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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20.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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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단한 삶을 주께 드릴 때
2. 끈질긴 문제가 변화의 통로
출처 : 『수고하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김경진 / 두란노 2022년
1. 고단한 삶을 주께 드릴 때
[시편 127편 1-2절]
1) 역병과 기근 속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COVID 19'라는 이름이 붙여진 지 삼 일째 되던 날인 2020년 1월 12일 주일, '포로에게 말씀하시다'라는 제목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 말씀이 코로나19 상황과 연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느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신년에 하고 싶지 않은 설교였습니다. 신년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란 말씀을 듣고 싶어 할 성도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씀을 증언했습니다.
그날 저는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백성에 빗대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땅에서 나오려고 하지 말고,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아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라." 돌이켜 보니, 우리를 향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태어나고, 일상도 이어집니다.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레미야29장 17-18절 말씀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도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즐겁고 기쁨에 넘치는 주일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경제 상황도 악화되었으며,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어 가는 상황에서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감사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바로 이 주제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2) 시련과 역경 속에서 추수감사주일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첫 추수감사절이 태동되던 때와 오늘의 상황은 매우 흡사합니다. 1620년에 미국으로 출항한 메이플라워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102명의 승객과 26명의 선원이 타고 있던 배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떠난 길이었습니다. 승객의 평균 나이가 32세였고, 최고령이 64세였습니다. 어른이 71명, 아이들이 31명 탑승했습니다. 항해 중에 배 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잠시 승객 수가 103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존 호우란드라는 사람이 그만 파도에 휩쓸려 실종됩니다. 때문에 다시 승객 수가 102명이 됩니다. 떠난 사람과 도착한 사람의 수는 똑같았지만, 숫자만 같을 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지 않습니까? 분명한 목표를 두고 떠난 사람이 있지만, 목표지에 도달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됩니다. 도착하려던 목적지는 오늘의 뉴욕이었지만, 그곳에 닻을 내리지도 못했습니다. '케이프 코드'(Cape Cod)라는 곳에 11월 11일에 닻을 내려 정착하게 됩니다. 출항한 지 66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1620년 11월 12일 주일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그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정착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맹추위와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집을 지을 시간도 없어 배 위에서 긴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질병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죽는 일도 발생했고, 많은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봄을 맞을 무렵, 배 안의 승객은 102명에서 53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선원의 수도 13명으로 줄었습니다. 약 절반의 사람만이 살아남은 비극적인 정황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그 땅에서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3일간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상황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 역시 연초만 하더라도 많은 계획을 세우며 한 해를 멋지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일들을 펼쳐 주실지 기대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가 되면 우리가 절실히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이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깊이 파고듭니다.
처음 '코로나19'라는 병명을 들었을 때만 해도 오늘날의 과학과 의학기술로 능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이러스 하나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인간의 연약한 현실을 직시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한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오늘과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우리의 수고와 하나님의 돌보심이 만나 풍성한 결실이 맺힙니다
시편 127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며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래입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요? 집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 사람, 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최선을 다해 집을 세워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온정성을 쏟아 일을 추진해 본 사람들이 여러 난관에 부딪히며 이러한 고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무언가를 세우고 지키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게 결코 인간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내 힘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협력할 때 온전한 집, 완전한 성을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협력을 추수하는 곡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소제를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제란 감사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릴 때는 곡식으로 제사를 드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화목제나 속죄제, 속건제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지만, 감사 제사만큼은 곡식으로 드릴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여러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겠지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추수하는 이 곡식 단은 1년 전에는 없었던 곡식 단입니다. 그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곡식단인데, 누군가 그 사이 땅에 씨를 뿌리고 심었기 때문에 자라난 수확물이 된 것입니다. 즉 뿌리는 자가 있기에 거두는 자가 있습니다. 심는 자가 거두는 법입니다. 심지 않는 자는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추수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봄에 씨앗을 파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을에 추수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이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자 창조 질서입니다. 우리는 곡식의 주기를 통해 한 가지 진리를 체득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거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뿌리지 않는 사람은 거둘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원리이며, 하나님 나라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뿌리고 가꾸지만, 그렇다 해서 모두가 언제나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씨앗이 때로는 가시덤불에, 때로는 돌밭에, 때로는 뙤약볕이나 길가에 잘못 뿌려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뿌린 모든 씨앗이 다 잘 자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도 태풍을 만나 스러질 수 있습니다. 좋은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온도와 바람, 햇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노력과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인간의 노력으로 그 조건들을 충족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만 더욱 온전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추수한 열매를 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두 마음이 공존할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는 자부심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감사입니다. 수확물을 바라보며 수고한 자신을 격려하는 동시에 올 한 해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시 127:2. 새번역성경).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일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곡식을 들고 주님 앞에 나와 감사드리는 감사자의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일찍 일어난들, 먹고 살려고 애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최선을 다해 살겠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제가 한 수고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옵소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인생입니다. 열심히 수고하며 살겠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하나님께 내 삶을 의탁하오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고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래서인지 개역개정판으로 이 말씀을 살펴보면 또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평안을 누리며 살겠다는 시인의 고백이자 선언입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니, 우리가 드릴 고백은 '감사'뿐입니다
예레미야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렘 29:4-5).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는 포로 된 자리에서 씨를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그 열매를 가꾸고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도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 앞에 내 삶의 열매를 들고 나갑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보기 좋으면 좋은 대로, 못 하면 못 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분깃을 내어놓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자리에서 얻은 열매들을 주님께 바칩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우리가 비록 포로의 형편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평안이자 희망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포로의 자리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이 포로 된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에 들린 소산과 곡식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수고했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해 힘써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 감사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 127:1-2 중).
