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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한 구례여행
여행은 기다리는 가슴이 있어 좋은가 보다. 예닐곱 살 된 어린애처럼 여행이 기다려졌다. 아내도 허리 아픈 것도 잊은 듯 동생을 만나러 가는 날을 기다렸다.
우리는 이마트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가방 속에 넣고 미라가 늙은 내 얼굴에 스킨이랑 크림, 파운데이션을 진하게 묻혀주니 제법 얼굴이 환해 보였다. 20kg 남짓한 된장이 담긴 배낭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 호주머니 안의 지갑 속엔 미라가 넣어준 노잣돈을 두둑히 넣고. 드디어 택시를 타고 서대전역에 도착하여 10:36 출발 여수행 새마을 열차에 몸을 담았다.
오랜만에 타보는 열차 안에서 아내는 딸과 함께 도란도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는 모녀가 서로 비슷한 모습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12:40 구례역에 도착한 우리는 구례 오일장을 구경하려고 택시에 올랐다.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한 택시기사는 우리를 시장 입구에 내려놓았다. 시장이 제법 그 규모가 컸다. 짙은 비린내 풍기는 생선 시장을 지나 이곳 시장에서 팥죽을 먹어보는 것이 좋다는 소문을 기억하여 팥죽을 파는 식당에 들어섰다. 아주 오래된듯한 허름한 식당 안 낡은 의자에 앉아 새알 팥죽이랑 칼국수 팥죽을 주문하니 나이가 지긋한 노파가 “맛있게들 드시오 잉.” 하며 팥죽을 놓고 간다. 아내가 끓인 팥죽보다 훨씬 맛이 없는 멀건 팥죽을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성암으로 가기 위한 택시를 잡아타고 먼저 구례 대나무 숲에 내려 대나무 숲에 들어섰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 들어서니 술렁이는 대나무 잎 소리와 맑은 공기 때문인지 가슴이 서늘하니 좋았다. 섬진강을 옆에 두고 곧게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대나무들은 수십 m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유유히 걸어가는 모녀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고, 미라는 제 엄마와 아빠를 대나무 숲속에 세워놓고 “엄마! 제발 자연스럽게 해.”하며 어색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몇 장 담는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며.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카페 안에 들어가 미락칼국수 집에서 즐겨 먹는 칼국수 값을 훨씬 능가하는 고가의 커피를 마시고 택시에 올랐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한여울 시인이 적극 권 하였던 사성암을 향하는 택시는 섬진강 변을 지나 드디어 사성암 바로 앞에 세워준다. 전기차 덕택에 높은 사성암 앞마당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기사를 기다리게 한 후 차에서 내려섰다.
사성암은 오산에 자리하여 오산암이라 불려오다가 4명의 고승 의상대사,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하여 사성암이라 불린다고 한다. 해발 531m의 바위산에 암자를 지어놓은 선인들의 건축법이 신기할 정도로 바위 절벽에 암자를 올려놓고 있었다.
기암절벽 위에 서서 멀리 보이는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과 넓은 구례평야를 바라보고 향등쌀을 한 봉투 사 들고 암자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바위 돌로 깔아놓은 암자에 오르는 길이 너무나 높고 험하여 미라는 좁은 마당 위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아내와 나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돌길에 들어섰다. 아내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 나오는지 나도 놀랄 정도로 잘 오른다. 나는 간단히 기도를 드리고 열두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애타게 빌고 비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기도를 마친 우리는 늦가을에 걸맞지 않게 따스한 햇볕을 온몸에 적시며 돌층층대 길을 내려왔다. 아내는 50 평생을 고생만 시키며 살아오게 한 나의 팔짱을 낀다. 멀리 서산의 해님은 우릴 따스하게 비춰주며 넘어가고 있었다. 암자를 내려오는 아내와 나의 모습이 오래오래 기억될 것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정서와 추억 때문에 여행을 다니나 보다.
우릴 기다리던 기사의 택시에 올라 숙소로 향하는 차 속에서 한여울 시인이 카톡으로 보낸 시를 읽어보며 갔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었다.
모난 돌 여럿 모여 땀 범벅된 육칠 계단
마음속 소원들을 부처님 아시라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빌고 빌고 또 빌고
빌고 다시 빌어 소원 성취 가능하면
무릎이 다 닳도록 소원 바위 안으련만
욕심이 끝이 없으니 맘 비움만 못하지.
부처님 머무는 곳 저 하늘 어디인가
긴 기둥 떠받치고 돌계단 쌓았어도
무심한 범생이 눈엔 땀 방울만 열렸다.
드디어 택시기사는 우리를 숙소 ‘지리산 풍경’ 앞마당에 내려놓았다.
여섯 시 남짓한 시각에 숙소 앞에서 만나자던 대성조카와 처제가 자동차 안에서 우릴 보고 빙그레 웃으며 나온다. 아내는 처제를 끌어안고 반가워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자매의 만남은 마치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방불케 하고 있다.
