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1] 정수원(鄭壽源) - 소명하신 뜻길 따라 5. 전북지구에서 정열쏟고 - 1 1 이 때 선생님께서는 나를 전북지구장으로 임명하시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다. 나는 ‘이별의 노래’를 불렀다. 전북은 그리 생소하지가 않는 곳이다. 이리(裡里) 교회에서 시무한 적이 있어서다.
2 부임한지 얼마후에 동기계몽기간이 되어서 식구들을 총동원하여 계몽에 참여시키고 7개지역을 자전거로 순회하였다. 첫 목적지인 임실(任實)지역을 갈 때는 폭설로 애를 먹기도 하였다.
3 남원(南原)지역은 1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살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도시락은 지역장에게 드리고 점심은 굶는다고 했다. 내가 순회 갔을 때도 그 학생들이 정성을 모아서 대접해 주었다.
4 순회를 하면서 감회가 깊었던 것은 옛날 이리지역장 시절엔 도보로 순회하면서 활동 했었는데 이제는 지구장으로서 자전거로 순회하게 되니 흐뭇하였다.
5 나는 그후 둘째 아이 건숙이를 얻게 되었는데 순산이었다. 순산한 이유는 엄마가 영양부족으로 애기가 제대로 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기는 크면서도 젖이 부족하여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유를 사서 먹일 수 있는 형편도 못되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6 복귀 섭리의 일선책임자로서 달게 받고 넘어 가야할 십자가의 노정이었기에 묵묵히 넘어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애기를 업고 장사를 다니면서 젖을 먹이는데 젖이 부족하여 늘 울었다. 건숙이가 7살 때 체중을 달아 보니까 3살짜리의 몸무게와 같았다.
7 매월 서울에서 지구장회의를 마친 후에는 부친을 방문하여 신앙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그 말씀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말씀은 “범사에 감사한 생활을 하여야 된다”는 말씀이다. 감사하는 생활은 감사할 수 없는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이 참다운 감사라는 뜻이었다. 8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같은 실력이나 같은 여건인 경우에는 누가 더 많이 활동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지방순회를 자주 하였다. 그러므로 지방식구들과 만나서, 심정적인 인연을 맺으면서 선생님의 사상과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 하였다.
9 1969년 가을에 청년 12명을 데리고 3박 4일 예정으로 지리산(智異山) 정복에 나섰다. 남원(南原)의 운봉(雲峰)을 거쳐 천왕봉(天王峰)에서 1박을 하고 지도상에 나와 있는 샘물을 찾아 보았으나 샘이 없어서 4km 후방으로 가서 아침을 지어 가지고 와야했다. 지휘자의 오판으로 헛수고를 한 것이다. 우리는 3박 4일을 같이 지내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함으로써 단결과 협동으로 하나가 되어 갔다. 10 1966년 4월 선생님께서는 각 지구장들에게 찦차를 하사하여 주셨다. 그때는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늘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지방교회를 순회하면 식구들이 더 기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