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서남쪽 허리에 전체 둘레 2km, 깊이 350m가 넘는 온갖 바위기둥이 서 있다.
이 바위 숲을 영실(靈室)이라고 한다. 영실이란 부처님께서 제자에게《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여 이곳 이름을 영실동이라고 하였고 그 바위를 영실기암이라 하였다.
영실기암은 소리는 같지만 뜻이 다른 영실(瀛室)이라고도 한다.
영주산(瀛洲山)이란《열자(列子)》에서 나온 이름인데 이에 근거하여 동쪽 금강산(金剛山)은 봉래산, 지리산(智異山)
은 방장산, 한라산은 영주산이라 하였다.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불로초를 구하러 서불(徐市)이란 사람을 소년, 소녀 수천 명과 함께 배를
태워 보냈다. 그 서불은 영주산을 헤매다가 영곡 바위틈에서 비로소 불로초를 구했는데 이것이 곧 시로미라 부르는
암고란(岩高蘭)이었다.
영곡에 얽힌 이런 이야기는 도교와 불교 이후에 시작된 이야기이고 탐라왕국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 사실은 설문대
할망 이야기다.
할망은 몸집이 너무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눕고 다리를 뻗어 바다에 물장구칠만했다.
할망에겐 오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남편이 도둑질 나간 아들을 위해 죽을 쑤다가 잘못해 가마솥에 빠지고 말았다.
귀가한 아들이 여느 때와 달리 맛좋은 죽을 먹었는데 맨 나중에 도착한 막내가 솥 바닥에 아버지를 발견하고서 스스로
서쪽 해안 차귀도(遮歸島)로 숨어버렸고 나머지 499형제는 한라산 계곡 오백장군 바위가 되고 말았다.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할망은 이곳저곳 헤매다가 한라산 물장오리(長兀里岳)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물장오리 물은 밑이 없는 연못이었던 게다.
이 작품은《탐라십경》의 한 폭으로 야계(冶溪) 이익태(李益泰 1633-1704) 목사의 지시로 그려진 것인데 누가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없다.
<영곡(瀛谷)>은 화폭 중단에 세 줄기 폭포와 구름이 쏟아져 나오는 운생굴(雲生窟)을 크게 드러낸 작품이다.
지금도 영곡에서 외치면 안개와 구름이 몰려들어 앞길이 막히는데 할망이 화를 내 물장오리 물이 운생굴을 통해
안개로 솟아나는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폭포는 위아래로 늘어선 직선판(直線板)이고 굴은 첩첩 쌓아 올린 곡선판(曲線板)으로 그렸는데 그 설정이 경이로운
걸작이다. 화폭 맨 아래쪽에 납작 깔아둔 소나무 숲의 구성도 감각에 넘치지만, 폭포 머리에 소나무를 한 줄 깔고 그
위에 오백장군 또는 천불을 배치한 구성력이 대단하다.
맨 위쪽 하늘엔 달빛 흐린데 구름 위에 주홍굴(朱紅窟)이 봉긋이 솟아 그 풍경 마치 신선의 마을과도 같이 그윽하다.
역시 재미있는 것은 구름과 땅 사이 옆으로 즐비한 천불 또는 오백장군이다.
몸뚱이엔 나무 같은 신물(神物)을 품고서 온갖 모양 모자를 쓴 채 서성대는 그 생김이 웃음을 절로 부른다.
유랑의 세월 속에 생애를 보낸 저 시인 임제(林悌 1549-1587)가 이곳 영곡에 이르러 “참으로 섬 가운데 제일동천(第
一洞天)이다. 또 기암이 물가에서 산 위까지 사람처럼 서 있는 것이 무려 천백 개나 된다”라고 하고서 벗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중국사람 전횡(田橫)과 그의 무리 오백 명을 생각했다.
