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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재림
제목 : 주의 날을 기다리라!
성경 : 벧후 3:1~9
찬송 : 176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1001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후 3: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벧후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갓난아이는 어머니가 젖줄 때를 기다리며 인생을 시작합니다.
유치원 아이는 학교 들어갈 때를 기다리며 삽니다.
청년은 운전 면허증을 딸 때를 기다립니다.
군인은 제대할 때를 기다립니다.
결혼할 처녀 총각은 결혼 날을 기다립니다.
입학시험을 치룬 학생은 합격자 발표를 기다립니다.
중년은 목표 달성을 기다립니다.
입원환자는 퇴원할 날을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에 승리하는 것이 인생에 승리입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기다리지 못 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어떤 여자가 극장에서 밤 프로를 보고 나올 때 실수로 수천만원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떨어뜨리고 돌아 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집에 돌아 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황급히 극장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제 밤 프로를 본 사람인 데요 다이아몬드 목걸이 획득 신고 들어 온 것이 있나요?>
지배인은 없다고 말하면서 잠간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리면 앉았던 자리에 갔다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제 밤에 영화를 보았다는 자리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컴컴한 극장 그 의자 밑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마지막 상영이라 청소도 아침에 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지배인은 기뻐하면서 급히 전화통 앞으로 달려와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여보세요.....여보세요...>
응답이 없었습니다. 잠시를 기다리지 못 하고 전화기를 끊어 버린 것입니다. 전화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조금을 기다리지 못하여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묘사한다면 손에는 성경을 들고 눈은 하늘을 향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후배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며 살아갈 때 신앙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선지자와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조지폐를 판별해 내기 위해서는, 정작 다양한 위조지폐들보다는 진짜 지폐를 오랫동안 꼼꼼하게 뜯어보는 길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거짓말을 경고하기 전에, 그보다 먼저 수신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무엇이 참된 약속의 말씀인지 그리고 누가 그 말씀을 전한 것인지를 먼저 뚜렷이 기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여러 말을 듣고 판단하기 전에, 그 말들을 누가 했는지 알아보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과연 그 말이 나온 출처가 믿을만한가? 혹시 ‘가짜 뉴스’는 아닌가? 어디서 누가 만들어 퍼트린 말은 아닌가? 듣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벧후 3: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며 이제 새로운 화제로 전환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종말론을 비판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베드로가 수신자 된 교회에게 편지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먼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입니다. 이제 두 번째 편지 베드로후서를 보낸 것입니다. 두 편지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성도들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고, 기억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 서두에서 이미 자신의 사역이 성도들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벧후 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 1: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벧후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가 성도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그들이 기억하게 하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바로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수님의 말씀은 성도가 항상 생각하고 기억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을 보면 특별히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말씀을 암시합니다. 그렇다고 꼭 그 말씀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 무엇입니까?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주께서 명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벧후 2: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주님이 명령하신 것에는 다양한 도덕적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주님이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과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대조를 이룹니다. 성도가 받고 기억해야 할 말씀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장과 3장에 걸쳐서 베드로가 주의 강림에 관해 강조하려는 바는, 약속의 말씀의 확실성입니다. 3장에서는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기억나게 함으로써 일깨우고자 하는 바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사도들이 전해 준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의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1장에서 베드로는 주의 강림하심에 관해서 자신이 변화산에서 경험한 사건보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그리고 최종적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재창조 사건은, 모두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미리 보고 말했던 예언의 말씀과 주님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전해 준 사도들의 가르침에 철저히 의존합니다.
여러분!
종말과 심판에 관한 한, ‘새로운 계시’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단 사설이 분명합니다. 베드로후서 다음에 기록된 유다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꿈꾸는 자들’로서 확실히 소위 ‘직통 계시’를 받았다는 망령된 영적 권위를 내세워 성도들을 미혹합니다(유8,15,19절). 요한일서에 가면 그런 자들은 확실히 마귀로부터 거짓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로 규정합니다(요일 2:22-23, 4:1-3).
