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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사람의 삶은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 사람은 같은 무리에 속한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산다. 물론 이것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가 같은 무리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잘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여기서 설명할 《계시와 삶 분석 도표》는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며 선택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과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며 적자생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자본주의 역사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세뇌된 사회에 적응하면서 성공하려는 사람들에게 《계시와 삶 분석 도표》는 쓸데없는 것이며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려고만 하는 것으로만 여기며 화내고 그것을 폐기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정도가 크면 클수록 본래 인간에게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계시와 삶 분석 도표》는 단지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표에서는 두 가지 범주를 나누는 기준으로 마태복음 6:33과 사도행전 16:31을 제시한다. 마태복음 6:33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사도행전 16:31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이다. 그냥 별생각 없이 보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자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후자는 바울이 말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에서는 후자인 바울 말이 더 자주 인용되며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 ‘삶의 목적’에 있어서 마태복음 6:33은 ‘신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와 ‘신의 의’(δικαιοσύνη τοῦ θεοῦ)이다. 신의 다스림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신의 다스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생명을 바치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이다. 신의 뜻이 펼쳐지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며 이끄는 것, 신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제거하며 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 신이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덜 불편해하실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움직여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사도행전 16:31은 ‘너(σὺ)의 구원’과 ‘네 집(οἶκός σου)의 구원’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 본문은 옥에 갇힌 바울을 지키던 간수가 옥문이 열려 바울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자결하려고 할 때 그것을 중지시키는 바울에게 간수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이다. 간수가 바울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여기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칼을 빼어 자결할 만큼 중대한 책임(행 16:27)에서 벗어나며 처형당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를 믿으면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집안도 해를 받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단지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간수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중요하지 않고 잘못된 삶의 방식을 돌이킬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모호한 말로 간수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간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간수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지 예수를 믿으면 그러한 바람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손해를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필요도 없다. 자기를 부인할 필요도 없다. 단지 예수를 믿으면 해를 받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철저히 개인의 목숨 보전과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라는 독려인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과 조직을 이용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소위 복음이지 않겠는가? 바울은 사람들이 원하는 이러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간수가 누구를 따라 나서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그것이 도대체 주님이 말씀하셨던 ‘신의 나라’와 ‘신의 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냥 인간을 위로하기 위한 값싼 립서비스(lip-service)에 불과하다. 그것은 주님의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바울이 전하고 있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복음은 정작 주님이 말씀하셨던 진리를 파괴한다. 따라서 왜곡된 복음을 진리로 착각해서 받아들이게 되면 본래 신의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 존재가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대부분 사람은 두 가지 삶의 목적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물론 바울의 말에 열광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면서 자기가 원하는 안정과 만족을 추구하고 살 것이다. 바울을 알든 모르든,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대부분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나 죽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삶의 목적과 연결된 ‘구원의 의미’에 있어서 마태복음 6:33은 ‘신의 나라와 신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인 반면에 사도행전 16:31은 ‘인간이 원하는 평안, 풍요, 안락함이 이루어지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다. 이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아니라 저세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포함하는 것이다. 물론 사도행전 16:31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망상이며 파멸일 뿐이다. 