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0, 17 – 27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지난주 예고해드린 대로 이번 주일은 실시간 방송을 하지 않고 강론만 올립니다.
예고 내용은 경북 쪽에서 1박 2일 번개가 있어 다녀온다는 것이었죠.
아마 제가 안동분들과 만나고 올라왔다고 생각하실 텐데,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주에 컨디션이 좀 안 좋았는데, 금요일 밤 갑자기 혈압이 떨어져 아주 더 안 좋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서둘러 번개 취소하고, 동영상 촬영하는 형제도 제 미사 촬영이 없어 일정을 미리 잡으시어,
이렇게 혼자 미사 드리며 강론하고 있습니다.
늘 청년이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나이 먹음을 하느님이 알려주신 싸인이라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건강 때문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게 해서 죄송하고,
기도해 주시는 분들 많이 계신 것 알기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오늘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여러분들 많이 들어 보셨고, 또 평일 미사에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했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짐승은 낙타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는 거죠.
하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면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 예수님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오늘 복음 제일 마지막에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무언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부자가 천국에 가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방법 기억나시죠?
낙타를 죽여 불에 태워 화장하여 재로 곱게 만들어, 그 재를 깔때기로 솔솔 바늘구멍에 뿌린다.
이 과정 하나하나에는 영성적 의미가 있고, 이미 해드린 적이 있으니 혹시 더 듣고 싶으신 분은
‘김웅열 낙타 바늘귀’라고 검색하시면 나올 겁니다.
어찌 보면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 분명히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단 나를 태우는 작업에서 시작이 됩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 들어와서 욕심을 태우고 교만을 태우고 허영심을 태우고 사치스러움을 태우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가루가 되어야 한다 했습니다.
태우고 가루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전에 가끔 명동성당에 가면 명동성당 앞에 가면 뇌성마비 환자로 구걸하시는 성 모세라는 형제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얻은 돈으로 심장병 어린이 재단에 기부하세요.
자기를 위해서는 여관비 2천 원과 하루 한 끼 식사 2천 원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부하세요.
얼마 전에 갔을 때 그분이 보이지 않던데, 기관으로 가신 것인지 세상을 떠나신 것인지는 모르나,
저도 이 이야기를 들은 후 지나가면서 그분을 볼 때마다 후광이 비치는 것 같고 성인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우리보다 훨씬 가난해도 열심히 남을 돕고 사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여러분도 인정하시죠?
사실 오늘 복음 속의 부자는 복음에 나온 대로 온갖 계명을 모두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공경하고, 거짓말도 안 했고, 횡령한 적도 없고, 살인한 적도 없고,
도둑질한 적도 없다며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고 나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하십니다.
이 부자 청년은 정말 자기 나름대로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진 재산까지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무소유의 삶이 된 후에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냥 부자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얼마든지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보면 부자의 아킬레스건을 예수님이 건드리신 겁니다.
청년 부자이니 부모님에게 받은 재산이 많겠죠?
유산을 받았든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든, 계명을 다 지키고 살았다 하니 나쁜 짓으로 모은 돈은 분명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 돈마저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죠.
그 말씀 때문에 청년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제가 무소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했었습니다.
루카 복음 19장 1절에서 10절에 예수님과 자캐오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자캐오는 세리, 그중에서도 제일 놓은 사람이었기에 물질적으로는 정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늘 비단옷을 입고 곡간에는 곡식과 패물함에는 금은보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캐오 가슴은 늘 뻥 뚫어져 있었어요.
왜냐? 아무 친구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금과 맛있는 빵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라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외롭고 적적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자캐오가 죄인을 사랑하는 나자렛 스승 예수님이
이 동네를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상에! 죄인을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니.
물질적으로는 부자였지만, 자캐오는 모든 사람의 공공의 적이었고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죄인을 사랑해주는 분이 우리 마을에 오신다고 하니, 자캐오는 쫓아갑니다.
온몸을 비단을 친친 감았겠죠? 그것이 일상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인산인해.