우리가 주님께 드릴 고백은 감사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찬양하며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5-26).
2. 끈질긴 문제가 변화의 통로
[열왕기하 5장 9-14절]
1) 하나님을 알지 못한 때에도 우리 삶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시각 장애인 남성과 결혼한 한 여인이 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으로 잘 자라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시각 장애인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이 모두 나서서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가지 이유를 친구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남들 사는 인생이 아닌 그녀의 인생, 그녀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였습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믿음에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정말 나만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가? 남들이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흉내내면서 따라가지는 않은가?’ 한 여인이 시각장애인과 결혼하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듯이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 믿음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열왕기하 5장은 병 고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나아만 이야기입니다. 말씀에는 병 고침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요소들이 잘 갖추어져 있죠. 먼저는 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은 나아만에게 나병이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14절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나아만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참된 예배자가 되었는지 과정을 보여 줍니다. 종인 게하시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값없는 은혜를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이 나아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 1절은 나아만 장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새번역성경).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 이야기는 흥미로운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은 나아만이 왕이 아끼는 사람이었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묘사합니다. 아마도 왕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고 존경받은 장군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설명과 더불어서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왕하 5:1 중).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뜬금없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원어 성경은 이곳에 '야훼 여호와'라는 단어를 넣어서 표현합니다. 즉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아람(시리아)을 구원하는 데 큰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나아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시리아에 충성된 장군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명예욕에 따라, 혹은 사명감에 따라 나라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와 함께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 함께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그저 사업을 하고 연구를 하고 세상적인 일을 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관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던 때에 그를 주목하고 계셨고, 그와 함께하셔서 승리에 관여해 주셨습니다. 나아만의 세상적인 성공은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이 얻은 첫 번째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요.
성경은 나아만과 관련해 두 번째 이야기를 알려 줍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중). 나아만은 대단한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병이라는 질병입니다. 여기서 나병이라고 표현된 이 병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문둥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가 집에 있었다는 점, 왕 앞까지도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전염이 되지 않는 나병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아마도 온몸에 퍼져 있는 피부병이었겠지요. 전염은 되지 않지만 그를 극히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7절을 보면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대가를 요구하다가 나병을 도리어 얻게 되는 데, 그 역시 마른버짐 같은 피부병을 얻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토피 피부염을 앓는 분들이 꽤 될 텐데 그보다 더 심한 피부병이 아니었을까요? 전염성 있는 피부병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당시 피부병은 큰 두려움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장소는 이스라엘이 아닌 시리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을 것 같은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나아만과 함께하시며 시리아의 군대가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게다가 나아만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해 일을 시작하고 계셨고, 많은 성취를 얻도록 이끄셨습니다. 동시에 나병인 피부병까지도 허락하셨죠.
2)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나병은 무엇인가요?
나아만에게 나병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매우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나병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만 없으면 모든 것이 완벽한 인생인데 우리 스스로를 망가트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우리의 나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말씀에 나오지는 않지만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의 소식을 듣고 선뜻 길을 나서는 모습에서 시리아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에게 나병이란 병은 희망을 앗아간 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날마다 더욱더 심한 고통과 열등감, 힘든 고욕으로 몰아넣는 병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사는 듯 보입니다. 좋은 가구가 있는, 넓은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뜻 보면 모두가 그래 보이지요. 그러나 내면 깊이 들여다보면 나아만이 앓던 나병처럼 더럽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하나둘씩 자리한 걸 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허물, 지금까지 이룬 모든 성취들을 모조리 의미 없게 만드는 것 같은 문제들, 아니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어 꺼내기조차 원치 않는 과제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나의 신앙을 만든다', '나만의 신앙을 만든다'라는 것은 이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아만이 나병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서 하나님을 알며 나아가게 되었듯이, 나에게 주어진 나병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신앙을 만들어 갑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살아나고,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아만의 나병이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의 질병일 수 있습니다. 혈액암, 간암, 대장암일 수 있고요. 병명을 알 수 없는, 치료법도 알기 어려운 불치병일 수도 있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나병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녀일 수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일 수도 있겠죠.