신의 나라와 신의 의를 이루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원을 바라게 만든 종교는 악일 뿐이다. 구원에 관한 생각의 차이는 단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다”라는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차이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구원을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름은 지속해서 서로에 대한 마찰과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주님의 처형당하심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원했던 구원자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원자였다. 당시로서는 로마의 지배에서 독립시키며 세계의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만들어 줄 존재가 이스라엘의 구원자 상이었다. 예수는 그 이름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구원자 상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이 기대한 그러한 구원자의 모습을 거부하셨다. 그런 구원자는 본래 인간의 구원과 상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꿈꾸지 않으셨다. 오직 신의 나라를 이루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가치관과 삶의 방향의 차이로 인해 주님을 처형하면서도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구원의 주체’와 관련해서도 마태복음 6:33의 경우에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인 반면에 사도행전 16:31에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하는 예수’가 구원의 주체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힘든 일을 하기보다는 누군가 대신 그 일을 해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욕구가 소위 성서라는 책에도 걸러지지 않고 마치 신의 말씀처럼 기록되어 있다. 소위 성서를 기록했던 자들 또한 그러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성서를 세속적인 책으로 만들어 버리며 신의 말씀을 왜곡해 버린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소위 기독교에서 행하고 있는 기도의 대부분은 인간이 신을 부리는 구조이다. 인간이 요청하면 신이 그 요청을 듣고 이루어 주어야 하는 구조이다. 이는 사실상 신이 인간의 종이 되는 구조이다. 말로는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기도하는 인간의 뜻을 주님이 따라야 하는 구조이다. 이 어찌 신성모독이 아닐 수 있겠는가? ‘주님’이라는 말은 사실 ‘주인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감히 주인님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기도, 아니 모든 종교의 기도는 이러한 구조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종교의 의미도 인간의 위로와 평안을 목적으로 한다는 식으로 말도 되지 않는 정의와 설명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구원은 신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신의 나라와 신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원하는 평안, 풍요, 안락함이 아니라 오직 신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신의 다스림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왕국을 만들려고 하고 그곳에서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권력을 행사하길 원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국가와 세계에까지 이른다. 따라서 신의 나라를 이루려면 먼저 인간이 지배하는 왕국을 멈추고 거두어들여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러한 회개는 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4:17)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삶을 돌이켜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천국이 이루어질 수 없고 오히려 천국을 방해하며 맞서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은 하늘에 이루어지는 낙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방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은 사탄의 일이다. 결국 구원을 이루는 주체는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이 신의 나라를 이루는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 구원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인간이 신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인간 자신이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신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예수를 구원자로 삼으려고 하는 순간 예수를 처형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결코 그런 구원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직무 유기하면서 주님께 넘겨버리려는 구원자로서의 직책을 주님은 거부하시기에 그런 구원자를 원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필요 없는 주님을 처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구원자를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를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게 하는 존재로 만들려는 사악한 죄일 뿐이다.
주님이 인간의 욕망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 신의 나라와 신의 의를 이루는 구원의 주체는 예수가 아니라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분석하면 마태복음 6:33은 생명을 다하는 인간의 노력이 신의 나라와 신의 의를 이루는 삶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에는 신의 나라와 신의 의에 반대되는 자기 욕심을 부인하고 제거하며 가는 고통이 동반된다. 이에 반해 사도행전 16:31은 인간 자신의 평안과 풍요 및 안락함을 구원으로 여기며 그것을 이루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데 그것을 이루는 수단은 단지 주님께 구하는 것이다. 구하면서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을 확신하는 것뿐이다. 이보다 더 간단한 구원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주님께 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인간 욕망이 빚어낸 망상과 사기일 뿐이다.
물론 ‘삶의 목적을 수행하는 주체’에 있어서 마태복음 6:33은 신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삶을 바치는 인간인 반면 사도행전 16:31은 예수이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덧붙여진 이름인 ‘예수’, 그것은 ‘야웨는 부유하고 풍요하심’이라는 의미로 못 박아버린 구원자라는 이름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주님을 ‘예수’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주님께 인간 자신의 부유하고 풍요롭게 됨을 끊임없이 구하게 되는 구조이다. 예수를 부를 때마다 인간의 욕망이 커져만 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강화하길 원하는 존재가 누구이겠는가?
