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2장 1-4절
설교제목 : 말씀하신 대로
다시 시작점으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이제 반년을 지나 새로운 반고비를 시작하는 또 하나의 시작점 앞에 서 있습니다. 반고비를 넉넉하고 의미있게 채워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다시 각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10여 일전에 저의 꿈은 24년동안 꿈을 기록하면서 낯선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큰 방 같은 곳에서 이불을 덥고 잠을 자는데, 제가 엉덩이에 힘을 주니 똥이 나와서 그것을 처리하려고 휴지를 쓰는데 너무 많아서 많은 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처리된 것을 버리고, 제 엉덩이를 물로 닦기 위해 화장실에 가는데 그곳은 병원의 화장실 같았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먹고 동화시키려 하다니보니 처리하기 버거운 똥들이 많이 산출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꿈을 꾸고 지나치게 많은 일을 동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그것을 처리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분석을 원하는 분들이 점진적으로 많아져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초과하고 있고, 많은 세미나에, 협회 일, 교회 일까지 너무나 과중한 것들이 걸쳐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선한 일도 한계가 설정되지 않고 과해지면 좋은 내용들이 나타날 수 없는 법입니다. 많은 것들에 끌려다니고, 결국 에너지를 소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각자 우리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더 귀기울이며 반고비를 뚜벅뚜벅 굳세게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떠나는 것
지금까지 요한계시록 설교를 하다가 잠시 12장에서 멈추고 창세기 12장으로 왔습니다. 계속되는 환상의 내용을 더 깊이 있게 탐색하고 준비할 여력도 없었지만, 엄청난 환상을 좇아가는 것이 충분히 가슴에 의미로 다가오지 않아서 성서의 제일 첫 이야기로 방향을 전환하여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친척),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보여줄, 미래 미완료형) 땅으로 가거라.”
다소 황당하게 보입니다. 하란에서 아브라함으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조각물을 만들면서 어렵지 않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떠나라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삶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를 강요하는 듯보입니다. 이것은 고유한 정신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삶의 과정에 반드시 선행과제는 떠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은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토대를 제공했던 구태의연한 삶의 방식과 옛 삶의 형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늘 의존하고 안정감을 제공했던 어머니의 영역이자 삶을 의존적으로 묶어두는 기존의 삶의 가치일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이라 번역합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이자 책임감의 무게를 짊어지고 단독자로서 개성화의 출발을 위한 여정입니다.
원초적 인간, 아담에게도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이 되라는 것은 부모의 세계를 극복하고 결별하여 새로운 독립적 개체로서 결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부과된 정신발전의 과제는 부모의 세계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말은 쉽습니다. 기존의 안전한 토대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불굴의 의지와 힘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년이 되어서 이 삶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잘 떠나셨습니까? 본토, 친척, 아비집을 잘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가는 것
떠난 다음에 중요한 것은 가기입니다. 떠나고 가라 말씀하십니다. 번역을 명확하게 하면 내가 보여주는 땅이 아닙니다. 보여줄 땅이 더 합당합니다. 동사가 미래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땅으로 갈지 아직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오리무중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라하면 이것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어떤 구도된 계획이나 방향대로 갈 수 없음을 시사하는 듯 보입니다. 때에 따라 그가 가야할 길을 안내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밑그림을 펼쳐놓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반응하며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며 가야 합니다. 그냥 가보는 것, 어떤 구체적 계획이 없어서 그것이 보여줄 땅이라 하면 그냥 그쪽으로 가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사족이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부동산 투자의 귀재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대인들은 투자의 귀재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브라함과 그들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많이 살지 않았지만, 무언가 가야할 때, 가보면 길을 할 수 있습니다. 가다가 아니면 우회로를 가면 됩니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길을 떠날 수 있는 힘이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가라는 명령을 하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2-3절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섯 번이나 복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복은 바락barak으로 산출력, 번식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유형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어떤 잠재력임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잠재력과 가능성, 풍요로움을 키워가는 것은 아브라함의 몫도 있음을 일러줍니다. 이것은 정신의 법칙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우리의 정신 안에는 무한한 잠재력의 빛 또는 씨앗이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고 길러내고 실현시키는 것은 의식의 몫입니다. 아무리 복을 가지고 있어도 그 복을 실현시킬 자질이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가끔씩 과대망상을 가진 잠재력이 풍부한 젊은이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복, 잠재력이 풍성함에도 그것을 실현시킬 일종의 그릇, 구조화된 틀이 없어서 오히려 그것이 망상적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것을 목격합니다. 타고난 잠재력의 복이 있어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해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예와 번성의 복을 주셔서, 그 자신이 복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십니다. 또한 보호해 주시되 복의 중개자가 될 것임을 일러주십니다. 복을 실현하여 구체화한 자는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이 복을 누리고 그 복을 누군가에게 중개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의 근원이 되시고, 복의 중개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내 안에 실현되지 못한 잠재력과 산출력을 발현하여 복의 근원, 복의 중개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이 마음에 끌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 길을 떠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난주 어떤 분과 분석을 하면서 길을 가서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의심하지 말고 가보시라고 하였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목적지를 제시하였고, 그곳에서 창조적인 것을 만드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에게는 난감하고 완전하게 동조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있지만 길의 방향이 보이면 그저 떠나면 됩니다. 꿈이 말한 대로 가보시라고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핵심은 길을 떠나기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자 인생여정인 듯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이말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새롭게 빚어가는 방법인 듯 합니다. 길에 머물며 안주하려하면 온갖 이물질이 끼고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저 흘러가듯,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자는 그 길에서 복을 누리며 잠재력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신뢰하며 길을 잘 떠나 복의 매개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