왕위를 버리고 사라져간 그들의 운명이 애틋하고 아름다웠던 것일까. 당파의 권력투쟁을 한탄하던 선비였으므로 저
설문대할망과 그의 아들 오백 명 이야기가 생각나기보다는 오히려 역사 속의 전횡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지만 ‘변치
않을 마음 한 조각’을 읊조리는 그의 노래는 여전히 아름답다.
(43)우도십경, 새와 용을 노래하는 유배객 김정
바닷물 위에 소가 누워 있는 섬이 있 다. 해 뜨는 동쪽을 차지한 채 빼어난 생김을 자랑하는 이 섬 이름은 소섬 또 는
쉐섬[牛島]이다.
구좌읍 종달리 땅 끝 건너 커다란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 작한 때는 1842년이고 소가 살기 시작 한 때는 1698년의
일이다. 물론 선사시 대 돌도끼며, 고인돌이 있으므로 오랜 옛날엔 사람이 살았던 땅이었겠는데 워 낙 왜구의 침탈로
말미암아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삼국시대 때부터는 무인도가 되었을 터, 말을 지키는 목자 만이 머무르던 섬
아닌가 한다.
김남길이 그린 <우도점마>를 보면 앉아 있는 소 모습 그대로다.
소섬 또는 우도는 남북 길이가 4km로 제법 큰 섬이었는데 그림에선 동두[쇠머 리오름]와 어룡굴[주간명월]만을
특별히 그렸으니까 명승이 그 둘뿐 인 느낌이지만 샅샅이 찾아보면 여덟 가지라고 한다.
이를 우도팔경 (牛島八景)이라고 하여 1983년에 김찬흡이란 이가 이름 지은 것이다.
먼저 주간명월(晝間明月)은 어룡굴인데, 섬 남쪽 절벽 광대코지 아래 물속 수중동굴이 여럿인 해그리안이다.
주간명월의 말뜻은 한 낮 굴속에서 달을 본다는 것인데 조그만 배를 얻어 타고 암벽 속으로 들어가면 햇빛이 동굴
천장에 비쳐 마침내 달빛과도 같아지니 주간 명월, 말 그대로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주간명월은 아무 때나 누구건 체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1970년대만 해도 파도 없는 한낮 에 겨우 세 명이 탈만한
배를 타는데 경찰관의 허락이 있고서야 신비로운 광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룡굴은 용이 7, 8월 사이에 와서 살 곤 하는데 하필 고기잡이 배가 들어가면 곧 폭풍과 천둥 번개가 내려쳐 나무가
뽑히고 농사를 망치고 만 다. 그러므로 이곳 주간명월은 신성한 장소로서 섬을 지키는 성소(聖所)였던 게다.
야항어범(夜航漁帆)은 6, 7월 어두 운 밤, 섬 북동쪽 하고수동 모래톱에 자 리 잡고서 멸치를 후릴 수 있는 집어등
(集魚燈)을 켠 채 멸치잡이 하는 수많은 어 선을 구경하는 일이다.
천진관산(天津觀山) 또한 천진동에서 성산봉이며, 수 산봉, 지미봉을 비롯하여 한라산을 한 꺼번에 바라본다는 것
인데 <우도점마> 그림에는 오른쪽 위쪽에 가파른 성산, 아래 구석에 지미봉인 지미망(指尾望) 을 그려놓았다.
마찬가지로 지두청사 (指頭靑沙) 또한 쇠머리오름에서 섬 전 체를 바라보는 일이다.
전포망도(前浦望島)는 섬 밖에서 섬을 바라보는 일인 데 이렇게 보면 꼭 그림 <우도점마>와 같이 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후해석벽(後海石壁)은 광대 코지를 일컫는데 동천진동 포구에서 바라본 동쪽의 웅장한 수직절벽이다.
동안경굴(東岸鯨窟)은 동쪽 해안 고래굴을 뜻하는데 검멀레의 콧구멍이라는 두 개의 굴로 예전 에 큰 고래가 살았다.
이곳에서 동굴음악회도 열렸다.
끝으로 서빈 백사(西濱白沙)는 서쪽에 있는 모래밭이 무려 300m에 이르는 해 수욕장이다.
