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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작가정신의 형상화
- 박인애의 인간세계와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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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미학을 통해 ‘예술미는 자연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술을 정신적인 소산으로 여겼으며, 예술의 목표가 단순히 자연을 모방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느끼는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예술을 정신화의 과정으로 보고, 완전한 재현과 모방은 영혼과 생명력이 없는 것이라 치부하였다. 즉 예술을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 근본적인 변형을 거쳐 진리를 감성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라 여겼다. 예술의 힘은 바로 개인의 실제 얼굴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그의 정신적 내면, 진실된 실재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리는 데 있다는 차원에서 박인애의 수필 <I have a dream>은 헤겔의 예술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흔히 문학은 인간과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동시에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삶에 대한 교훈과 진리를 전달한다. 그것은 문학이 일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안목에 따라 재구성됨을 물론이요, 독자들이 소망하는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모방하거나 일방적인 교훈을 나열하는 식이라면 독자들에게 감흥과 깨달음을 제공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술은 형식과 내용미의 적절함 속에 개인의 목적과 사회의 목적이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가 실현되는 것을 꿈꾸는 박인애는 그런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사건들을 구체화를 위한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앞서 논의한 헤겔의 미학 이론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는 작가 한 명을 소개한다. 바로 수필가 박인애다. 박인애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다양한 장르에 담아 작품화하였고,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와 더불어 삶과 흐백 인종간의 화합을 전제로 삶의 이치를 내포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수필작가에게 체험은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진 사실체험과 상상체험을 두루 포괄한다. 작가의 무의식적인 꿈과 현실 속에서 체험한 상상이나 몽상이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결국 「I have a dream」은 인종갈등이 비교적 전무한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한 미국에서 살면서 겪었던 인종 차별의 심각성이 메시지로 내재화되면서 수필로 태어난 것이다. 낯선 타국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이민자의 시선을 킹 목사의 미래비전과 연결시켜 해석해낸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작품의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서 박인애의 작품 속에 내재된 작가정신이 유독 강한 이유를 심도 깊게 밝혀보려 한다.
II. 박인애의 인간세계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문학과 친구가 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이방인으로 느껴질 때 지푸라기도 잡고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때 문학은 그녀에게 숨통을 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외로운 그녀에게 문학은 마음을 치유해 주는 의사이자 안식처였다. 그녀의 습작 행위는 어느 유명한 작가의 글보다 위대했으며 마음을 달래주는 최상의 걸작이었다. 문학의 가치는 스펙이나 액세서리가 아니라 작가와 독자 간의 진실이 소통하는 글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 달라스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수필을 지도하며, 후진을 기르고 있다.
우리의 삶이 다양한 만큼 때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달라지므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모든 문학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의 꿈은 전 장르를 아우르는 전방위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런 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다들 비웃는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문인이 그녀에게 ‘시나 열심히 쓰지 왜, 이것저것 기웃 거리냐’며 빈정거리던 투의 일침이 마음 아팠던 모양이다. 그녀가 장르를 넘나들며, 전방위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녀의 문학적인 갈망에 있다. 그녀는 글 소재를 보는 순간 어떤 장르로 쓰면 좋을지 고민을 하게 되고, 소재에 따라 장르를 정한다고 한다. 