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친구 중에 가장 어린사람은 아직 돐이 되지 않는 여자아이다. 나를 '하버지'라고 혀가 풀리지 않는 말로 부르지만 나는 그 아이만 보면 세상의 어떤 일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 아이의 오빠는 이번에 나를 '할아버지 목사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가!
내 친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90세에 가까운 여자 분이다(왠일로 나는 여자 친구가 많은지 모르겠다). 그 분도 내가 목사안수를 받을 때에 '축의금'을 내 주었다. 그리고 홧팅을 외쳐 주었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내 친구 중엔 남자 보다 여자가 많다. 왠일이야? 하며 혐오감을 갖는 사람을 위해서 그 이유를 말한다면 내겐 사내 아들 놈만 둘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내는 여자의 나긋함 보다 생활력이 강한 똑순이 스타일인지라 남자 냄새가 난다. 가족적으로도 그렇다. 2명의 누님이 있지만 첫째 누님은 20년 차이라 여자보단 어머니 느낌이다. 바로 위의 둘째 누님도 나와 11년 차라 세대가 틀림은 물론 성격이 드세서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여자친구들을 많이 많이 사귈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변명이다. 여자 친구가 많다는 말에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내가 목사안수를 받는 전후로 해서 감사투성이 사건만 내게 있었다.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시집 안간 말만한 처녀들이 선물보따리들을 가지고 나의 목사안수를 축하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 외에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것은 중국에서 나와 잠깐 동안 인연을 맺은 청년 둘이 결혼을 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주 멋진 사내아이를 선물로 주셨으며, 그들은 선물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프로젝터(무려 160여만원 짜리다)'를 선물로 준 것이다. 정말 진심으로 그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이 낳은 사내아이도 이제 내 친구로 삼았다. 이름은 '성하준'이다. 이름 풀이의 대가인 내가 풀이를 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하) 준비되어(준) 쓰임 받을 자(성)'라고 말이다.
그 외에 친구들로부터 제자들로부터 후배들로부터 친척들로부터 동료들로부터 생산된 감사는 하늘나라에서도 보일 정도로 많다고 믿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선교지에서 일어난 아찔했던 순간'을 소개하려한다. 위의 긴 서론이 이 아찔했던 순간을 모면하게 하였던 능력이 되었기에 소개했다는 것을 조금만 있으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4월 11일 빨리 오고 싶어하던 중국 땅에 도착했다. 북경 땅은 나를 반겨 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친구처럼 지내는 장로님, 믿고 강단에 세워주시는 목사님, 청년비전트립 팀이 들어오면 언제든지 아파트를 내어주는 선생님, 나의 우둔한 교육에 열광적으로 수용해 주는 현지 제자들, 본의아니게 담임목사처럼 행세하게 된 현지교회 사랑하는 성도들...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교회 강단을 아주 내게 맡기고 한국에 나간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 때문에 주일을 북경에서 보내기로 하고, 내일... 그러니까 12일 토요일이면 '침술'로 나를 도와 일해 줄 권사님을 마중하기 위해 북경 국제공항에 나갔다. 그러나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북경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권사님이 깜빡 졸다가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는 전갈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뱃장을 가진 권사님이다. 내일 온다는 전갈이 있어서 다시 돌아왔는데, 또다시 한국에서 전갈이 왔다. 지혜로운 나의 동역자인 집사님이 다른 비행기로 북경에 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어서 권사님이 늦게 온다는 전갈이었다.
하여간에 권사님은 북경에 왔다. 그 특유의 느린 웃음을 지으면서 북경 비행장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권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자다 보니까 비행기가 떠났데요~ 글쎄!" 하여간 나는 재미있는 분들 속에서 행복하다.
먼저 권사님을 네 시간이나 소요되는 현지에 보내어 내일 주일예배를 책임지라고 했다. 불평 한마디 없이 그곳 사람들과 먼저 떠났다. 권사님은 이미 그곳 현지에 가서 사역을 한 경험이 있으셨고, 그곳 현지인들로부터 침술로 대단한 인기를 받고 있었기에 마음놓고 보낸 것이다.