특히 이 일대 해변은 앞바다 일대에서 자라는 식물인 홍 조류(紅藻類)가 굴러다니다가 돌처럼 굳어져 생겨난 이른바
홍조단 괴(紅藻團塊)였다. 홍조단괴는 미국 플로리다와 같은 세계 여러 곳 에 있으나 이 백사장처럼 광범위하게 펼쳐
진 경우는 없어 아주 특별 한 곳이다.
이토록 아름다우니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유배길에 오른 김정(金淨 1486-1521)은 이곳 유배지에 머물며
언젠가 소섬에 이르 러 절경(絶境)임을 발견하였고 죽음을 앞둔 어느 날엔가 저 꿈틀대는 붕새며 어룡을 부르는 노래를
간절하게 불러 제쳤다.
새와 용의 보살 핌이었을까. 지금껏 김정이란 이름 잊혀지지 않았고 그가 부르던 노 래 <우도가(牛島歌)> 또한 지금껏
불리고 있음에랴.
(44)하멜이 훔쳐 본 풍경, 탐라왕국터와 마라도
작가미상 -《영주십경》
섬은 무수히 많아 보이는 절벽과 보이지 않는 절벽들, 암초로 둘러싸여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곡물이 풍부하였으며, 말과 소가 많았다.
그 중 많은 양을 매년 왕에게 공물로 바쳤다.
주민은 본토 사람에게 천대 받았으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나무 우거진 높은 산이 하나 있고,
특히 나무가 없는 계곡이 많고 낮은 민둥산들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사람들은 벼를 재배하고 있다.
-헨드릭 하멜,《하멜 보고서》
일본 고려미술관에 있는 <산방> 화폭 왼쪽 끝에 월라악과 이두봉(伊頭峰)을 그려두었는데 이곳 북쪽이 안덕계곡이다.
안덕계곡 북쪽 광평리엔 대비라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던 높이 549m의 조근대비오름이 있고 또 탐라왕국
삼신왕(三神王)이 사흘동안 기도를 드리던 웅덩이 베리창이 있어 유명해진 높이 517m의 와이오름[왕이뫼王岳]이
있다. 그 아래 감산에는 저승문 바위가 있고 거기엔 굴이 있는데 너무도 험악해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고
‘저승문’이라 하였다.
서쪽으로 나가면 산방산(山房山)이 돌연 치솟기 직전 화순리 일대 또한 탐라왕국의 자취가 숨 쉬고 있다.
화순리 중동에 왕자 양씨(梁氏)의 양왕자터와 그의 전답인 춤춘이왓 및 왕돌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서 있는 왕돌선밭
그리고 장군 양의서터가 있으며 화순 동쪽으로 신선이 놀던 신산동산이 있고 서동의 선배이돌이라는 유반석(儒班石)과
동동의 무반석(武班石)이 전설을 뿌리고 있다.
서동과 동동 마을 사람들이 내기 싸움으로 힘겨루기를 할 때면 언제나 서동 마을이 이기곤 했다. 번번이 지던 동동
사람들이 건너편 유반석 때문에 지는 것이라 해서 꾀를 내어 서동 사람들로 하여금 유반석을 거꾸러뜨리게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동의 힘센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나갔던 것이다.
속은 사실을 깨우친 서동 사람들이 저 동동의 무반석을 거꾸러뜨리려 하였으나 이미 힘 빠진 뒤였기에 무반석은
멀쩡했고 그 뒤로 무반석의 동동 마을이 언제나 내기에서 이기기 시작했다. 학문보다 무예의 위세가 지배했던 것일까.
산방산을 끼고서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남쪽 바닷가에 높이 104m의 송악산(솔오름)이 자리 잡고 앞바다에
가오리처럼 생긴 섬이라는 가파도(加波島)와 마라도(馬羅島)를 거느린 채 남쪽 바다를 호령하고 있다.