베드로는 기억의 중요성을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동으로, 사건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하고 계시고 또한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설명이요 의지의 표현입니다. 실재를 뒤흔드는 새롭게 창조하시는 존재적 변화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몫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그 존재적 변화를 가져오시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잊든지, 기억하든지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많은 교회가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단도 도처에 있습니다. 이단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가정을 붕괴시키며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등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가르침이 이단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대신 제상의 규칙과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 역시 거짓 가르침에 현혹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 깊이 믿으며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신앙을 삶에서 구현해 내는 것이 온전하고 건강한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십니까? 매일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조용한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이 말씀을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큐티 외에도 성경 읽기를 체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적어도 일 년에 일독은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주의 재림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벧후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이 신앙생활 했던 교회 공동체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조롱하는 자들’(엠파이크데스)이 ‘조롱’(엠파이그모네)합니다. 여기에서 ‘조롱’(엠파이그모네)은 그 의미가 ‘아이, 종, 철부지’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조롱하는 자들은 상대를 철없는 아이같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철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태초부터 세상이 불변한 상태로 유지되어 왔기에 종말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로 심판하신 것처럼 마지막 날에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가 5-7절에서 지적한 핵심적인 내용은 ‘말씀’에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조롱한바, ‘창조 이후로 세상이 그대로 있는’(4절) 진짜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여전히 그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지음 받은 이 세상이 또한 그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에 잘 알려져 있지만, 드물게 강조되는 진리입니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오늘도 매 순간 또한 그의 말씀으로 붙드십니다. 만일 하나님 자신의 이러한 선하시고 신실하신 의지가 없다면, 세상은 단 한 순간도 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처음부터 이렇게 그대로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처음 세상이 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고 특징적으로 ‘물’(water)에 의해 그 틀이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땅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다’(5절)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드러내게 하실 때 말씀으로써 하늘과 땅의 물을 한곳으로 모으시고 한계와 질서를 정해 놓으신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창 1:90. 따라서 지금도 하늘(또는 궁창)의 물과 땅이 분리되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질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심판과 멸망도 ‘이로써’(6절) 즉 ‘말씀과 물’이라는 창조의 근거와 방식을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점이 역설적입니다. 왜 ‘물의 홍수’로 멸망했을까요? 이 질문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즉 왜 그때의 세상에서 ‘물’은 제 위치에 있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쏟아졌으며 또한 땅에 범람했을까? 5절에서 밝힌 창조의 근거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그의 엄위한 창조의 ‘말씀’으로 한계를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라는 물의 심판은 결국, 그때의 창조 세계를 틀 짓고 있던 ‘물’이 제 위치를 떠나 그 창조의 질서를 도리어 파괴하는 수단으로 역전된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피조 세계의 구조를 떠받치고 있던 그 ‘물’의 위치와 한계를 더 이상 ‘붙드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새로운 말씀, 곧 심판의 말씀입니다.
√창 6: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7: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이렇게 보면, 베드로후서 3장에서 거짓 교사들이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조롱하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한 오만(傲慢)인지 깨닫게 됩니다. 노아시대 때 불순종하며 종말에 관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불경건한 자들은 결국 그 말씀이 거두어진 파멸의 세상과 함께 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이 엄연히 거짓 교사들 앞에도 무서운 경고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경홀히 여기며, 제 멋대로 해석하며, 심지어 탐욕을 따라 지어낸 말과 생각에 맞지 망ㅎ기 때문에 쉽게 조롱하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다가오는 심판이 곧 너희가 버린 말씀 없는 세상의 파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그 버린 말씀이 그를 심판합니다. 반대로, 그가 붙든 그 말씀이 심판의 날에 그들 붙들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지금도 만물을 붙들고 있습니다.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그 말씀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그 세상으로부터 거두는 결과입니다. 창조의 능력이며 지금도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빠져 버린 세상은 곧 심판과 파멸을 의미합니다. 노아시대는 물로 심판하셨지만 마지막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재림과 종말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단들이 종말을 그릇되게 적용하는 바람에 교회에서 종말에 관해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된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최종 완성은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인본주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재림 신앙에 관해 올바르게 배우고 재림의 의미를 깨달아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당시에 주님의 재림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었고 재림에 대한 조짐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성도들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의 시간 개념과 하나님 시간 개념이 다름을 언급합니다.
시 90: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에서 볼 때 재림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닙니다. 재림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재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베드로는 재림이 더딘 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약속이 더디 이루어질 때 실망하거나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재림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성도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질 때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림이 보다 많은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 성도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전도와 선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시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힘쓰십시오. 가지는 못해도 보내는 선교사로서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패역한 세상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패역한 세상을 견뎌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세상에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주님 오실 때까지 잘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