멀건 팥죽이 들어있는 뱃속을 달래려고 펜션 바로 아래에 자리한 강남식당으로 들어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주인의 안내를 받아 자리하여 앉으니 피곤이 밀려와 나른하다. 기다란 식탁 위에 남도 특유의 음식상 차림이 시작된다. 차림상이 대단하다. 내가 앉아있는 등 뒤의 벽에 “축! 아빠 팔십 생신”이라 써 붙여도 될 만큼 갖가지 요리들이 푸짐하게 놓여 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모두 맛있게 먹는다. 나는 조카와 딸이 따라주는 산수유 막걸리를 마셔가며 맛있게 먹었다. 누군가 내게 “가장 즐거운 여행이란 어떤 것이요?”라고 묻는다면
“마음이 맞는 친구와 호주머니 걱정하지 않으며 먹고 싶은 것 싫건 주전부리하며 세상이 마치 내 것 인양 어정거리며 구경하는 것이오.”라고 말할 것이다. 배 속을 채운 우리는 팬션 101호실에 들어가 그동안 쌓였던 얘기들을 털어놓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처제는 한 이불 속에서 함께 누워서이고, 나는 마당쇠 되어 거실에서 아내와 처제의 정다운 얘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나라로 갔다.
이튿날 네 시 남짓하여 눈을 뜨고 누워있으니 아내와 처제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컴컴한 아내 방에 들어가 장승처럼 우뚝 서 있으니 처제와 아내가 “아이고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무섭게 해요?” 나는 능글맞게 지긋이 웃으며 생각한다. 여자들이 무서워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재미 중의 재미가 아닌가 하고. 아내는 먼 훗날 “당신, 구례 여행하던 날 새벽 왜 그렇게 날 무섭게 서 있었어요?”라고 말하겠지.
나는 숙소를 떠날 시각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화엄사를 미리 들려 자세히 살펴보겠다는 생각에서 사찰을 향하는 길 위에 들어섰다. 아직은 이른 새벽이라 인적은 드물고 산새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청량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계속 걸으니 일주문이 나를 반긴다.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니 남도 제일의 사찰답게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앉아있다.
나는 사찰 맨 위에 자리한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절을 하고 우리 열두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빌고 나오니 멀리 보이는 높고 낮은 산들이 아침 햇살을 받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부처님 앞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안온하니 참 좋다. 절을 둘러싼 소나무 숲과 절 냄새도 참 좋았다. 사람들은 바로 이 기분을 맛보려고 절을 찾나 보다.
숙소에 들어서니 아내가 절에 가겠다고 처제와 딸을 데리고 나서며 “ 절이 멀어요? 우리랑 다시 가요.”한다. 아내와 함께 다시 절에 가기로 했었는데 생각보다 절에 가는 길이 멀어 “너무 피곤하여 못가겠으니 당신이나 다녀와요.”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2km 남짓해 보이는 길을 다시는 못 걸을 것 같았다. 나이를 누가 이기랴. 내가 벌써 팔십이 아니냐?
숙소에 누워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데 아들이 전화를 해온다.
“아버지 뭐 하세요?” 나는 “화엄사에 다녀와서 숙소에 혼자 누워있어.”라고 대답하니
아들이 일갈한다. “왜 혼자 절에 다녀오셨어요? 누나랑 엄마랑 이모하고 차라도 한 잔 하시지 그랬어요?” 아들 말을 듣고 보니 후회가 되기는 되었다.
사찰에서 돌아온 미라가 “우리는 차 한 잔씩 하고 엄마는 기도드리고 왔어요.”라며 출발할 준비를 서두른다.
10시 남짓 되어 대성조카의 차에 올라 조카가 가자는 대로 몸을 맡겼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가 처음 멈춘 곳은 운조루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고 전한다. 명당터인 이곳에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하는데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쌀독을 놓아 음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오늘 내가 행랑채를 들어서려니 허름한 옷을 입은 노파가 입장료 1,000원이라 써놓은 종이 앞에서 콩을 두어 봉지 놓고 팔고 있다. 바로 옆에는 1,000원짜리 지폐가 대 여섯 장 그릇 속에 놓여 있었다. 아마 후손인듯한데 조상이 베푼 음덕을 이제 와 받으려는 뜻인지 가슴 속이 착잡하였다. 원래 99칸 되는 웅장한 건물이 지금은 73칸만 남아 있다는데 허물어진 지붕 위에 커다란 천막이 덮여있어 흉물스럽게 보였다. 고택은 자세히 보지 않고 뒤뜰을 지나 소나무 숲이 있는 언덕길을 돌아 내려왔다. 그 옛날의 영화는 흔적이 없고 명당이 될만한 밭에 심어 늦가을 맞이하는 배추들이 외롭게 앉아있었다. 허물어져 주저앉은 헛간인듯한 집은 내 가슴 속을 허허하게 하였다.
운조루를 뒤로하고 찾아간 곳은 쌍산재였다. 쌍산재는 해주 오씨 문양공 동경공파가 지은 300여 년 된 고택으로 약 16,500㎡의 정원에 15채, 90여 칸으로 이뤄졌으며 전라남도 민간정원 제5호로 지정됐다고 한다.
