 병들어서 심하게 괴로워하는 가운데 거의 죽게 되었다는 사정을 고하게 한 후,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셔서 그 종을 고쳐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에게 나아와 자기 종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1-10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로 보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한 백부장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만 다루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청하여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쳐줄 것을 구하면서, 그 이유로 백부장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 - 병고침 - 의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임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유대인을 위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의 종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옳다며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장로들을 통해서 백부장의 청을 전해 듣고는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고선 백부장의 집을 향하여 갔습니다.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어 말하였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놀라워하시며 - 감탄하시며 - 자기를 좇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0-12).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백부장이 보낸 벗들에게 말하기를 “가라 너희를 보낸 백부장의 믿음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자, 백부장의 벗들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종은 이미 건강하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한 백부장에게 있는 믿음을 봅니다. 이 백부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 장로들의 말에 의할 때 그는 이방인으로서 군대 장교로 있으면서도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는 유대인이 로마 군인으로부터 부당한 처신을 당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보호하여 돌보아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저희들이 섬기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행동은 단지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했다는 것에, 그래서 그들을 도왔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백부장이 유대 민족을 사랑했다는 것은 유대 민족이 섬기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섬김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었으며(참조. 룻 1:16-17), 그에 따라서 유대 민족이 회당에 모임을 갖는 것에서 그들이 귀를 기울여 듣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도 참여에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행동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그의 종을 고쳐주고자 그의 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자기 집에까지 오시는 수고를 행하는 것을 자기로서는 받들기가 송구하여 민망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은 감히 예수께 나아가 만나 뵐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께 청하기를 다만 자신의 종이 병에서 나았다고 하는 말씀만 해 주시면 자기 종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신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고 자신 아래에도 군병이 있는데 그들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자기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그대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태도와 말에는 그가 예수님을 절대적 권능을 행사하시는 전능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유대인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에서, 또한 행한 권능에서 신성을 감지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유대인의 경전인 성경을 접하였거나 유대인에게서 성경 말씀을 들어 거기서 하시고 있는 말씀인 메시야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의 의미를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적 행함에서 보고 깨달아 예수님이 예언된 그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예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무리에게 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하신 것에서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동서, 곧 세계 곳곳에 있는 사람들- 이방인 -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좇아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간 약속의 땅인 천국에 들어가 앉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주로 섬김에 있는 믿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으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있게 하기 위해서 이제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으로 있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그 언약의 복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백부장이 입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부장에게서 보고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온 땅의 구주이심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 사건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행사되고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인 백부장과 그의 수하에 있는 종에게서도 행사되어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이는 백부장의 수하에 있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듣고 있는 예수님이 유대인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메시야<그리스도>이시며, 그리고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능력을 행하신 이적을 통해서 그들의 주로 오셨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자신은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마음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의 신분과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을 주로 섬겨 경외함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이제 자기 종이 중풍병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런 자기 종의 병을 예수님이 다만 말씀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있다는 것에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전능하신 주이심을 믿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로 자기 종의 병을 능히 고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자신은 제한된 영내에서 자신의 수하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순종을 강요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백부장이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계신 곳이 어디이든지 간에 그 계신 곳에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종의 병까지라도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주관되고 복종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님으로써 온 우주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개역성경에서 ‘기이히 여겨’라는 말은「이상하게 여겼다」가 아니라 「놀랐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개역개정성경에서는 '놀랍게 여겨'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백부장이 하는 말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있게 하신 믿음에 대해 예수님이 놀라워하셨다는 표현을 하신 것은, 그래서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있는 믿음을 보고서 놀랐다는 것은 자기를 좇는 무리들인 유대인에게서 보지 못하는 믿음이 이방인인 그에게서는 있었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셨음을 두각시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놀라워하면서 자기를 좇는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이만한 믿음’이란「이렇게 큰 믿음」이란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백부장의 믿음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 백부장이 소유하고 있는 믿음에 있지 못하는 지적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주로 믿고 섬기는 믿음으로 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고 있지를 못하고, 그래서 주로 믿고 섬기는 믿음으로 있지 못하다는 말이요, 그러한 이스라엘은 이방인 백부장만 못하다는 것으로서 불신앙에 있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좇는 것과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알고 믿고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로 영접하질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뒤를 좇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그 믿음에 있는 것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한 선지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이 중의 한 사람으로 말입니다(마 16:14). 그러한 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죄로부터의 용서와 그에 따른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개를 외치고, 권능을 행하고 하는 것에서 선지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징벌로 이방인에게 빼앗긴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약속된 하나님이 다스림으로 누리는 평화에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이런 차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을 그렇게 알지 않았으며, 그렇게 믿질 않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은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적 관계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주로 섬기는 것에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에 백부장은 전적인 신뢰와 의존에 있었으며, 그분의 다스림을 받음에 있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든지, 그곳이 백부장이 있는 집으로부터 10리 밖에 멀리 떨어져 계시든지 또는 그곳보다는 가까운 곳에 계시든지 또는 집 가까이에 와 계시든지 또는 집 안에 들어와 계시든지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서 중풍병으로 병들어 죽게 된 자신의 종에게 “네 병이 나았다.” 