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여랑을 만나다
하루는 정생이 양한림에게 와서 말하기를,
“전날에는 안사람의 신병으로 말미암아 형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서운하도다. 아직도 도성 밖 장림에 버들 그늘이 아름답고 좋으니 마땅히 반 나절의 시간을 내어 한바탕 놀이를 버리고, 형과 더불어 꾀꼬리 노래를 들어 보는 것이 좋을 듯 싶소.”
양한림이 이에 응하되,
“녹음 방초가 꽃철보다 나으렷다!”
하고, 두 사람이 동행하여 성문 밖으러 나아가 무성한 수풀을 가려서 풀을 자리 삼아 꽃가지로 수놓으며 술을 마실새, 문득 보니 가까이 황폐한 무덤이 하나 있는데, 쑥대는 우거지고 잡풀이 떨기를 이루어 구슬픈 바람에 나부끼고, 두어 떨기 말라 빠진 꽃이 거칠은 언덕위에 어지러이 선 나무 사이로 그윽하게 보이더라. 한림이 취흥으로 말미암아 무덤을 가리켜 탄식하되,
“살은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한 번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법이니 옛적 맹상군의 부귀로도 당시의 옹문(雍門)의 거문고 곡조에 천 년 만 년 후에는 초동목수(樵童牧豎)가 무덤 위에서 뛰놀며, 이것이 맹상군의 무덤이로구나 하는 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하니, 어찌 살아 생전에 취하지 아니하랴?”
정생이 말하기를,
“형은 저 무덤의 우래를 알지 못할 것이오. 저것인즉 장여랑의 무덤으로 여랑의 아르다운 자색이 세상에 떨치니 장여화라 일컬었는데, 불행이도 이십 세에 죽으매 여기 묻어주고, 그 뒤에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꽃과 버드나무를 무덤 앞에 심어 표하고 애석한 죽음을 위로케 한 것이니, 우리 두 사람도 또한 술 한 잔을 부어 꽃다운 넋을 위로함이 어떠하오?”
한림이 본디 다정한 사람이라 이에 응하되,
“형의 말이 지극히 당연하오!”
하고, 장생과 더불어 무덤 앞에 이르러서 술을 들어 붓고, 각기 들을 지어 외로운 넋을 조상하니, 한림이 글을 읊었으되,
미생이 일찍이 나라를 기울이더니
꽃다운 혼이 이미 하늘에 올라갔도다
거문고 줄은 산새가 배우고
깁(명주실로 거칠게 잔 비단붙이)과 비단은 들꽃이 전하더라.
옛 무덤에 부질없이 봄풀이요
빈 다락에 스스로 저무는 연기더라
진천의 옛 성가는
오늘 날 뉘집에 붙였는고.
정생이 글을 읊었으되,
묻노니 옛적 번화한 곳에
뉘집의 요조한 낭자런고
소소(기생이름)의 별장이 적막하더라
풀은 깁치마 빛을 띄었고
꽃은 보매사마귀의 행기를 지녔더라.
꽃다운 넋을 불러 얻지 못하는데
오직 저녁 까마귀만 날게 하더라
두 사람이 소리내어 읊조리고는 정생이 무덤 둘레를 돌아보다가, 사초가 떨어진 틈에서 흰 비단 헝겊에 쓴 글을 들어 읊으며 뇌이기를,
“어떤 다정한 사람이 이 글을 지어 정여랑 무덤에 넣었을꼬?”
하기에, 한림이 받아본즉, 일전에 자기 소매 마구리를 찢어 글을 써서 선녀에게 주었던 것인지라, 가슴이 내려앉도록 놀라며 지난번에 만났던 미인이 바로 장여랑의 망령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등공에 흐르고 놀란 가슴 진정치 못하더나, 이윽고 깨닫기를,
“신선도 하늘이 정한 연분이오, 귀신도 하늘이 정한 연분이니, 선관과 귀신을 구태여 분별할 필요는 없다.”
하고는, 정생이 마침 일어나 돌아선 틈을 타서 다시 한 잔술을 타서 무덤에 붓고 마음속으로 축원하였다.
