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8
승기기에서 마타람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마타람은 롬복 섬 최대 도시이자 인근 숨바와 섬을 포함하는 서부 누사뜽가라(Nusa Tenggara Barat. 약칭 NTB) 주의 주도이다. 그런데 롬복 섬 인구의 대부분이 (85% 정도) 이슬람교를 믿는 사삭족인데 비해, 유독 마타람 시내는 힌두교를 믿는 발리족이 더 많이 산다고 한다.
여행 말미라 큰맘먹고 좋은 호텔을 찾아봤지만 마타람 시내에는 4성급 이상 호텔이 없다. 그중 괜찮은 호텔을 물색한 끝에 위치가 좋고 후기도 좋은 아스톤인(Aston Inn Mataram)을 5박 23만원에 예약했다. (같은 3성급이라도 지금까지 묵은 숙소 중에서는 제법 큰 호텔). 마타람에 자리를 잡고 남서부 해안과 린자니 화산 기슭(정상은 2박 3일 투어로만 갈 수 있다고 해서 포기하고)을 다녀 볼 계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란자니 산은 근처도 못가고 여행이 끝났다.
짐을 풀고 점심을 먹을 겸 호텔 주변 돌아보니 바로 옆에 마타람 몰이 있다. 예전에는 마타람 최고의 쇼핑몰이었다는데 이제는 새로운 몰에 자리를 내주고 쇠락하는 분위기, 문을 닫은 점포도 많이 보이는데 그나마 1층의 맥도날드와 KFC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 KFC에서 치킨을 사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방에서 빈둥거리다가 저녁 때가 되어 예전이라는 한식집을 찾아갔다. 승기기에서 마타람까지 데려다 준 그랩 기사가 근처를 지나면서 "한국 사람이 하는 한식집인데 승기기에서 마타람으로 이사를 왔다"고 소개를 했던 유명한 식당이다. 현지인이 하는 한식집은 말랑에서 가봤으니 이번에는 한국인이 하는 한식집을 가볼까나? 김치찌개와 떡볶이를 시켰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이 있었다. 한국인 사장님 얼굴은 못 봤고... 메뉴 가격 외에 세금과 봉사료로 15%가 더 붙는다.
2024. 2. 9
마타람 시내 관광의 출발점을 국립 NTB 박물관으로 잡았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박물관은 닫혀 있었다. 달력에 보면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오늘부터 4일 동안 설 연휴던데 (명절 분위기는 전혀 없다) 그래서일까? 그렇다고 박물관을 닫아? 휴일에는 오히려 박물관을 열어야지. 우리 말고도 박물관 건너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온 학생들도 헛걸음을 하고 돌아간다. 아쉽다.
그 다음에 찾아간 곳은 NTB 이슬람 센터, 혹은 후불 와탄 대(大) 모스크(Masjid Raya Hubbul Wathan)이란 이름의, 이름 그대로 커다란 모스크였다.
옷을 갈아입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평상복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의무가 아니라 혜택이었나? 귀찮기보다는 재미있는 경험이니 기꺼이 긴 의상을 입고 모스크를 돌아다녔다. 젊은 직원이 모스크 내부를 같이 돌면서 열심히 설명도 해 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괜찮은 곳이다. 팁을 줄까 하다가 옷 벗는 곳에 헌금합이 있길래 몇 푼 넣어 두었다..
모스크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따만 상까레앙(Taman Sangkareang)이란 이름의 작은 공원을 들렀다가
마타람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최신 쇼핑몰 에피센트룸(Epicentrum Mall)까지 걸어갔다. 숙소 근처의 마타람 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화려한 몰이다. 사람도 바글거린다. 점심도 먹고 쇼핑도 조금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그랩을 불러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은 한식당 예전에서 배달을 시켰다. 불고기 세트, 잡채 세트. 막판에 한식이 땡기는 걸까?
승기기에서 마타람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 기사에게 연락해서 란자니 화산 주변의 폭포와 언덕을 가자고 했더니, (애초 하루 500리부만 주면 어디든 갈 것처럼 얘기했던 사람이) 자기가 추천한 곳(폭포) 외에 다른 곳(언덕)을 추가하려면 돈을 더 받아야 한다고 말이 바뀌었다. 몇 번 더 얘기하다가 협상 결렬.
란자니는 마지막 날로 미루고 내일은 롬복 섬의 남서부에 있는 길리 낭구와 꾸따말리까 비치부터 가보기로 했다. 트래블로카에서 기사 딸린 렌트카를 검색해 보니 유류비와 기사 식대를 다 합쳐서 417리부밖에 안된다. 어, 싸다. (끝나고 팁으로 50리부를 줌)
2024. 2. 10
한국에서는 길리라고 하면 윤식당의 무대가 되었던 그 섬 길리 트라왕안을 떠올리지만, 사실 롬복에는 그 섬 말고도 길리가 아주 많다. 섬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인 모양이다. 오늘 우리의 첫 목적지인 길리 낭구(Nanggu)는 승기기와 마타람에서 만난 현지인들에게 추천받은 스노클링 명소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곳이었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제일 좋았던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길리 낭구는 길리 트라왕안에 비하면 아주 작은 무인도인데 스꼬똥(Sekotong) 지역에 있는 따운(Tawun) 항에서 보트를 타고 건너가야 한다. 보트비에 입도비(청소비)와 스노클 장비 대여료를 포함해서 700리부를 요구하길래 400 주었다는 구글 후기를 들이대며 협상을 한 끝에 500리부로 깎았다. (2명 가격)
길리 낭구에 도착해 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스노클링을 즐기고 있었다. 길리 트라왕안보다 산호가 더 화려하고, 열대어도 훨씬 많이 보인다. 얕은 곳에서도 볼거리가 많아서일까,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우리는 스노클 장비를 하나만 빌려서 장비에 익숙한 옆지기가 썼고, 스노클 마스크로 물이 새어들어와 고생했던 스노클링 초보자인 나는 수영장용 수경만 쓰고 그냥 돌아다녔다. 굳이 스노클 마스크 쓰지 않아도 바닷속 구경하는데 문제가 없는 걸?