그림 <산방> 화폭 상단 바다 복판에 뜬 마라도는 북위 33도 7분에 위치한 남쪽 끝 섬이다.
가로세로 1km의 넓이를 지닌 섬으로 땅 위에 바닷물이 넘실거려 많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땅이라 육지에서 보면
제주도가 유배지였지만 제주도에서 보면 이곳 마라도가 유배지였다.
마라도엔 할망당 또는 처녀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가파도 주민 이씨 가족이 살기 위해 마라도로 건너가 농사를 짓기
위해 우거진 수풀을 태웠지만 쉽지 않았다.
실망한 채 가파도로 되돌아가려 할 즈음, 꿈에 신선 같은 사람이 나타나 “처녀 한 사람을 놓고 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풍랑을 일으켜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씨는 아이 보는 여자아이인 업저지에게 “애 업을
포대기를 가져오너라.”라고 심부름시킨 뒤 몰래 섬을 떠나버렸다. 그 뒤 섬에 가보니 업저지는 죽어 해골이 되어
있으므로 처녀의 넋을 위로하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에 업저지의 영혼은 마라도의 수호신이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림 <산방> 화폭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파도는 1653년 8월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 일행이 스페르웨르(Sparrow)
호를 타고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가다가 폭풍우 탓에 난파당해 도착한 섬이다.
이들을 구조한 제주관리들은 하멜 일행을 대정현을 거쳐 광해(光海) 왕이 유배 살던 제주시내 적거소(謫居所)에 머물
게 하였다. 다음해 6월 한양으로 떠날 때까지 이들은 10개월을 제주에서 머물렀다.
탈출에 성공, 1668년 7월 고국 네덜란드에 도착한 하멜은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였다.
《하멜 보고서》에는 그 시절 이방인이 바라본 조선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45)탐라도성, 사라진 천년왕국의 꿈
그렇게도 크고 장엄하던 제주도성이 사라졌다. 지금 성곽을 볼 수 있는 곳은 오직 남쪽 산지내[山底川] 근처에 약간
남은 제주성터뿐이다. 하지만 1928년 파괴당하기 전까지 제주도성은 지금 제주시 일도, 이도, 삼도동 일대를 감싸고
있었으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아 계란형 같이 둥글되, 단단한 바위 담벼락으로 겹겹이 쌓아 그 위세가 매우
삼엄했었다.
김남길의 그림 <제주조점(濟州操點)>에 나타나는 둥근 계란형 제주도성은 오늘날 동문로, 서문로, 남성로, 북성로라는
길로 바뀌어 있다.
남성(南城)은 남성로에서 남성사거리, 성지로를 이어 가다 제주성터를 지나 산지내를 건너는 오현교를 넘어 성굽에
이르는 길이다. 동성(東城)은 동문사거리에서 시작하는 동문로를 따라가다 북쪽으로 꺾어지는 만덕로를 만난다.
북성(北城)은 만덕로에서 서쪽으로 꺾어 산지내를 건너는 북성교를 넘어뛰자 나타나는 북성로이다.
서성(西城)은 북성로의 서쪽 끝에서 남쪽으로 꺾어 무근성로와 탑동로를 지나면 서문사거리를 만나고 계속 이어지는
서문로와 서문시장길 및 서사로로 뒤섞여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향교를 지나가면 한내가 용연(龍淵)으로 바뀌어 바다로 나아간다.
탐라왕국의 도성, 탐라도성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이 성을 처음 건설한 탐라왕국의 태조 을나(乙那)는 천년왕국을
다스릴 왕성을 꿈꾸었다. 이렇게 만든 탐라도성은 성곽 위쪽에 두 개의 바퀴[二軌]가 굴러갈 만한 도로를 내서 기마
대가 자유로이 다닐 수 있게 하였고, 성 아래로는 군사도로를 내서 보병대가 순찰하도록 하였다.
성 안을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눈다면 첫째 구역은 서쪽 탐라의 정궁 및 관아이다.