라고 말씀하시면 자신과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그 종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따를 것이라고 하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자신들에게 이루어질 것 - 행하실 것 - 에 복종하겠다는 것에서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서 전능하신 신적 권위가 있으신 분이시오 자신들의 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고 그의 믿음을 드러내시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방인 백부장이 있는 그 믿음에 있지 않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고는 앞으로 있게 될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그것은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나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백부장에게서 보고 있는 대로 예수님에 의해서 지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대로 하늘에 있는 뭇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일로서 동서에 있는 이방인들이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을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달리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받은, 곧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특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이방인을 멸시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오히려 율법을 어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롬 2:23,27).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어진 땅-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 어두운데서 후회와 슬픔 때문에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 중에서 얼마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섬김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 살 것이지만, 유대인 중에서 나머지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쫓겨남에 있을 것이고, 대신에 그들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땅에는 이방인들이 들어가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온 땅의 구원은 유대인들이 완악함에 있음으로 해서 떨어져 나간 구원에 이방인이 접붙임을 받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구원이 있게 될 것이며 그래서 이방인의 구원이 충만해져가는 것과 함께 또한 유대인들도 돌아와 함께 그들의 구원도 충만해져감으로써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있을 하나님의 심오한 구원의 경륜을 말하였습니다(롬 11장).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요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방인은 제외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그들 모두에게 차별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시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를 그 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에서 그 뿌리로부터 제공되어 지고 있는 살아 있는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말이죠. 예수님 안에 거하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그들도 또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다 그들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렇게 예수님과 결합되어 한 나무의 가지가 되어 그 나무의 뿌리로부터 공급되고 있는 진액을 받는 ‘온 이스라엘’ 대한 신비스러운 가르침을 줍니다. 참감람나무가 예수님을 비유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그 나무에 붙어 있는 원가지는 이스라엘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악함으로 참감람나무에서 원가지 일부가 잘려나가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로 비유되고 있는 완악함에 있었던 이방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음으로 참감람나무 가지로 불려지는 원가지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이 접붙임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과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다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며, 그 나무의 뿌리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생명으로 살아 있는 가지로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참감람나무 원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에는 돌감람나무 가지에 열리는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참감람나무 가지에 맺히는 열매가 열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영생하는 생명에 있는 것으로 잘려나간 참감람나무 가지로 비유되고 있는 완악한 이스라엘에게 시기심을 일어나게 하며, 이를 통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전에는 순종치 않는 가운데 갇혀 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있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는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인데, 이방인이 구원받는 충만한 수가 들어옴으로 더러는 완악하게 된 이스라엘에서 구원받는 충만한 수에 있는 저들의 죄 또한 함께 제거하실 것입니다.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임을 하실 하나님께서 또한 원가지인 이스라엘을 어찌 아끼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구원의 충만한 수인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충만한 수에 있게 하십니다.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저들의 완악함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얻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포도나무이든 참감람나무이든 그 나무는 예수께서 달리시는 ‘십자가’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동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에로 나오는 모든 사람을 접붙여 십자가나무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봄에 있는 가지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공로를 공급받아 하나님의 참생명에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를 무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십자가의 피 공로에 있게 하여 ‘온 이스라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마지막 날이 오면 비록 두 남자가 밭에서 일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 주님과 함께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며, 다른 한 사람은 주께로부터 버림을 받아 지옥불에 들어가 그곳에서 영원히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됨에 있게 될 것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지만 한 여자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다른 한 여자는 주께로부터 버림을 받아 지옥에 들어가 그곳에서 영원히 이를 갈며 슬피 욺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이룰 ‘인자의 날’이 올 것에 대한 인식과 그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고 말입니다(마 24:40-42).
이제 하나님께서 백부장에게 있게 하신 믿음의 관점을 예수께서 자신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인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복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고 하신 것에서 보면서 이 하나님 나라를 말하게 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 있는 우리에게서 두고 이야기 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누구이겠는지요. 하나님을 부르짖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여 배척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에 있는 악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 종교만을 붙들고서 교회만을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인 줄 알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여 이 진리에 거하고 이 진리와 함께 움직이며 사는 믿음에 있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면서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 신앙의 다인 줄을 알고 있는 한에는, 그래서 그러면 아브라함과 함께 주의 나라에 앉아 있는 자가 될 것을 기대하는 참으로 악함에 있는 한에는 그 누구도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있지를 못합니다. 아버지의 천국 입성이 자동 통과되는 줄 알고 있는 신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깨어 있어서 백부장의 믿음에서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에서 보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도들의 가르침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언약의 백성의 관계에 들어와 있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섬김에 있음으로써 이 은혜로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말합니다. “누가 주의 모사가 되었는가”라고 말입니다. 누가 주님이 가진 생각을 헤아려 잘 알고 있으며, 누가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잘 받들어 섬김에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구원의 놀라운 비밀을 안다고 하면, 비밀스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있다고 하면, 누구든지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러겠는지요. 만물 - 그리스도의 교회 - 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며, 그분을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구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