‘명령의 주체’에 있어서 마태복음 6:33은 주님이시지만 사도행전 16:31은 바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보다 바울의 명령에 복종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이 자신들에게 부와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줄 것을 보장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말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마치 신의 명령처럼 받아들인다. 이것이 주님을 거부하고 바울을 신격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명령하고 있는 바울의 말은 신이 아닌 바알(Baal)을 섬기게 만든다. 바울의 명령과 말에 복종하면서 사람들은 그 대가로 바알(Baal)에게 구했던 부와 풍요와 안정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명령 수행 결과’에 있어서 마태복음 6:33의 경우에는 피조물로서 인간이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의 종으로 움직이게 된다. 반면에 사도행전 16:31을 받아들이고 따르면 예수는 주님이 아니라 인간을 섬기는 위치에서 인간의 종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행위인 기도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무언가 달라고 끊임없이 구하는 구조가 된 것은 바울과 그의 생각을 추종하였던 제자들로 이루어졌던 초대교회의 무지와 악의 결과인 것이다. 주님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구하며 그렇게 “예수에게 구하는 것”을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동일시해 버린 결과 기독교는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님을 이용하고 부리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괴기스러운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주님의 상징과 속성’이 마태복음 6:33의 경우에는 ‘진리 자체’이며 ‘삶의 기준’으로서 진리와 비진리를 가르는 판단의 기준 자체가 되는 반면 사도행전 16:31의 경우에는 주님이 바알(Baal)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풍요와 안정을 채워야만 하는 종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이 신성모독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말을 따를 것인지에 따라 계시는 완전히 다른 방향성과 기준을 가지게 된다. 인간들이 성서라고 하는 책에는 이 두 가지 계시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더욱 명확히 말하자면 신의 뜻이 전달되어 사람들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도록 일깨우는 본래적인 계시가 있는 반면 그러한 신의 뜻과 맞서며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잘못된 사상이 마치 신의 뜻이 드러나는 계시이기라도 한 듯 걸러지지 않고 성서라는 책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참담하게도 성서라는 책의 내용 대부분은 바울의 말이 가진 구조와 같은 신의 뜻과 맞서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내용들은 마치 신의 말씀인 것처럼 왜곡해서 기록되고 전달되었다. 성서라는 책을 편집하면서 그러한 내용들이 걸러지지 않은 이유는 신의 나라와 신의 뜻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에서 편집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내용은 ‘계시’에 관한 것이다. 계시라고 하면 ‘신내림’과 같은 특별한 현상을 동반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계시’는 사람들이 계시로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지는 형태로 사회에 존재하면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때론 경전이나 교양서적을 통해서 때론 사제나 목사, 선생이나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 모든 내용은 사실상 삶에 대한 ‘기준과 가치 구조’를 담고 있는 계시이다.
일반적으로 계시는 신으로부터 임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가 않다. 단순히 신으로부터만 계시가 임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판단 기준과 가치관에 대해 굳이 신의 뜻을 따르고 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 방향으로만 움직여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오히려 신의 나라를 폐기하려는 듯이 질주하고 있다. 신의 뜻은 인간의 욕망 앞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계시의 주체가 단지 신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시의 주체, 즉 누가 계시하느냐에 관해서는 세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로 신, 둘째로 사탄, 셋째로 인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주체인 ‘신’은 계시의 본래적인 근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창조주 ‘신’으로부터 임하지 않는 계시는 본질적 계시를 파괴하며 세상을 타락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사탄과 인간이 계시의 주체가 된 경우가 해당한다. 사탄이 계시의 주체가 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런 계시를 사탄이 내리는 것으로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탄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 마치 신의 계시나 혹은 인간들의 그럴듯한 사상과 가르침인 것처럼 자기의 뜻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탄이 계시의 주체인 경우에도 사람들은 어떤 의심도 없이 그 계시를 신으로부터 임하는 것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당연한 사상과 교훈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구조에서는 사제와 목사, 또는 선생이나 부모가 사탄의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계시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의 계시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인간이 신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계시를 한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계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생각이나 견해일 뿐이며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인간의 사고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렇지 않다. 인간의 독립적인 사고 활동의 결과물로 보이는 사상과 판단 및 견해들은 계시라고 해야 할 만큼 역사와 문화와 사회 속에서 인간의 욕망을 강화시키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사탄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계시를 전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수가 상식적 진리로 판단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상과 판단 및 견해들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사회의 각 분야,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미디어 등에서 리더로 활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과 판단 및 가치관에 따른 행동 대부분은 사탄의 영향력으로 오염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채 사회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사회 속에서 이미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과 가치관 및 그에 따른 모든 행동과 판단들에 대해 그것의 근원이 어떤 계시인지를 철저히 분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각과 가치관 및 그에 따른 행동과 판단은 사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상적으로 ‘계시의 내용’을 구분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6:33과 사도행전 16:31로 대표되는 두 가지 ‘계시의 내용’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우선 마태복음 6:33으로 대표되는 계시는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신의 나라와 신의 의를 이루라”,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너의 욕심을 버리고 진리에 생명을 바치라”,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지 말고 죄를 짓고 있는 삶을 돌이키고 죄로 인한 피해를 갚고 용서받을 삶을 살라”, “살고 있는 현장에서 지금 당장 신이 명하신 삶을 살라”라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반면에 사도행전 16:31로 대표되는 왜곡된 계시는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너의 죄를 용서할 것이다”, “너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이것에는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것에 대한 어떤 제한도 없다. 죄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돈과 권력이 가치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갈망할 것인지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또한 그런 갈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이 취하게 될 태도들도 자명하다. 죽음으로 치닫는 분노와 좌절의 아우성만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계시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삶 또한 완전히 다른 ‘현상적 삶’과 ‘본질적 삶’을 살게 된다.