나는 쌍산재 대문 앞의 당몰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매표소 입구에서 입장료 10,000원씩을 주고, 미라가 받아온 쌍산컵에 담긴 따끈한 귤차를 들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는 제각기 좋은 장소에 앉아서 마시라고 했다. 우리는 별채로 가는 돌로 깔아놓은 길을 밟으며 따라가노라니 우뚝우뚝 솟아오른 대나무랑 동백 들이 그 특유의 냄새를 풍겨주며 우리를 맞이하였다. 아내는 기분이 매우 좋은지 얼굴이 환하다. 모두 고적한 한옥에서 맛보는 기분에 취하여 차를 천천히 마시며 담소했다. 별채 뒤로 멀리 보이는 연못은 민간정원의 가치를 더해 보였고 내려오는 길옆에서 펼쳐있는 노란 잔디는 아주 잘 손질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쌍산재 정원을 뒤로하고 우리의 자동차는 점심을 먹기 위하여 읍내로 들어섰다. 처제가 맛있다고 권하는 식당에 들어서려니 손님들이 줄을 서 있어 제시간에 먹지 못할 것 같아 다른 식당을 찾아 들어선 곳이 고등어구이 식당이었다. 고등어를 사람수 대로 구어낸 식탁엔 주 음식 메뉴보다 더 많은 반찬을 차려 놓는다. 항아리에 담아온 청국장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 동네의 식당에서 차려내는 청국장값을 능가할 정도로 맛있었다. 아내가 아주 맛있게 먹어서 좋았다.
남도 특유의 푸짐한 점심을 마친 우리는 오늘 일정의 마지막 차례인 천은사로 향하였다.
따스한 늦가을의 햇살이 우릴 덮여 주고 살갗에 닿아 더없이 기분 좋은 바람에 몸을 적시며 천은사 안으로 들어갔다.
천은사(泉隱寺)는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 중의 하나로 신라 흥덕왕 3년 828년 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내가 화엄사를 너무 일찍 찾아보아서 그 웅장한 절의 운치를 느낄 수 없었으나 이곳 사찰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절 전체가 환해 보였다. 우리는 화엄사를 둘러본 것을 빌미로 대웅전의 부처님을 뵙지 않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 앞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미라가 “아빠, 나 인절미랑 생강엿 좀 사줘. 먹고 싶어.”라고 주문한다. 아빠 지갑에 용돈을 두둑히 넣어주고 나에게 어릴 때처럼 해보고 싶어 하는 맘을 내 어찌 모르랴.
인절미 한 봉지랑 생강엿을 사서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우물우물 먹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의 맛이란 여기에 있는 법이 아닌가? 어느 누가 인절미를 우물거리며 생강엿을 빨아 먹고 앉아있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알겠는가? 어느 누가 애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요, 미국에서 잘 나가는 젊은 CEO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집사님임을 알아보겠는가?
아내와 나는 의자에 앉아있기로 하고 처제와 조카는 미라와 함께 호수를 끼고 늘어진 둘레길을 걸었다. 아내는 또 인절미를 사달라고 한다. 소녀처럼 이 모처럼의 여행을 마음껏 즐기려는 심산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아내도 군것질을 좋아하는데 살림하느라 참았던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하였다.
늦은 가을날의 짧은 해는 아직도 서산 위에 높이 떠 있다. 더 둘러볼 곳이 많으나 아내에겐 무리할 것 같아 처제의 집에 들러 쉬었다 가기로 하고 처제의 아파트로 갔다. 처제에겐 미안했다. 살림살이가 흩어진 모습을 형부에게 보여주기가 쉽지 않은 가슴이었을 테니.
처제의 살림살이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는 방안의 액자 속에서 리엘이 우릴 맞이하고 있다.
아내와 미라는 짧은 시간이나마 맛있게 자고 일어나 저녁을 사 먹고 기차를 타러 가자고 재촉한다. 우리는 섬진강 변에 오면 맛봐야 한다는 재첩국을 파는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쉽게 찾을 수 없어 다슬기 수제비를 맛있게 차려내겠다는 식당에 들어섰다. 역시 여러 가지 반찬을 차려 놓고 끓여내는 다슬기 수제비는 맛이 좋았다. 아내는 맛이 없는지 공기밥에 반찬 몇 가지를 집어 먹는다. 재첩국을 먹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린 내가 아내에게 미안했다.
우리는 식당 바로 앞에 보이는 구례구역(구례역이 아니고 구례구역이라 함)으로 가기 위해 처제가 챙겨주는 산나물이 가득 들어있는 배낭을 메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처제와 헤어지는 아내는 또 눈물을 흘리며 운다. 우는 아내의 얼굴에선 장모님의 얼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대성 조카와 처제를 뒤에 두고 6시 15분발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온통 녹색으로 범벅된 촌스럽기 그지없는 의자에 앉아 아내와 딸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갔다.
2022. 11. 24
PS :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글을 애써 쓴 까닭은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는 큰딸의 효심을 기리기 위함에서이다.
첫댓글 길융섭님이 작성한 글인데 읽어볼만한 글이라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