한양의 경복궁, 창덕궁 및 한성부 관아를 아우르는 대궐 영역이고, 둘째와 셋째 구역은 한양의 종묘와 사직, 명륜당,
모화관과 같은 여러 관청과 민가가 밀집한 영역과 같은 곳이다.
지금 제주 이도동에 남은 제주성터는 아주 작은 흔적일 뿐이다.
을묘왜변이 있고서 400여 년이 흐른 20세기 초 통감부 설치 이래 일본은 1913년에 북문, 1914년 동문과 서문, 1918
년 남성을 헐었다. 차곡차곡 헐었지만 그때만 해도 성곽은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런데 1916년부터 3년 동안 제주항 확장공사 때 동부두 매립과 서부두 방파제 축조를 한다면서 해안에서 채굴한
돌만으로 부족했던지 멀쩡한 도성을 쓸고 헐어 그 돌을 바닷속에 쏟아 부었다. 남은 터는 모두 도로로 바뀌었다.
천년 왕국의 도성 파괴는 이처럼 순식간에 일어났다.
일본 제국에서 파견나온 한갓 도사(島司) 따위 직책을 맡은 관리가 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조선』1928년 9월호에 실린 일본인의 <제주도 기행>에는 당시 일본 제2대 제주도사 마에다 젠지(前田善次)가 제주
개발에 대해 “나라를 위해 이 미개의 보고를 개척해야만 하는 넘치는 애정을 보여 주는” 사업이라고 선전하는 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근대화는 성곽과 궁궐을 파괴해야만 이뤄지는 것이었을까. 봉건왕조의 흔적이니 없애야 마땅한 일일까.
그 모습 다시 보기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다.
탐라도성을 복구하는 일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제주시나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땅을 내놓는다면,
그리고 성터 위에 지은 모든 민간 소유 건물과 맞교환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랜 옛 16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종사관(從事官) 유의신(柳義臣)이 관덕정에
머물며 탐라도성을 읊조린 그 시절 다시 오면 좋으련만.
(46)탐라궁, 생생조화의 심장
김남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예전엔 이런저런 사실도 몰랐고 게다가 도성 안에 궁궐이 있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였을까.
탐라 지도에 나타난 도성이나 건물을 보면서도 몰랐었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홍화각(弘化閣)을 궁실(宮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1991년부터 시작한 제주관아 발굴 사업이 성과를 내면서부터 저 궁궐을 뜻하는 ‘궁실’의 의미를 새기며 경이로운
깨우침을 얻었던 것이다.
궁이란 왕이 머무는 곳인데 왜 홍화각을 궁실이라고 했을까. 한갓 목사(牧使)가 집무하는 건물을 궁실이라고 한 까닭은
이곳이 탐라왕국의 정궁이었기 때문이다. 탐라궁이야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하다.
1998년까지 네 차례로 나누어 지속한 이 발굴 조사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8세기 탐라왕국 문화층, 고려와 조선 문화층의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제주시는 이 터에 제주목사의 집무처인 영청(營廳)을 복원하기로 했다. 홍화각, 연희각(延曦閣), 영주협당(瀛州協堂),
우련당(友蓮堂)과 연못, 귤림당(橘林堂)과 중대문, 외대문을 복원하고 비석이며 동자석을 모아 2002년 12월까지
완공했다. 지금 <제주목관아>라고 이름 붙인 이 영청은 사라진 역사를 추억하는 탐라의 궁실이었던 것이다.
탐라왕국의 궁궐이 사라진 때는 1924년부터였다.
영청 최대규모 건물인 연희각을 파괴하고 관덕정 좌우 날개를 꺾으면서 지붕 처마마저 깎아내리더니 1940년에는
홍화각마저 파괴하였다.