나는 북경 한인교회(내가 속한 교단이 아니다)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목사가 된 후, 본교회에서 처음 설교를 한 후(축복기도는 담임목사님이 시키지 않아서 서운했다) 중국 땅에서 다른 교단의 교회에서 설교와 동시에 축복기도를 하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월요일(13일)에 담임같이 사역하는 현지로 달려갔다. 역시 권사님은 인기가 대단했다. 수많은 현지인들이 몰려들어있었다. 그의 성령님이 역사하는 침술에 치료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이 전개되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는 성도들의 이유가 나를 감동케 한다. 말씀을 듣기 위해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도착하자 마자 도착예배, 저녁말씀선포 그리고 다음날 새벽말씀선포, 낮 성경공부 저녁 말씀선포, 또 다음날 새벽말씀선포... 일주일 동안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에 더욱 감동!!!
내친 김에 '대심방'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성도들의 집을 심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일날 '성찬예배(한국에서 동역집사가 미니휴대용 성찬기를 선물해서 가지고 왔다)'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준비하라고 일러 두었다. 그리고 성례에 관한 공부도 했다.
이곳 사역지에는 내가 숙식하는 중심교회를 중심으로 다섯 군데의 처소교회가 있다. 그 중 두군데는 완전 '한족'들이 모이는 교회이고, 세 군데는 조선족이 모이는 곳이다.
권사님을 모시고 이곳 인도자와 함께 80여리 정도나 떨어져 있는 처소교회를 돌아오기로 하고 금요일 출발했다. 원래 일정은 금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하룻밤 현지에서 자고 토요일 돌아오는 것으로 했었는데, 목요일 갑자기 그 계획을 바꾸게 되었다. 금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그곳에서 숙박하지 말고 중심교회로 돌아오는 것으로 한 것이다.
금요일 아침에 일행들을 제촉하여 현지에 도착하여 예배에 침술사역을 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중심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공안(경찰)'들이 들이닥쳤다는 전갈이었다. 심란한 가운데서도 피하게 해준 주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한국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본교회 금요중보기도회에 기도제목을 올려달라고 했다. 아내도 잠 한숨 자지 못했으리라...저녁에 돌아가는 것도 포기하고 숙박을 하기로 결정하고 밤을 맞이 했는데, 또 전갈이 왔다. 공안이 저녁에도 들이닥쳤다고... 할렐루야! 주님은 피할 길을 선택케 해 주셨던 것이다.
토요일을 맞이하여 중심교회로 돌아갈 힘을 잃었다. 성찬식을 선포했는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망설이던 끝에 북경으로 도망(!)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사도바울 같았으면 교회로 돌아가 주일 성찬예배를 인도하였으리란 생각이 나를 괴롭게 하였지만, 내 믿음이 이것 뿐인 것을 어찌하랴! 불편한 심정으로 북경에 돌아오고 난 후에 함께 따라온 그곳 인도자가 주일 예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북경에 남아 있겠다는 말에 화가 나서 소리 소리 지르며 다음날 새벽에 현지로 쫓아 보낸 것도 아마 불편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순종해 준 그 인도자가 고마웠다. 나를 스승으로 여겨주는 그 인도자의 딸은 나의 분노하는 모습에 움추러 들어는지 평소같으면 몇번의 전화와 문자가 왔을 터인데, 지금까지도 해 오지 못하고 있다.
나도 보이지 않게 예배에 대한 경직된 태도를 한국 본 교회 담임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으로 아찔했던 순간의 사건을 소개하는 것을 끝마치려한다. 3월의 감사를 생산케 해 주었던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기도가 어리석은 자를 중국 땅에서 오랫동안 사역하게 해 준 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나의 일촌들 모두가 평안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