이런 자신의 창작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장르를 넘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누가 비웃든 말든 그녀는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서 말한 바와 같이, 후회하지 않게 그녀도 자신이 가 볼 수 있는 길을 다 가보고 싶다고 밝힌다. 그 길이 박인애 작가를 탈장르로 안내하는 유혹의 길잡이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창작 행위는 늘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한다. 혹, 그녀를 가슴앓이 하게 하는 짝사랑이 아닐까. 그녀의 이력을 보니 문예사조 시 부문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나와, 제3의 문학 시 부문 3회 추천 완료, 에세이문예 수필 신인상 당선, 서울문학인 소설 신인상 당선, 미주아동문학협회 동화 신인상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세계시문학회 이사, 달라스한인문학회 5대 회장 역임 및 현 고문, 제3의 문학 운영위원, 한국문예사조 문인협회 회원, 한국본격수필가협회 미주지회장, 뉴스코리아 칼럼니스트 등 무지 화려하다. 제29회 세계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수필집 『수다와 입바르다』와 시집 『바람을 물들이다』를 출간한 데 이어 제2수필집 『인애, 마법의 꽃을 만나다』출간을 앞두고 있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나면 책을 읽거나 랩탑을 펴 놓고 자판을 두들기는 그녀에게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세요?”하고 물어올 때마다 대답이 난감했다고 한다. 대답 대신 본인 저서라도 있으면 ‘제가 하는 일이 이런 겁니다’ 하고 전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단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수필집 출간을 앞두고 무척 설렌다고 한다. 이번 수필집 출간에 대해 그녀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한국본격수필가협회 미주지회장의 중책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박인애보다 수필가 박인애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한여름이면 40도를 넘나드는 텍사스에 이민을 와서 산 지가 이십 년이 넘었다. 달라스는 그녀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특별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곳에 뼈를 묻고 싶단다. 아침마다 새로운 구름을 선물해 주는 하늘과 들판의 야생 해바라기,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장이 행복을 만들어 주고 있다며 활짝 웃는 그녀다. 늘 자기편인 남편과 딸을 잘 키우며 달라스 지킴이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수필에 거는 기대가 크다. 비록 이민문학이 소수문학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좋은 기회로 삼아 작은 힘이나마 이민문학에 일조하고 싶다는 그녀의 야심 찬 각오에 찬사를 보낸다.
건강이 허락되면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는 그녀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문학의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졌으리라 생각한다. 배우는 데 나이는 별로 중요치 않다며 지식을 쌓아가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III. 박인애의 수필세계
박인애의 수필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산야에 피어있는 들국화나 맑은 가을 하늘 배경의 청초한 코스모스처럼 서정성으로 무장된 고운 수필이고, 다른 한 주류는, 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이 번득이는 빛나는 수필이다. 이번에 분석하고자 하는 수필은 후자에 속한다. 사회의 등불이 되지 못하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하는 수필은 일반 수필은 될 수 있어도 사실상 훌륭한 수필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앙가주망’의 작가의식이 빛나는 수필이 바로 <I have a dream>이다. 수필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자신의 삶과 철학을 보여주고, 자신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솔직하고 고백한다는 점에서, 작품은 작가와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통로다. 그 고상한 만남을 위해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로 살고 있는 한 작가의 철학과 작가정신의 메카니즘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미국에 와서 한동안은 공휴일의 날짜가 왜 매년 바뀌는지를 몰랐다. 아니, 어쩌면 먹고 사는 문제가 급급해서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고, 그저 달력에 빨간 글씨가 있으면 오늘은 일을 안 가도 되는 날인가 보다 여기며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휴일은 날짜가 고정되어 있는 데 반해 미국의 공휴일은 설날과 크리스마스 등 몇 개를 제외하면 거의 다 몇 월, 몇째 주, 무슨 요일이라고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날짜가 바뀐 것이다. 그러던 내가 미국 국경일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저 노는 날이 아니라 기념하고 동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미국에서 산 세월이 짧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 수필의 발단부는 서두의 여러 기능 중에서도 접근단계로 되어 있다. 주제는 제시되지 않았다. 