아무리 일본 제국이라고 해도 제나라였다면 천년왕국의 수도에서 통치의 심장으로 군림하던 궁궐을 이렇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을까. 궁궐을 뿌리째 파괴한 일본은 그 터에 살벌한 경찰서와 부속 식당, 구치소, 세무서, 법원 따위를
설치하였다. 해방 뒤에도 그런 용도로 계속 사용했는데 1991년 제주시청은 이곳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려고 법에 따라
지표 및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특별한 것은 탐라도성의 심장인 정궁(正宮) 탐라궁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조 이성계의 정궁 경복궁이나 창덕궁도 남쪽을 향하고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는
터에 바다를 뒤로하고 산을 앞에 두는 배해임산(背海臨山)하는 배치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도선(道詵 827-898)이 <비기(秘記)> ‘입해지산(入海之山)’조에서 산이 끝나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세력을 잃어
바다를 상대할 수 없으므로 옆으로 가로지르는 해문(海門)과 청룡백호를 만들라고 하였다.
또 집안 마당 물길로 아침저녁 왕래하면 산과 물의 세력이 서로 대적상등(對敵相等)하여 음양균형(陰陽均衡)으로
생생조화(生生造化)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탐라왕 을나는 처음엔 남쪽 한라산을 등 뒤 병풍으로 삼고 북쪽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으려 했을
게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북향이고 또 결코 바다를 이길 수 없고 보니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실제로 산이 끝나고 바다로 들어가는 용연(龍淵) 가까이에 탐라궁을 창건하면서 용연을 등에 두고 해 뜨는 동쪽을
앞마당 삼아 계속 뻗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탐라궁궐을 창건한 탐라 개국시조 을나의 꿈과 저 조선 개국시조 이성계의 꿈이 같았던 것일까.
이성계가 경복궁에 근정전과 온갖 전각(殿閣)이며 누정(樓亭)과 헌당(軒堂)을 지었듯, 을나 또한 갖은 건물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 그 궁궐을 복원했다고 하지만 외롭기 그지없는데 탐라궁이 옛 모습 그대로 장관이었던 시절, 관덕정
<중수기(重修記)>를 썼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9)이 부른 노래 부를 일이다.
(47)노인을 회유하는 통치의 기술
중앙정부에서 파견 나온 제주목사(濟州牧使)는 제주의 통치자였다. 제주목사의 임무 몇 가지가 있는데 무엇보다 80살
이상 노인을 위하여 베푸는 양노(養老)잔치가 중요했다. 물론, 이런 행사를 오직 제주목사만 수행한 것이 아니다.
왕의 다스림이 조선 전역에 물들기를 바란 왕조는,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 이를 존경함은 나라의 근본’이라 여겨 이를
군왕부터 적극 실천하고 또 지방수령으로 하여금 이 임무에 게으름이 없도록 하였다. 요즘 정치하는 자나 행정을 장악
한 관료들의 태도와 너무도 다르거니와 배우길 바란다.
그림 <제주양노>는 다른 행사와 달리 둥근 원형으로 좌석을 마련하고 제주목사도 건물 안이 아니라 함께 마당으로
내려와 좌석을 마련하여 노인 공경의 뜻을 드러냈다.
특히 관덕정이 아니라 제주목사의 집무공간인 동헌(東軒) 연희각과 홍화각 앞마당에 거대한 차일(遮日)을 친 행사장은
양노잔치의 중요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 행사엔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80살 이상 183명, 90살 이상 23명, 100살 이상 3명의 노인이 모두 참가하였는데
뇌물 받은 죄를 범한 전력이 있는 노인은 배제함으로써 깨끗함을 소중한 가치로 삼음도 드러냈다.
사선으로 속도감을 연출하고 있는 차일이며, 동헌 마루에 귤나무 장식 묘사는 <제주양노>가 독창성 짙은 이 시대
회화의 걸작임을 보여주는 요소라 하겠다.
양노잔치는 처음 수령이 몸을 굽혀 절하는 예의를 갖춰 시작하고 이어 모두 다섯 번의 술잔을 올리는 과정으로 진행
하였는데 처음으로 식탁이 올라가면 곡조인 <휴안(休安)>을 연주하고, 꽃을 올릴 때 잠시 연주를 중단했다가 음식이
올라가면 <수보록(受寶?)>을 연주한다.