키 작은 자캐오는 예수님 쪽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모르는 척하며 팔꿈치로 얼굴 찌르고, 이마 때리고, 발 걸고, 기회는 이때구나 하면서
그동안의 미움이 폭력으로 가해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자캐오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이 가실 길옆에 있는 나무에 올라갑니다.
비단옷을 입고 그 미끄러운 비단옷을 입고는 나무에 못 올라갑니다.
자캐오는 그 비단옷을 벗어버립니다.
비단옷을 벗어버리는 순간부터 자캐오는 무소유의 삶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시작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캐오는 그 당시 기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체면과 명예를 비단옷과 같이 내던지고 돌을 모아 나무 위로 힘들게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법한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가시다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자캐오야,’
예수님은 그때 자캐오를 처음 본 것입니다.
이름을 안 적도 없고 누가 옆에서 알려준 적도 없었지만,
나무에 매달려 있는 볼품없는 자캐오를 보면서 이름을 불러줍니다.
‘어이’, ‘여보’, ‘당신’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줍니다.
‘자캐오야.’
그때 자캐오는 그야말로 오만 볼트에 감전된 듯,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세상에! 저분이 내 이름을 알아.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시고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십니다.
집에까지 가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죠.
왜?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자캐오가 죄인인 것을, 세리인 것 모르나?’ 웅성댔지만, 예수님은 자캐오의 집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시기는 하였어도 바로 그 집의 구원을 선포하지는 않으십니다.
자캐오가 강제나 협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캐오 스스로 말을 합니다.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남을 속여 얻은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즉, 청빈 서약에 이어 포기 선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야 예수님은 비로소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자캐오의 청빈 서약과 포기 선언으로 자캐오 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포기 선언, 청빈 선언은 나 자신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내 가족, 오히려 하느님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식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
여러분은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린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정말 하느님 뜻대로 잘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 비록 냉담 중인 형제들이 있다 하더라도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자도 몰랐던 내 친척들도 바로 나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캐오야, 네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너의 집안 전체가 구원받았다.’
정말 자캐오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물질을 포기 함으로써, 청빈 서약을 함으로써 우리는 나누고 또 나누어 가루가 되어야만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바늘귀를 빠져나갈 때 바로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과연 부자는 누구인가?
여러분에게 부자냐고 물으면 아무도 부자라 답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부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데, 사실 이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부자인지 모릅니다.
재벌그룹의 회장도 자신은 부자가 아니라 합니다.
실제로 재벌그룹 회장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참 부자시군요.’ 하니 본인은 아니래요.
그럼 누가 부자입니까?
이 부자라는 개념은 물질적인 수치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중고차를 몰고 다닐 때 중고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이 있으면, 그보다는 부자입니다.
또, 내가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 녹슨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는 부자인 겁니다.
또, 녹슨 자전거마저 없어 걷는 이가 있다면, 녹슨 자전거를 타는 이가 부자인 겁니다.
또, 내가 걷고 있을 때, 휠체어나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부자인 겁니다.
내가 두 눈을 다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소경이 있다면 나는 훨씬 부지인 겁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지고 있는데, 말못하는 분이 있다면 나는 그분보다 부자입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들 부자이십니까?'
'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자이고, 그렇기에 나 자신을 철저히 나누어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기에 나누어 줄 것이 없고, 포기할 것이 거의 없고, 청빈 서약할 것이 없다?
천만의 말씀!
여러분이 부자인 것 제가 이야기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 다 부자입니다.
꽃동네에 가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큰 부자인지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부른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어부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포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분명 포기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분명 조건이 많이 붙을 겁니다.
지금도 1초에 5천 명이 굶어 죽어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진 자가 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향하는 기도는 반드시 물질적인 자선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내어줄 때는 봉헌의 정신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내 것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교부들의 가르침 중에 충격적인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네가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 있다면, 너는 그 사람 것을 훔친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가진 것을 적극적으로 쓰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천국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자가 태워져 가루가 되면 천국에 갈 수 있고,
가난한 이도 교만하게 살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멘
여러분, 사랑합니다.
♣2021년 연중 제28주일 (10/1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