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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3-4
앉아서 죽을 순 없다 / 박경수 목사
B.C. 496년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는 월(越)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합려는 화살에 맞아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 누운 합려는 죽기 전 그의 아들 부차(夫差)를 불러 이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였다. 부차는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겼다. 부차의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월나라 왕 구천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대패하였고, 오히려 월나라의 수도가 포위되고 말았다.
싸움에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견디지 못하고 오나라에 항복하였다. 포로가 된 구천과 신하 범려(范蠡)는 3년 동안 부차의 노복으로 일하는 등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겪었고, 구천의 아내는 부차의 첩이 되었다. 그리고 월나라는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고, 목숨만 겨우 건져 귀국하였다.
그는 돌아오자 잠자리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거나 눕거나 늘 이 쓸개를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너는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잊었느냐!”하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이후 오나라 부차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북벌에만 신경을 쏟는 사이 구천은 오나라를 정복하고 부차를 생포하여 자살하게 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의 일이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와신상담 (臥薪嘗膽)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 나라를 되찾는 일은 오직 오기가 있느냐 없느냐에서 시작된다. 오기(傲氣)란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다.
1986년에 태어나 대전의 중학교를 졸업한 뒤 민족사관고등학교에 들어갔다. 2004년 2월, 민사고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조기졸업하고 곧이어 하버드, 프린스턴, 스탠포드, 코넬, UC 버클리, 존스 홉킨스, 듀크, 미시건 주립대, 워싱턴 대, 노스웨스턴 대 등 미국의 명문대학 10곳에서 동시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박원희는 최종적으로 하버드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박원희가 이루어낸 성과를 보고 그녀가 대단한 천재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그녀는 ‘수학을 못하는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고등학교 때는 ‘꼴찌 3인방’에 낀 적도 있다. 단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목표를 최고로 잡지 않은 적이 없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오기와 열정이 그녀의 오늘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린 그녀가 책을 썼다. “공부 9단 오기 10단.” 남들보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지기 싫어하는 성격, 오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오기가 없는 학생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확률은 0%이다.
성경에서 오기의 대명사를 꼽으라면 단연 야곱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오기의 사람이었다. 형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으로 나가자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비록 형이지만 혼자 잘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있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한국인의 심성을 표현한 것 중 부정적인 의미로 “갯벌의 게”라는 것이 있다. 갯벌에서 게를 잡아 망태기에 넣으면 얼른 뚜껑을 닫아야 한다. 그런데 게를 두 마리 잡게 되면 뚜껑을 닫을 필요가 없다. 하나가 나가려고 하면 아래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절대로 나갈 수가 없다. 야곱이 꼭 그 모습이다.
야곱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형이 장자의 복을 받는다고? 그걸 내가 받고 싶다. 아버지의 축복을 절반이나 당연하게 받는 장자의 권리를 왜 나는 받을 수 없는가? 야곱은 남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하나님의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서에게서 빼앗으셨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한다. 내가 받을 자격은 없지만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받고 싶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다. 그래서 주시고 싶으셨다.
야곱의 겉모습은 연약하다. 여성스럽다. 강한 면이 보이지 않는다. 꺾일 듯 휘청거리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다. 그것이 야곱의 장점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2002년 3월 도쿄대 졸업식.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고시바 마사토시 명예교수(물리학)가 환등 장치의 스위치를 켰다. 화면에는 그의 도쿄대 졸업 성적증명서가 비춰졌다. 양양가가양양양…….
16과목 중 14과목이 ‘양’ ‘가’로 채워진 성적표를 가리키며 66세의 노학자는 말했다. “학업 성적이란 배운 것을 이해하는 수동적 인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동적 인식’입니다.”
7개월 뒤, 고시바 교수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 통보를 받았다. 1987년 우주에서 날아온 중성미자(中性微子·뉴트리노) 관측에 성공한 지 15년 만이었다.
고시바 교수가 말하는 성공 키워드의
첫째는 ‘오기’이다.
양가의 인생으로 끝마칠 수는 없다는 오기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오기이다. 미국 로체스터대로 유학을 떠난 그가 박사학위 취득에 걸린 1년 8개월이라는 기간은 이 학교의 최단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오기에 대해 정부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의 오기를 보면 지원하지 않을 것도 지원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연구자라면 머릿속에 연구를 위한 알(卵)을 적어도 3개는 품고 있어야 한다.” 그가 후배 학자들에게 주는 충고다.
머리가 비어 있는 사람의 오기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빈축만 불러오게 된다. 다람쥐가 목표도 없이 쳇바퀴만 열심히 돌리면 무엇 하겠는가! 결국은 자신의 인생만 비참해질 따름이다.
왜 세상 속에서 지옥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머릿속에 하나님의 선한 것이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이 돈을, 권력을,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아무런 선한 것이 들어있지 않으면서 돈과 권력과 문화를 가졌으니, 얼마나 세상이 타락하겠는가!
고시바에게 물었다.