첫째 술잔에 <문명(文明)>이란 노래에 문관 관리가 춤을 추고 음식에 기악 <근천정(覲天庭)> 연주,
둘째 술잔에 <무열(武烈)>이란 노래에 무관 관리가 춤을 추고 음식에 기악 <수명명(受明命)> 연주,
셋째 술잔에 <오양선(五羊仙)>과 기악 <황하청(黃河淸)> 연주, 넷째 술잔에 <아박(牙拍)>과 기악 <만년환(萬年?)> 연주,
다섯째 술잔에 <무고(舞鼓)>에 이어 통짐승을 올리면 노래 <정동방(靖東方)>을 부른다.
끝으로 왕이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수령은 기름종이를 나눠주어 음식을 싸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림의 중앙에 높은 장식을 갖춘 포구문(抛毬門)을 세우고 가야금과 거문고, 젓대[橫笛], 종적(縱笛), 장구, 북을
비롯한 여러 악기와 무희까지 무려 29명의 연주자가 출연하였는데 이는 그 어떤 행사보다도 많은 숫자이다.
<제주전최>에도 북을 다루는 고수와 악기 주자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15명이 출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제주조점>에는 군사 행렬 중앙 하단에 여섯 명이 줄지어 나발, 태평소, 징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제주군대의 취타대(吹打隊)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행사를 주관한 제주목사 이형상은『악학편고(樂學便考)』,『악학십령(樂學拾零)』을 저술하기도 한 음악의
대가였다. 오직 거문고 하나만을 달랑 들고 바다를 건넜던 이형상은 한라산 백록담에 말라죽은 단목(檀木)으로 거문고
를 만들었다. 임기를 채우지도 못한 채 탄핵당해 파직으로 귀향할 때 스스로 주관했던 그 많은 행사에 천지를 아름답게
울리던 악기와 노랫가락 귓가에 쟁쟁할 제 그 작은 몸에 품은 저 백록담 박달나무 거문고를 튕기며 회한에 젖어들었을
게다.
(48)민간신앙, 그 질긴 생명력
검은 연기 치솟는 풍경 대할 때면 소리 없는 외침이 가슴을 파헤친다.
육지의 권력을 배경 삼았을 뿐 아니라 제주의 모든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쥔 수령 이형상 목사가 1702년 12월 20일
제주의 유생, 무사를 비롯한 관리 300여 명을 모은 자리에서 ‘음사(陰祀)’의 폐해를 낱낱이 설파하였다.
제주 무당인 ‘심방’을 비롯한 민간 신앙을 쓸어버리겠다는 의지였다.
수령의 호령을 듣고서 129개 마을의 관리는 “공의 명령이 있는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서 곧장
각자의 마을로 달려갔다.
이들은 12월 21일에 신당(神堂) 129개소는 물론, 심방의 신의(神衣), 신철(神鐵), 민가에서 제향하는 신물(神物),
심지어 당산나무 뿌리 같은 길가나 숲까지 파헤쳐 버렸다.
다음날인 22일 관청 기록인 ‘무안(巫案)’에 이름을 올린 심방 수백 명이 목사 앞에 나아가 변명하고 이름을 지워주면
“영원히 무명(巫名)을 폐하여 범민(凡民)이 되겠습니다”고 청원하였으며 이어 노인과 선비가 나아가 “음사는 없어졌
으나 의약(醫藥)에 힘써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사방에 검은 연기 솟구치는 풍경을 그린 <건포배은> 하단 해안선에 줄지어 관리들이 엎드려 있는데 건들개(健入浦)에
나아가 북쪽 한양을 향해 네 번 절하는 장면이다. 관덕정 앞마당에도 마을의 향리들이 엎드려 수령의 교시를 받들고
있고, 성 밖 마을마다 불타는 신당이 즐비하다.