유명(幽明)은 비록 다르나 정의 (情義)에는 간격이 없으니, 오직 바라건데 꽃다운 혼령은 이 적은 정성을 굽어 살피고, 오늘 밤에 거듭 옛 인연을 이어 주도록 하오.
양생은 축원을 마치자. 장생과 더불어 돌아와 화원 별당에서 베개를 의지하고 누워 미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더라. 월색은 발에 비치고 나무 그림자는 창에 가득하여 사방이 고요한데, 이 때 사람의 소리가 은은히 들리며 발자취가 완연하기에, 한림이 문을 열고 본 즉, 자가봉에서 만난 선녀더라. 진정 놀랍고도 또한 기꺼운지라, 문지방을 뛰쳐나가 여인의 갸날푼 손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 오려하니, 미인이 사양하되,
“첩의 근본을 낭군이 알고 계시오니 아마도 꺼림찍한 마음이 없지 않으실 것이외다. 첨이 처음으로 낭군을 만났을 적에 바로 말씀을 드려야 마땅하나, 혹시 낭군이 놀라실까 두려워 신선이라 거짓으로 일컫고 하룻밤 고임을 입어 영광이 극진하고 정의가 이미 깊어서, 끊어진 혼이 두 번 잊고 썩은 살이 되살아 나는 듯하나이다. 오늘 다시 첨의 무덤을 찾아 술을 부어 제사를 지내시고 글을 읊어 조상하시여 임자 없는 고혼을 위로하여 주시니, 첩은 감격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옵고 후은대덕(厚恩大德)을 사례하고 적은 정성이나마 몸소 말씀 드리고자 잠시 들린 것이온데 어찌 감히 썩은 몸으로 다시 군자의 몸에 가까이 할 수 있겠나이까?”
한림이 다시 여인의 옷소매를 당기며 이르기를,
“세상에 귀신을 미워하는 자는 우매하고 겁 많은 사람이라,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귀신이 변하면 사람이 되나니, 사람으로서 귀신을 두려워하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요 귀신으로써 사람을 피하는 자는 신령치 못한 귀신이니, 그 근본인즉 하나인데 어찌 유명을 판단하리오? 내 소원이 이와 같고, 내 정 또한 이러한데 낭자는 어찌 나를 배반하려하오?”
미인이 말하기를,
“첩이 어찌 낭군의 온정을 저바릴 수 있겠나이까? 첩의 눈썹이 검고 두 뺨이 붉은 것을 보시고 사랑하시나 이는 다 헛것이요, 참된 모습은 아니오니 이는 모두 요사한 꾀로 교모하게 꾸며서 산사람으로 하여금 상접케 하려 함이나이다. 만일 낭군이 첩의 참모습을 보고자 하실 때에는 두어 조각 백골에 푸른이끼가 얽혀 있을 따름이오니, 이 같이 추하고 더러운 물건을 귀하신 몸에 어찌 가까이 하시려 하나이까?”
한림이 말하기를,
“부처님 말씀에 사람의 몸은 물거품과 바람 꽃을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 하였으니, 뉘가 능히 참을 줄 알며 또 거짓인 줄을 알아보리오?”
이끌고 들어가 자리에 누워 그 밤을 편하기 지내니, 오가는 정이 전보다 몇갑절 더한지라, 한림이 미인더러 일러두기를,
“이제부터는 밤마다 만나서 어색함이 없도록하오.”
미인이 대답하되,
“사람과 귀신이 길이 비록 다르나 깊은 정에 이르는 바에는 서로 자연히 감응되나니, 낭군이 첩만 생각하심이 실로 지성에서 우러나는 것이온즉 첩이 의탁하려는 마음 또한 어찌 간절치 않으오리까?”
이윽고 새벽 종소리에 여인이 일어나 꽃나무 사이로 사라지니 한림이 난간에 의지하며 보낼새, 밤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나 미인이 대답치 아니하며 총총히 가버리더라.
첫댓글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
항상 좋은일 가득하시고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십시오.
久久自芬芳 오래도록 향기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