수필은 귀납법적인 추리로 직조되는 특성을 아는 작가라면, 주제를 글의 앞부분에 배치시키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접근단계는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나 일화를 다루는 게 일반적이다. 접근단계는 발단부 기능에서 가장 덜 중요한 요소라 보지만, 본격수필작법 차원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제를 전략적 차원에서 내면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발단부에 한국과 미국의 공휴일 운영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한국과 미국은 국경일의 관습도 다르다는 데에 방점을 찍는다. 이는 접근단계일 수도 있고, 전계예고 기능도 띤다고 볼 수 있다. 전개부에서 일어날 사건이 국경일과 필시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독자는 예측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월 셋째 주 월요일은 'Martin Luther King Jr. Day'였다. 그날을 기해 미국의 대부분 극장에서는 ‘SELMA’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1965년,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이 시민들과 함께 흑인의 참정권을 요구하며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하던 중 경찰들의 과잉진압으로 많은 사람이 다치고 피를 흘렸던 사건을 다룬 영화였다. 퍼거슨 사건 이후, 아직도 공권력을 가진 자들의 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민감한 시기에 50년 전의 사건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 것이 괜찮을지 염려가 되었다. 곪은 것을 짜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불편한 역사적 진실이라 해도 후세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자칫 로스앤젤레스 폭동과 같은 사건으로 번지면 어쩌나 하는 좁은 소견 때문이었다. 미국의 주요 미디어들이 흑백갈등을 교묘하게 한흑 대결 구도로 몰아가면서 제삼자인 한인 가게들이 억울하게 방화와 약탈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그 상처가 지워지지 않은 한인들은 흑백갈등이 생길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발단부의 전개예고가 이미 있었지만, 역시나 전개부 첫 단락은 미국의 국경일과 흑백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한흑갈등의 배경을 작가는 이민자로서 우려의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그릇된 현실타파를 외치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을 호소하는 것이라 본다. 이런 측면에서 안인애는 지식인으로서 작가라는 공인으로서 수필을 통해 미국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하고, 미국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백인의 횡포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저항하려 했다.
근간 미국 풋볼팀인 Saint Louis Rams 소속 선수들이 입장하면서 두 손을 위로 올리는 동작을 취하며 퍼거슨 시위를 지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Hands up, don’t shoot, 손들었으니 쏘지 말라는 의미의 이 동작은 시위 지지자들 사이에 상징이 되어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작년에 상연한 바 있는 ‘Fruitvale Station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 역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죽은 흑인 남성의 실화를 다룬 것이다.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비무장이었는데 왜 죽였는지 너무 마음이 아팠다. 오스카의 불행도 퍼거슨 시에서 일어났던 불행과 다를 게 없었다. 퍼거슨 소요는 단순한 경찰의 과잉진압이냐 정당방위냐의 법적 논리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흑백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흑인 가해자들이 대부분 불기소되거나, 기소되어도 무죄로 풀려났기 때문에 흑인들의 항의는 계속되고 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사회적 소득 불평등의 심화, 즉 경제난에 직면한 흑인들의 불만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 작가는 어쩌면 피로써 수필을 쓰고 잇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불완전한 미국사회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어린 시각을 유지하는 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누구를 불문하고 작가에게는 글로써 지켜야 할 진실이 있다. 박인애는 이런 차원에서 소수자의 길을 택했다고 본다. 언제나 정의 편에 서고, 약자의 편에 서고, 서민의 편에 서고, 지배집단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모든 권력에는 항상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오염된 지배집단을 겨냥하고 갑질하는 백인의 행패를 정조준하는 글을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져 옴을 느낀다. 문학인에게는 이런 지배층의 오류를 감시ㆍ감독해야 하고, 그늘진 곳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회적인 책무가 있다. 박인애는 문학의 멋과 맛을 살리기 위해 직설적인 비판이나 비난 대신 객관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수필에 저항적 메시지를 담아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잇는 것이다.