우선 마태복음 6:33을 받아들여 살아내는 삶은 현상적으로 세상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누리는 것 여부와는 상관없는 고통의 삶을 산다. 이 고통은 신의 나라와 신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아픔과 신에 대한 죄송함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인한 것이다. 그 고통과 더불어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비통함이 계속된다. 이런 삶은 현상적으로는 고통의 삶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본질적으로는 신과 연결되어 신의 생명력으로 사는 생명 가득한 삶인 것이다(요 14:6a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와는 반대로 사도행전 16:31을 따르면 사는 삶은 현상적으로 더 많이 가지고 누리려는 욕망을 신에게 투사하며 그것을 신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은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할 것처럼 착각하면서 산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누리며 살려고 하고 덜 가진 것 같으면 더 가지고 누려보려고 움직이게 된다. 이런 삶은 스스로 무언가 가지지 못했다고 느낄 때 고통스럽게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편으로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마치 자족하는 삶을 살려고도 한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가지고 누리는 것 자체를 포기하며 살기도 한다.
이렇듯 현상적으로 무언가를 더 가졌든 가진 것으로 만족하든 아니면 더 가지려고 욕망하든 포기하든 사실 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일 뿐이다. 이런 삶은 본질적으로 ‘죽음’일 뿐이다. 피조물이 신과의 연결성이 끊어지면 그것은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생명력과 분리된 삶은 신과 상관없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졌다고 스스로 행복해하며 만족하든 아니면 그것을 가지지 못해 불행해하며 절망하든 삶이 아니라 죽음일 뿐이다(눅 16:13 :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각자 생명을 걸고 고민해야 한다. 각자의 삶을 살피고 분석하고 결단하고 올바른 생명의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오직 신의 나라와 신의 뜻만이 삶 속에 가득하도록 그것과 반대되는 계시와 맞서야 한다.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사탄의 유혹일 뿐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이 어떤 계시를 원하고 있는지, 어떤 계시를 원해야 하는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해야 하는지,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인지 주님의 계시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살펴야 한다. 신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며 신에게 구하면 모든 것을 이루어 주며 죽음 이후에 낙원에서 살게 해줄 것이라는 사탄의 유혹과 거짓에서 도망쳐야 한다.
여기에 제시된 《계시와 삶 분석 도표》는 단순한 표가 아니라 신의 계시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한 진리의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잘못된 계시를 따라 죽음으로 치달으면서도 단지 성서를 믿었을 뿐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도록 하는 분명한 생명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세상 속에서 살아내야만 한다. 그것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배척받고 처형당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신의 생명으로 사는 피조물의 삶이기 때문이며 진정한 행복이고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계시와 삶 분석 도표》
마태복음 6:33 | 사도행전 16:31 |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 |
삶의 목적 | ‘신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신의 의’(δικαιοσύνη τοῦ θεοῦ) | ‘너’(σὺ) 구원 ‘네 집’(οἶκός σου) 구원 |
구원의 의미 | 신의 나라와 신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 | 인간이 원하는 평안, 풍요, 안락함이 이루어지는 것 |
구원의 주체 |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 |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하는 예수 |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 생명을 다하는 인간의 노력 (욕심을 부인하며 신의 뜻을 이루는) | 예수에게 구함 (이루어 줄 것이라 믿음) |
삶의 목적 수행 주체 | 인간 | 예수 (뜻: ‘야웨는 부유하고 풍요하심’: 구원자) |
명령 주체 | 주님 | 바울 (바알) |
명령 수행 결과 | 인간이 주님을 섬김 인간이 주님의 종이 됨 | 예수가 인간을 섬김 예수가 인간의 종이 됨 |
주님 상징 | 진리 | 바알 (Baal) |
주님 속성 | 구분 기준 (진리/비진리) | 풍요, 안정 |
계시의 내용 |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신의 나라와 신의 의를 이루라. |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 |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너의 욕심을 버리고 진리에 생명을 바치라. |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 |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지 말고 죄를 짓고 있는 삶을 돌이키고 죄로 인한 피해를 갚고 용서받을 삶을 살라. | 너의 죄를 용서할 것이다. | |
살고 있는 현장에서 지금 당장 신이 명하신 삶을 살라. | 너를 구원할 것이다. | |
현상적 삶 | 가지고 누리는 것 여부와 상관없는 고통의 삶 신의 나라와 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아픔과 죄송함과 분노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비통 | 가지고 누리는 삶 더 가지고 누리려는 삶 가지고 누리지 못한 고통 가진 것으로 자족하는 삶 가지고 누리는 것 포기한 삶 |