당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언제나 돈을 벌 수 있겠느냐고. 자기도 모르겠단다. 한 백 년쯤? 빨리 이익을 보아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고시바를 보면 안줄 수가 없다. 주고 싶다. 그의 오기를 보면서 어떻게 안줄 수 있겠는가?
야곱은 도둑놈이다.
형의 것을, 삼촌의 것을 빼앗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축복을 주고 싶어 하신다. 야곱을 보면 안 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73세까지 살았다.
당시로는 오래 산 편이다. 그가 노년에 이르러 살아온 평생을 되돌아보며 쓴 글에서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세웠고, 삼십에 이르러 자립하였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고 하였다. 열다섯 살이라면 지금으로는 중학교 2∼3학년에 이르는 나이이다. 이른 나이에 뜻을 세운 편이다. 성경에도 공자와 비슷한 나이에 뜻을 세워 평생에 걸쳐 그 뜻을 성취한 탁월하였던 인물이 있다.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십대의 나이에 뜻을 세워 그 뜻을 이루어 나감에 인생을 통째로 투자하였다. 그것도 바벨론 제국에 노예 소년으로 끌려간 처지에서다. 그는 절망적인 자리에서 오히려 뜻을 세워 당대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뜻을 세우는 일, 즉 입지(立志)”라고 말한 이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이다. 율곡은 입지가 중요함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40세에 지은 성학집요(聖學輯要)와 42세에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첫째 장에 ‘立志’란 제목을 붙였다.
동양에서 ‘뜻을 세운다.’는 말에는 ‘자신이 세운 뜻에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가 배어있다. 하다가 안 되면 그만둔다는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공자는 15세 나이에 학문에 그런 뜻을 세웠기에 성인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고, 다니엘은 십대 소년의 나이에 그렇게 뜻을 세웠기에 노예 소년의 신분에서 떨치고 일어나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다니엘의 일생을 살펴보면 뜻을 이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어떤 경지인지를 능히 짐작케 된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아 다닌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왕하 2:9).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시려는 것을 안 엘리사는 엘리야 옆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눈치를 보니 엘리야도 자기를 떼놓으려는 것 같다.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좇아간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엘리사의 이유 있는 오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참 귀하다. 엘리사는 그의 소원대로 엘리야의 갑절이나 되는 능력을 얻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엘리사이다. 엘리야가 말하는 대로 벧엘 또는 여리고에 주저앉았다면 가능했을까? 나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뻔히 알기에 그 말에 순종했다면 가능했을까?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왕하 7:3).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아람이 이스라엘을 포위했던지, 사마리아 성 안에는 먹을 것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주변의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다. 내 안에도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다.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살아날 수 있을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열왕기하 7장의 관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작은 나병환자들이다. 나병환자들은 세상이 버렸고, 가족이 버렸고, 자기 자신도 버린 사람들이다. 나병환자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자신들이야 어차피 버린 몸이고, 자신들이야 어차피 기대할 것이 없는 인생이다. 그런데 이렇게는 죽기 싫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린 모습으로 죽기는 싫다.
오기가 발동 걸렸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인생인데, 무언가 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일이 잘못되어서 무언가 잃을 게 있는 인생이라면 할 수가 없지만, 이미 다 잃었다. 가진 것이 하나 없다. 그러니 아까워서 하지 못할 것이란 없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물속에 진주를 빠뜨렸다. 이 사람은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큰 바가지로 바닷물을 떠서 버리기 시작했다. 그가 사흘 동안을 끈기 있게 물을 퍼내고 있을 때 물 속에서 거북이가 나와서 물었다. “당신은 무얼 하려고 물을 긷고 있소?” “바닷물 속에 빠뜨린 진주를 찾으려고 물을 푸고 있소.” “그런데 그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오?” “물론 이 바닷물을 다 퍼낼 때까지 하지.” 이 말을 들은 거북이는 깜짝 놀라 물속으로 급히 들어가서 진주를 찾아다가 그 사람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진주를 잃었다. 내 생명보다 소중한 진주를 잃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 말고도 귀한 것이 많이 있다고? 그럼 바닷물을 퍼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절대로 하지 않는다. 무엇하러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고생을 하겠는가? 남은 것이 있다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다.
도종환 시인은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전교조라는 이유만으로 해직된다. 아내마저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난 후, 도종환은 이때를 가장 어려운 시기로 꼽는다. 이때 그의 눈에 담쟁이가 들어왔다. 잘 나가고, 돈도 많이 벌 때는 이 담쟁이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하잘 것 없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담쟁이가 눈에 들어온 것은 스스로 보기에도 볼 품 없는 자신의 신세 때문이었다. 담쟁이를 보며 인생의 진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
결국 /
그 벽을 넘는다.”
진정한 예수쟁이는 맷집이 좋다. 진정한 예수쟁이는 다시 시작하는 ‘오기’, 부활의 능력이 있다. 진정한 예수쟁이는 ‘나’가 아닌 ‘우리’가 함께 할 줄 안다.
기적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던 나병환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기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서 시작되었다. 몸부림치며, 부르짖으며,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서는 바로 나에게서 시작되었다. 진정한 오기, 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기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