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8. 05
영화 '127시간'은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존 캐니언에서 혼자 암벽 등반을 하다가 조난됐던 사람의 실화를 그렸다. 스물여덟 살 애런 랠스턴은 좁은 암벽 틈으로 미끄러지면서 360㎏짜리 바위와 암벽 사이에 오른팔이 끼인다. 수중엔 물 350mL와 주머니칼밖에 없었다. 그는 그 상태로 닷새를 견디다 결국 바위에 낀 오른팔을 칼로 잘라내고 탈출한다. 그는 구조된 뒤 인터뷰에서 "물 없이 고립된 채 닷새를 보내니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며 "암벽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새긴 뒤 죽음을 준비했었다"고 했다.
▶ 가족과 함께 산에 갔다가 실종됐던 열네 살 여중생이 산속에서 혼자 열흘을 버티고 구조됐다. 이 학생은 지적장애와 자폐 증상이 있어서 생환 소식이 더 기적적이다. 산에 오르다가 먼저 내려가겠다며 헤어진 딸이 사라지자 부모는 행여 큰 사고를 당했거나 범죄에 희생됐을까 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발견 당시 아이는 탈진했을 뿐 별다른 상처도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다.
▶ 전문가들은 기온 높은 장마철이어서 열흘 고립을 견뎠을 것이라고 한다. 실종된 산이 있는 청주에는 열흘 중 여드레 동안 비가 왔고 누적 강수량은 137.5㎜였다. 최고기온은 35.2도까지 올랐고 최저기온도 24.7도나 됐다. 아이가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버텼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수영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건강한 체력도 생존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한다.
▶ 일반적으로 '공기 없이 3분을 못 버티고 물 없이는 3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는 3주를 못 견딘다'고 한다. 이른바 '3·3·3 법칙'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이 붕괴됐을 때 살아나온 젊은이 세 명도 빗물을 받아 마시며 버텼다고 했다. 사고 초기엔 건물 잔해 위로 뿌려준 소방수를 받아 마셨지만, 열흘이 지나 생존자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 당국이 소방수를 끊자 소변을 받아 마시며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때마침 내린 비가 이들의 생명선을 이어 줬다.
▶ 물이 있어도 정신력이 없으면 열흘을 견딜 수 없다. 삼풍 생존자들은 함께 콘크리트 암흑에 갇혔던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숨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17일을 견디고 구조됐던 박승현씨는 "장사가 안 돼 식당을 접은 부모님을 생각하며 '나는 꼭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말했었다. 열네 살 아이가 아무것도 못 먹고 열흘을 버틴 것도 놀랍지만, 자극에 민감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자폐아가 어떤 정신력으로 혼자 산속의 밤과 낮들을 견뎌냈는지 대견하다.
한현우 논설위원 hwhan@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