본질적 삶 | 생명 | 죽음 |
나는 어떤 계시를 원하고 있는가? | ||
나는 어떤 계시를 원해야 하는가? | ||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 ||
나는 어떤 삶을 원해야 하는가? | ||
나는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가? |
《계시와 삶 분석 도표》의 아랫부분은 각자 원하고 있는 계시와 본래 원해야 할 계시를 분석하고 삶에 적용함을 위한 목적으로 빈칸으로 남겨두었다. 이것은 어떤 삶을 살아야 신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존재로 살 수 있는지에 관해 본래 인간이 해야만 하는 고민과 움직임을 각자 살피기 위한 것이다.
우선 “나는 어떤 계시를 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는 각자가 듣고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 메시지와 삶의 기준을 살펴야 한다. 사회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그들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길 원한다든지 자기에게 없다고 여기는 유무형의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이런 부류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한 정보들을 듣기 원하고 그 정보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한다. 자신의 허기진 욕망을 달래기 위한 정보가 곧 계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계시는 결코 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상관이 없다. 설사 그것이 사탄으로부터 주어지는 정보라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오직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환영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1:15-17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여기서 말하는 ‘피리 부는 것’과 ‘슬피 우는 것’은 신의 계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신의 계시에 ‘춤추지 않는 것’, ‘가슴을 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말만 들으려고 한다. 자기의 욕심과 욕망이 채워지는 정보만 받아들이길 원한다. 아무리 그런 정보를 듣거나 따르지 말라고 해도 기를 쓰고 듣고 따르려고 한다. 그런 정보를 마치 신이 준 계시처럼 중요하게 여기며 따르고 복종하는 것이다. 이런 복종은 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신의 나라를 파괴하는 반역과 같다. 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0:22a에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그 계시에 따라 행하게 되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는 계시를 원하고 있는지 아니면 신의 나라와 공의가 이루어지기 위해 자기의 뜻과 욕망이 부인되고 제거되는 계시를 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사 지금은 자기 욕심과 허기진 욕망을 채우기 위한 정보를 계시처럼 여기며 갈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떤 계시를 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다시 돌이켜 결정하고 신의 나라와 신의 공의에 복종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만 한다. 이 질문은 무엇을 목표로 지금 살고 있는지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으로 답해야만 하는 질문인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와 “나는 어떤 삶을 원해야 하는가?”와 연결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하나의 삶은 ‘세상이 미워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의 삶은 ‘세상이 좋아하는 삶’이다. 이 두 가지 삶의 형태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신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고 후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삶’이기 때문이다. 가족, 친척, 친구, 동료들을 만족시키며 그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삶은 결코 신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 될 수 없다. 적자생존과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세상을 만족시키길 원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그러한 구조를 깨면서 자기가 취할 수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사회로부터 배척받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의 기준을 위해 치닫고 있는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삶이란 결국 신으로부터 임하는 계시의 기준에서는 ‘죽음’일 뿐이다.
《계시와 삶 분석 도표》의 마지막에 던져진 “나는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본질적으로 살아있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과 하나이다. 이제 신 앞에서 엄중하게 답해야만 한다. 신과 연결되어 신의 나라와 신의 공의를 이루는 것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을 신에게 바치는 생명 가득한 본래 인간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자기 욕심과 욕망을 이루는 데에 신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허비하면서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의 성공과 안락함을 추구하면서 신의 다스림에 불복종하는 본질적으로 타락한 죽은 존재로 살 것인지를 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