만일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고상한 사색을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일까?’ 세상의 이치를 따져 가며 신앙적인 점검을 해 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우주의 이치를 따지며 하나님을 규명하고 만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이 커 가기를 원하죠. 물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신앙은 우리 안에 놓인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면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데서부터 커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기 원하고 우리의 신앙이 보다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나병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아픔, 나의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나의 신앙이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따금 현대 교인들 중에 참으로 고상해 보이는, 그러나 안타까운 신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고상하게 차려입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정숙하게 예배합니다.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나병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주님은 제가 드리는 감사를 그저 받기만 하세요. 내면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울고 불며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나는 고상하게 당신을 믿고 싶어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어요. 나는 참 좋은 교인이지요.“
그러나 잘못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만약 병원에 가서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나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무엇이 불편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아니요, 불편한 거 하나도 없어요. 참을만해요.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까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관리할게요"라고 말한다면 병원에 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나병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문제를 들고 씨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만나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그 문제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나병과 같이 해결할 수 없는 큰 과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통해 당신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매우 중요한 길목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신학자의 이론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조직적으로,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일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문제를 풀어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할 수 있어야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문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한 채 '누구는 병이 나았다더라,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더라'는 소문만 듣는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저 일상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당신에게 나병은 무엇입니까? 깊숙이 숨겨 있는 상처 덩어리는 무엇입니까?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당신과 만나시고자 마련해 놓으신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보기에는 더럽고 추하고 남들이 보면 도망갈 것 같은 큰 아픔이지만, 아픔을 주시면서까지 나를 만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게 합니다. 그러면 장군의 몸이 깨끗하게 된다고 말하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이 진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발길을 돌렸다고 증언합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왕하 5:11-12 중, 새번역성경).
나아만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의 치료 과정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나와서 영접하고 아픈 부위에 손을 얹은 후에 나름대로의 특별한 행위를 통해 낫게 해 주리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단지 물에 씻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더러운 요단강보다 깨끗한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 할 때에 종을 통해 한 소리가 들립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왕하 5:13 중, 새번역성경).
3)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나아만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익명의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조금 전 등장한 한 부하가 있고, 이스라엘에 잡혀 와서 나아만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종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소녀가 있습니다(왕하 5:2). 두 사람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나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이스라엘에 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에게 나아가면 나을 수 있다고 전해 주죠. 한 부하는 엘리사에게 갔다가 돌아서려는 나아만을 설득하여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는 돕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길에서 자칫하면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고 좌절될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자'는 생각을 할 때가 있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돌아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들리는 소리, 함께하는 또 다른 신앙의 목소리, 그 소리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됩니다. 종의 부탁을 들은 나아만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가야 하는 일 앞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부하로부터 들려 온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엘리사의 말을 따라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는 순종을 보입니다.
종종 이단들이 나아만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교주의 명령에 무조건적 복종을 하라고 가르치죠. 엘리사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씀에 순종하는 나아만을 강조하면서 교주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엘리사의 말에 복종하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교주나 목회자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과거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고 다른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그분의 말씀과 약속은 성경 안에 이미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승인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두신 약속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그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경험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일곱 번 씻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물론 그가 반드시 일곱 번 씻어야만 낫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가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일곱 번이나 몸을 씻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나아만이 일곱 번 몸을 씻는 동안 사실은 여섯 번의 실패가 존재합니다. 한 번 들어가 봅니다. 별 반응이 없습니다. 달라진 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두 번 들어가 봅니다. 여전히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세 번째 들어가 봅니다. '이거 혹시 헛고생하는 것 아닌가? 여기가 맞는 곳인가?' 생각하며 또 다시 들어갑니다. ‘이보다 좋은 강도 많은데 왜 하필 더러운 요단강에서 씻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다섯 번째 들어갑니다. 변화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들어가지만 어떤 기미도 나타나지 않아 실망할 즈음, 마지막 일곱 번째에 들어갔다 나오니 변화된 자신의 몸을 봅니다.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4). 저는 이 일곱 번의 과정이 나아만 자신의 신앙을 만들어 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나만의 신앙을 가지는 일은 어렵고 힘듭니다. 여섯 번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앙하고, 믿고, 결단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들고는 이것을 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하죠. 쳐다만 보아도 산다고 했지만 정작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이성을 앞세우며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놋뱀을 바라보고 일어나 걸어간 사람들이 옆에 있었음에도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놋뱀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것, 이것이 인간의 미련함입니다.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낮아지는 곳, 자존심과 자만심이 포기되는 곳,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순종이 있는 그곳에, 순종이 아니고는 더 이상 방도가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