스노클링 마치고 길리 끄디스(Gili Kedis)라는 아주 작은 섬으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했다. 한 바퀴 도는 데 1분도 안 걸리는 미니 섬에 내린 이유는 (음료와 간식을 파는 매점이 하나 있다) 길리 낭구와 그 옆에 있는 길리 땅꽁, 길리 수닥을 바라보며 '릴랙스'를 하기 위해서란다.
길리 수닥에도 식당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블루핀이라는 해상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관광객이 몰린 탓에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생선구이가 맛있었고 가격도 바다 위에 떠 있는 식당이라는 특이한 경험을 고려하면 저렴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점심을 먹는 중에 과묵한 (영어에 자신이 없는) 기사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왓츠앱으로 연락을 해 왔다. 인근에 사삭족 전통 직조 마을이 있으니 들러보라는 것. 현재까지 전통 방식으로 옷감을 짜고 있다는 수까라야(Sukaraya)라는 마을이었는데, 대단한 구경거리는 없지만 소박한 마을 분위기가 괜찮았다. 입장료도 없고 아직 상업화가 많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이 작은 마을이 관광 수입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까? 가이드를 자처하던 (혹시 정식 가이드?) 친절한 아저씨에게 팁 조금 드리고 직물 전시장에서 스카프를 하나 샀다.
롬복 최고의 관광지라는 꾸따 만달리까 해변은 나름 멋지긴 했지만 강렬했던 길리 낭구에 비해서는 심심한 편이었다. 간간이 비가 뿌리는 바람에 오래 돌아다니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2024. 2. 11
오늘은 열었을까 기대하며 다시 국립 박물관을 찾아갔지만 역시 허탕이다. 설 연휴 기간 계속 문을 닫는 모양이다.
에피센트룸으로 가서 구경하다가 줄서는 빵집에서 빵도 사고 점심도 사먹고 (일식집에서 스시를 먹었는데, 옆지기는 이날 밤부터 내가 앓기 시작한 원인이 스시에 있었다고 의심) 쇼핑도 조금 하고 놀다가, 그랩을 불러 마유라 공원을 찾아갔다.
한 때 힌두 왕국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지역 힌두교의 중심이라는 마유라 공원에는 큰 사각 연못 주변으로 오래된 건출물과 조각상들이 즐비하고 가운데 섬에는 왕궁으로 사용되던? 커다란 회의실 같은 건물이 있다. 공원 안에서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배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옆지기는 발리 댄스를 배우는 사람들 틈에 섞여 동작을 따라해 보기도 했다.
입장료는 20리부인데 경내를 따라다니며 안내해 준 가이드에게 팁 50리부를 줌.
호텔까지는 제법 먼 길이었지만 구경삼아 슬슬 걸었는데 (25분 정도) 살짝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마유라 공원을 돌아다닐 때부터 몸이 조금 이상했었다. 그렇지만 많이 아픈 건 아니니, '돌아가서 쉬면 되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악몽의 시작이 될 줄이야.
호텔로 돌아와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을 청했지만, 밤새도록 고열과 환각(깊은 꿈을 강제로 꾸는 듯한 느낌. 자대 깨다 하면서 수없이 '이건 꿈이야' "저건 가짜야'를 중얼거림)에 시달렸다. 타이레놀을 하루 네 번씩 먹은 덕분인지 다음날부터 고열과 통증은 줄어들었지만 메스꺼움 때문에 밥을 먹지 못하는 증상과 무력증이 계속되었다.
2024. 2. 12
종일 호텔에 누워 지냈고 (란자니 화산 구경은 물건너감)
2024. 2. 13
혹시 비행기를 못 타면 어쩌나 걱정되었지만, 겨우 몸을 추스려서 예정대로 자카르타로 이동했다. 롬복 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수카르노 하타 공항까지 1인당 10만원, 10:45 출발 11:45 도착인데 실제 비행 시간은 2시간이다.
2024. 2. 13 ~16
자카르타 숙소는 길리에 있을 때 미리 예약해 두었다. 메나라 페닌술라(Menara Peninsula) 호텔, 명성과 규모가 있는 그러나 연식이 좀 오래된 호텔이다. 5만원이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시설도 서비스도 어엿한 4성급 호텔이다. (22층이었나? 역대 여행을 통틀어 가장 높은 층에서 묵은 기록도 세웠다.)
사흘 동안 방안에서 낑낑거리기만 하다가
2024. 2. 16
겨우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에 오니 병세가 호전되나 싶었지만, 이틀 후에 병원에 갔더니 입원하란다. 원인은 모르겠고 (검사 결과 뎅기열 코로나 말라리아 등은 아니라고 나옴) 간수치가 꽤 높게 나온다고 입원해서 지켜봐야 한단다.
50년 만에 입원이란 걸 해 보고, 일주일 후에 퇴원했다.
아픈 동안 열심히 보살펴 준 옆지기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당신 덕에 살아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