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장미꽃담 정류소
강미정
살을 건들고 지나가던 바람은 덩굴장미꽃담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습니다
꽃은 담장을 따라가고 그 뒤에 또 꽃이 담장을 따라옵니다
너무 고요하게, 맹렬히 꽃피고 있는 꽃밭은 담장 위 허공에 있습니다
정류소간판을 살짝 가린 백 겹의 꽃무늬를 열고 버스가 천천히 와 닿습니다
천천히, 모든 것은 머무르며 닿고 떠나며 머무릅니다
오늘은 백 겹 물결무늬를 입은 할머니 한 분이 닿았습니다
온몸으로 인생의 가시밭길과 장미꽃밭길을 걸어
모든 길은 저렇게 덩굴을 뻗으며 오고 덩굴을 뻗으며 갔습니다
백 겹의 꽃무늬, 볼그레한 석양빛에 다 스며들듯,
백 겹의 물결무늬, 온몸으로 아득하게 젖어들듯,
비스듬히 기대 서 있던 바람이 버스를 타고 떠납니다
일찍 바람을 탄 꽃잎이 떠납니다 백 겹의 발자국 붉은 소리가 퍼져 나갑니다
꽃 지는 소리, 아래로 버스는 살살 지나갑니다
살며시 덩굴장미꽃담 정류소 의자에 꽃잎이 앉았습니다 할머니의 물결소리가 스밉니다
세상 밖으로 아득하게 젖은 한 장의 살이 환해집니다
누군가에게 제 어깨를 내어주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백 겹의 꽃무늬가 열리는 덩굴장미꽃담 정류소,
가랑잎꼬마거미
울면서 뿔뿔 기어와
젖가슴을 조물락조물락 만지던 손이 있었다
가녀린 손목으로 뻗은 파란 핏줄은 이제 겨우 네 살,
작디작은 벼랑,
그 손을 잡고 밥을 떠먹이면 아파요, 아파요, 울다가도 밥을 받아먹었다
아파요, 아파요, 머리를 잡고 울었다
아파요, 아파요, 절벽인 내 젖가슴을 헤집으며 울었다
가파른 나의 벼랑에 매달려 숨을 할딱였다
눈을 맞추면 아파요, 울다가도 웃고
입을 맞추면 아파요, 울다가도 웃었다
아주 간혹, 젖가슴을 만지던 손을 가만히 놓고
작은 발로 통통통 발장난을 친 적이 있었지만
그 가녀린 발목이 디딘 세상은 너무 작아
아파요, 아파요, 뇌종양으로 가기엔 너무 작은 벼랑,
아파요, 아파요, 가파른 벼랑을 향해 뿔뿔 기어서 오고
아파요, 아파요 머리를 쥐고 폭 꼬부라져 누웠다
꼬부라져 누운 저 작은 벼랑은 이제 겨우 네 살,
가녀린 파란 핏줄 네 살배기 바다로는 배를 띄울 수도 없는데
조물락조물락 벼랑에 집을 짓고 벼랑이 되었다
가랑잎꼬마거미,
할딱할딱 가슴벼랑에 집을 지었다
앞이 안 보이는 길, 뿔뿔 기어서 간 작디작은 벼랑
강미정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으로 등단.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상처가 스민다는 것』, 『타오르는 생』 등.
―『시에』2010년 가을호
첫댓글 네 살이 짓는 벼랑... 마음이 참으로 아픕니다.
꽃지는 소리가 가슴벼랑입니다...참 슬픈 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