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1
종일 바빴다. 시아버지 제사 음식 준비하랴, 친척들 맞이하랴, 정신이 없었다. 새벽 1시, 기제사를 마치고 음복 상을 차리다 보니 지니가 안 보인다. 시누이가 5층 옥상에 올려놨단다. 추운 2월의 야밤에 주먹만 한 것을 깜깜한 곳에 혼자 두다니. 후다닥 안고 내려왔다. 바들바들 떨며 굳은 강아지를 담요로 말아 호호 입김을 불었다. 몸이 쉽게 나긋해지지 않는다. 제삿날이니 심호흡 두어 번으로 화를 누를 수밖에.
지니를 들여다본다. 힘없이 누워 사료도 먹지 않는다. 좋아하는 육포를 줘도 관심이 없다. 무서움과 추위에 얼마나 떨었으면 이럴까 마음이 아리다. 참기름에 쌀을 볶아 흰 죽을 쒔다. 눈도 뜨지 않았지만 고소한 냄새를 맡고 입은 벌린다. 정성 들여 한 달여 치료를 했지만, 기침이 그치지 않는다.
20여 년 전이다. 하얀 얼굴에 새까만 눈과 코가 단추처럼 박힌 몰티즈 지니가 우리 집에 왔다. 가족들은 좋아했지만, 개를 싫어하는 나는 한 걸음 건너 앉아 조심조심 살폈다. 낮에 둘이 남으면 손을 깨물거나 할퀼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밥을 주고 변을 치우고 목욕까지 시켜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지니는 나와 친해지려고 ‘거실에서 놀고 방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 변은 신문지 위에서 눠라. 식탁 주변을 기웃대지 마라. 조용히 집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를 잘 따라 주었다. 말을 잘 들으니 마음이 풀려 목욕시켜 단장해 주고 가끔 장난도 쳐 주니 좋은가 보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면 반갑게 뛰어온다. 앞발을 번쩍 들고 섰다가 잘 잤냐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 네 발로 선다. 아침 인사인 게다. 싫은 짓 않고 귀염을 떨어 살가운 정이 들어가던 길이다.
수소문해서 기침 치료를 잘한다는 수의사를 찾았다. 병원 가는 날, 1층까지 내려가 배웅을 했다.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차를 타 버린다. 다른 때 같으면 눈을 맞추고 가는데 뒷모습만 보여 주었다. 왜 저럴까, 그래도 능력 있는 의사에게 가니 잘 치료하고 오겠지,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혼자 돌아온 남편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감기가 아닌 홍역이란다. 깜깜한 옥상에 버려진 두려움과 살을 에는 추위가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병원서는 안락사를 권한다. 개에게 홍역은 불치의 병이라 걸리면 대부분 죽고, 살더라도 몸의 한 부분이 온전치 못하게 된단다.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하는 개도, 같이 사는 주인도 괴로우니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 반년 만에 인위적으로 생명줄을 끊어야 한다니 마음이 섬뜩하다.
아쉬움과 체념이 뒤범벅된 눈으로 지니가 쳐다본다. 저 눈빛은 무엇을 원하는 건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하는 것일까. 오만 가지 생각으로 가슴과 머리가 복작댄다. 녀석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어려운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소파 옆에 지니가 쓰던 집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다. 밥그릇이 휑하니 비었고 옆 그릇에는 눈물 같은 물이 반쯤 차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새까만 눈이 설핏 나타났다 사라진다. ‘안녕~!’ 저세상으로 가는 강에 아픈 몸 씻어 내서 기침 그만하고 편히 잠들기를 기원한다.
지니를 목욕시키듯 정성스럽게 밥그릇, 물그릇을, 그리고 집을 씻었다. 뽀송하게 말려 선반 위에 올렸다.
지니-2
몇 년 후 새로운 강아지가 왔다. 태어난 지 한 달 반 된 자그맣고 하얀 몰티즈였다. 이제는 나도 개를 좋아하게 되어 반갑게 맞았다. 선반 위의 물건을 내리고 이름도 지니라 그대로 불렀다. 예쁘고 덩치가 작아 봉제완구 같았지만, 재롱이 늘어나는
만큼 나누는 정도 쌓여 갔다. 눈빛만으로도 속마음까지 주고받으며 살았다.
뽀얗고 귀엽던 녀석이 십 년이 지나자 피부병이 생기더니, 털이 푸석해지고 뭉텅뭉텅 빠져 버렸다. 두어 달 산책을 했더니 털의 윤기는 돌아왔지만 새로 나진 않아서, 피부병에 좋다는 온천수를 받아와 목욕을 시켰다. 천천히 종기가 낫고 새 털이 돋으며 살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 기침약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더니, 결국, 곡기까지 끊어 버렸다. 기어이 의사는 안락사를 권했다.
강산이 변하도록 주고받은 정이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나. 쇠고기를 갈아 넣고 찹쌀죽을 끓였다. 하루 세 번씩 떠먹이기를 다섯 달, 잘 받아먹은 진이가 일어났다. 몇 달이 지나자 기침도 그쳤다. 2년 만에 약을 끊으니 죽을 때까지 약을 먹여야 한다던 의사 선생도 놀랐다.
하지만 세월은 비켜갈 수 없었다.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를 보는 눈이 점점 간절해졌다. 남편과 나는 외출하면 항상 빨리 돌아가려 애썼고, 녀석은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찾느라 온 집안을 헤매고 다녔다. 집을 비운 사이에 먼길 떠나버릴까 봐 몇 년 동안 여행도 가지 못했다.
설 며칠 전 목욕을 시켰더니 제집으로 들어가며 캉캉 크게 짖었다. 몸에 경련이 일어나며 뒤틀린다. 제발 고생하지 말고 죽음의 강에, 떠 있는 배를 타라. 진정한 환희를 누린다는 하늘나라로 쉬이 가라고 빌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지니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깊은 눈으로 쳐다본다. 가슴에 꼭 안아 주자 눈을 맞춘 후 거실 곳곳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20년의 생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양이다. 두 바퀴나 돌고 제집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때 서울 아들에에서 전화가 왔다. 손자가 영상으로 지니를 보여 달란다. 두 살배기에게 이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아파서 잔다고 얼버무리며, 아들에게는 녀석이 오늘 밤을 못 넘기겠다고 일러줬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차츰 몸에 힘이 돌아오더니 서너 시간 후 정신을 차렸다.
설에 내려온 어린 손자와 사이좋게 놀기에 이제 얘도 우리 식구라는 걸 알았나 보다 했다. 세수 풍습 챙기기와 윷놀이의 재미에 빠진 가족 속에서 지니는 조용히 며칠을 보냈다. 아이들을 보낸 후 온천수를 데워 목욕을 시켰다. 잘 씻겨주고 싶어 혓바닥과 입천장까지 닦아 냈다. 보송하게 몸을 말려 주자 천천히 거실로 향한다.
또, 기침을 하고 숨이 가빠지며 제집에 거꾸로 누웠다.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자 가족들을 둘러 본 후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다. 까만 눈동자의 초점이 차츰 없어진다. 조심조심 쓰다듬을 수밖에. 지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듯 편안하다. 지난번 손자의 ‘보고 싶다’는 소리에 나서던 길 접고 기다렸나 보다. 아들네를 보낸 다음 날 지니는 비로소 생의 강을 건너갔다.
편안히 누운 채 아름다운 일몰처럼 천천히 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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