퍼거슨의 빈곤율은 2000년 10.2%에서 2012년 22%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또한 흑인 인구가 2010년에는 67%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정치적 권력의 자리인 시장이나 시의원, 경찰은 소수 백인의 전유물이 된 것 역시 이번 소요 사태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내용을 이미 여러 매체에서 강조한 바 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이후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과 억압이 종결되었는지 모두 반성해 보아야 할 일이다. 타 인종에 대해 편견이 있거나 무시하고 비하한 적은 없었는지 말이다. 미국에만 노예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노비제도가 있었다. 아마도 어느 나라든 강한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며 살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잘못된 악행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아무쪼록 퍼거슨 소요가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인애는 사회 수필을 통해서 줄기차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사회 지배층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이후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과 억압이 종결되었는지 모두 반성해 보아야 할 일이다. 타 인종에 대해 편견이 있거나 무시하고 비하한 적은 없었는지 말이다.”라는 문장에는 특권을 향유하는 것에 상응하는 도덕적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회지도층의 책무', 즉 부나 권력 또는 명예를 갖고 있는 지도층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안인애 수필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대표작 <고함과 분노>, <에밀리를 위한 장미> 등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한다. 초기 로마시대의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것이고, 이러한 정신은 박인애 수필을 관통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초기 로마시대 사회 지도층은 전쟁에서 앞장서는 것은 물론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검소한 삶을 살고 과소비를 하지 않았으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지 않았고, 물질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지도층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남다른 의무가 지워졌다. 지배층이 특권을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면서 부를 사회에 환원할 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수필이 내세우는 핵심 가치이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목숨은 없다. 다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 땅.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같은 하늘 아래서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품어주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제란에서 해방된다면 금상첨화일 테고 말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저의 네 아이들이 언젠가는 자신들의 피부 색깔에 의하여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격에 의하여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나라에서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 Martin Luther King Jr. 의 I have a dream 중에서-
킹 목사가 간절히 원했던 꿈이 비단 피부색이 검은 자녀를 둔 그에게만 적용되는 말이었을까? 어쩌면 타국에 와서 사는 이민자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지 모른다. 남녀와 흑백이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이 땅 어딘가에서는 알게 모르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킹 목사의 “I have a dream”이 깊이 와 닿는 아침이다. 나도 킹 목사가 소망했던 그런 세상이 오길 꿈꾼다.
위 인용문은 결말부다. 결말부는 발단부에 나오지 않았던 주제를 형상적 체험으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작품의 제재나 주제에 관련되는 재료나 생각을 다루는 차원에서 작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을 의미화 대신 활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사회지도층의 행동철학이 되었다. 물론 세상이 변하면서 사회지도층의 의미도 달라져 왔고 그들의 책무도 달라졌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귀족의 존재가 사라진 지금 미국에서 노블레스의 자리는 권력을 가진 백인 정치가나 재력을 소유한 백인 자본가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이나 왕족의 책무가 아니라 '가진 사람'들의 책무인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언명과 실천이 함께 가지 않는 게 문제다. “킹 목사가 간절히 원했던 꿈이 비단 피부색이 검은 자녀를 둔 그에게만 적용되는 말이었을까? 어쩌면 타국에 와서 사는 이민자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지 모른다.”라는 말 속에는 아직도 사회지도층 스스로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내세우기 쉽지 않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흑인뿐만 아니라 제3지대 이민자들도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IV. 로그아웃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불우한 의식을 가진 자’로 규정한다. 사회 중간 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배계급은 지식인을 지배수단을 연구하는 단순한 기능인, 다시 말해 불편하더라도 없으면 안 되는 필요악으로 여기고, 반면 피지배계층은 지식인을 지배계층의 앞잡이로 볼 따름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권한의 밖’까지 관여할 때 지식인은 비로소 진정한 지식인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르트르가 지적한 ‘권한의 밖’은 바로 어떤 경우라도 작가는 당하는 자의 편에 서야 하고, 진실을 묵살하고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의 폭력에 저항하고 그들이 감추려는 진실을 드러내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인애는 지식인의 역할을 다 한다. 그래서 “남녀와 흑백이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이 땅 어딘가에서는 알게 모르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라고 단언한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파수꾼이며 그 시대의 등대로 서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역할은 오늘에 있어 중차대하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기에 수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박인애 수필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작가의 사상과 시대를 꿰뚫는 정신을 탐색할 수 있다. 박인애는 역사의 흐름을 좌시하지 않고 거짓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지성의 눈을 가졌기에 사람들을 감동토록 할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주민이 살고 있는 위기의 미국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고, 이 험난한 이민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소중한 조언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가 아무리 속화되고 물화되더라도 이 작품은 시대의식의 변화를 초월하여 존재의 원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이끌어 내고 아울러 미국사회가 아무리 혼탁해진다 해도 현실의 모순을 자각케 하고 모순의 흔적을 쫓아 초월하며 피안의 세계를 사유케 하기 때문에 가치와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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