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전12:9~12
9.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11.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12.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설교>
현대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은 관심 밖의 일입니다. 교인들이 성경을 쓰고 읽는 것을 자랑하지만 그 또한 진리의 말씀을 향한 관심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말씀을 향한 관심이 성경을 읽고 쓰게 했다면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쓰고 읽는 자신에게로 관심이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습성임을 생각해 보면 진리의 말씀은 피하고 싶은 거북한 내용과 짐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환영하고 좋아할 인간은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 6: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현실적인 반응이고 실상입니다. 말씀이 아닌 떡이 자기의 생존에 중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을 부정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면서 인간이 한 일을 인정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으로 높여주는 말씀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인간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말이라면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헛된 인간의 말일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11절에서도 전도자는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고 말합니다.
지혜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목자가 주신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한 목자에게서 말씀을 받았다면 지혜자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똑같은 내용으로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으로 믿어질 수 없는 말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찌르는 채찍 같고 잘 박힌 못 같다고 말합니다.
찌르는 채찍은 목자가 가축을 이끌어갈 때 사용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끝이 뾰족해서 가축을 찌르면서 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용도입니다. 잘 박힌 못은 목자가 천막을 칠 때 땅에 고정시키기 위해 땅에 박은 못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말씀을 표현한 것은 말씀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들이 찌르는 채찍과 같고 그 말씀들이 모두 한 목자가 주신 바라면 목자가 되시고 말씀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찌르는 채찍으로 오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말씀에서 아픔이 되는 것을 제거하고 귀를 즐겁게 해줄 다른 말을 첨가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말하고 듣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헛됨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라고 말합니다.
잠언을 읽어보셨습니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잠언을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의 교훈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는 내용만 봐도 열심히 일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할 것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잠언에는 이런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잠언을 인생에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면 잠언은 찌르는 채찍으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결론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미와 게으른 자에 대한 내용도 우리가 게으른 자임을 찌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고 복 받아 잘 살겠다는 기대 자체가 열심히 일하지 않고 복을 누리겠다는 게으른 자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찾는 인간성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찌르는 채찍이 되는 것이고 채찍에 의해서 목자가 의도하는 길로 가게 되면 인간의 모든 것이 부정되고 오직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만 참된 생명으로 고정되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박힌 못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고 진리의 말씀이 아픔을 주는 찌르는 채찍이 되지 않으면 인간은 끝까지 자신을 옹호하고, 긍정하는 방향으로 갈 뿐입니다. 자신이 부인되는 자리에서 누리는 자유를 모른 채 자신의 힘과 수고로 원하는 것을 채워야 만족해하는 인간 본연의 길로만 갈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참함이고 불행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많은 책을 짓고 많이 공부한다 해서 자신이 부정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책을 짓고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으로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책을 짓고 공부한다 해도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전도자는 지혜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완악함은 지혜보다는 자신의 삶을 편안하고 부요하게 해줄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이러한 마음을 개조할 방법은 없습니다. 많은 책을 짓고 몸이 피곤할 정도로 공부를 해도 인간은 자기 유익만 추구하는 완악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찌르는 채찍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찌르는 채찍에 의해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내가 버림받아 마땅한 쓸모없는 악한 자로 드러나는 아픔이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게 하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부요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찌르며 인도해 가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에 의해 판단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다면 우리는 항상 죽음의 존재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이 가장 복되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우리의 심령에 못 박히게 되면서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감사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의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이고 증거입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