어떤 신당은 기와집으로 번듯하고 또 어떤 신당은 지붕도 없는 허술한 구조물이라 심방과 관련 있으면 무엇이건 가리
지 않고 방화한 것을 드러낸다.
붉은 불꽃은 없고 검은 연기만 빗겨 치솟는데 모두 한라산 오름으로 날아든다. 결코 사라지지 않음이요, 이곳저곳
오름으로 피난하는 모습일 것이다.
유가의 성리학(性理學) 사상이 아닌 민간 사상을 사악한 이단이라고 여기는 이 독단은 중세 마녀사냥과도 같은 모습
이다. 그래서였을까.
이형상 목사는 이러한 사실을 『남환박물』 「풍속」조에 ‘관청에서 금지한 것도 없었는데 수천 년 나쁜 습관이 하루
아침에 싹 쓸리어 없어졌다’고 기록했다. 강제로 한 일이 아니었다는 변명이다. 또 ‘소각하고 없앤지 반년이 되었지만,
이익이 있고 폐해가 없으니 전에 속았음을 알아 분하게 여기며 남녀노소가 만나 서로 축하하고, 무당을 원수 보듯
하며, 어울렸던 일을 부끄러워한다’고 자랑을 늘어 두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형상 목사가 파직당하고 후임 목사 이희태(李喜泰)가 부임한 바로 다음날 아주 커다란 규모로
신을 기리는 제사를 올린 일이다.
누구에겐 음사였던 것이 누군가에겐 신사(神祀)였음에랴. 나아가 이희태 목사는 심방으로 하여금 빠르게 신당을 설치
하게 하고 폐지한 ‘무안’도 복구하였다.
이형상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가히 한심스럽다”고 탄식하였지만, 이희태 목사가 한심스러운 줄은 모르겠고 오히려
이형상 목사가 우스워졌음은 알겠다.
심방의 노래인 『영천이 목사본』에 이형상 목사의 아들 형제가 당신(堂神)의 저주로 졸지에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이
있음을 볼 때, 이형상 목사의 신당파괴 행위는 좁게는 제주 심방의 분노, 넓게는 믿음 깊은 제주 민인의 원한을 산
폭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처럼 심방이나 스님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통치자의 폭력이라는 업보를 덮을
수는 없을 게다. 그래서였을까, 뒷날 절집에 들러 부른 노래가 참회의 곡조처럼 들린다.
(49)귤, 열매 가더니 향기마저 가다
김남길(金南吉), 귤림풍악(橘林風樂), 탐라순력도5, 종이, 30×30cm, 국립제주박물관
지금은 없어진 감귤농장을 그린 <귤림풍악(橘林風樂)>은 그 화폭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만큼
눈부시다. 1703년의 작품으로 그 해는 물론, 18세기 초 조선 미술사에 이런 작품은 다시 볼 수 없는 걸작이다.
네모의 화폭 전면에 아롱진 귤나무와 복판에 제주목사 이형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풍악을 즐기는 일군의 인물들이
뽀얗게 스며들어 간다. 위쪽엔 검은색 울타리가 부드러운데 키 큰 대나무가 복판 귤나무 숲을 곱게 감싸고 아래쪽
망경루(望京樓)와 귤림당(橘林堂)이 울긋불긋 자리 잡아 호위하는 위엄을 드러낸다.
오른쪽 병고(兵庫)와 교방(敎房)은 자칫 딱딱한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추임새 역할을 하는데 무기창고인 병고는
화살로 쓰이는 대나무 울타리를 보조하고 기생의 교실이자 근무처인 교방은 숲을 살짝 파고들어 욕망을 자극한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망경루 뒤편의 이곳 귤나무 숲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겨울이 오고 있음을 깨닫지 못할 만큼’ 즐거
움에 빠져 스스로 그 과수원에서의 풍악을 『남환박물』에 다음처럼 그려놓았다.
“가을과 겨울에 낙엽 질 때 유독 과수원은 봄철 녹음으로 단장하여 하늘을 가린다. 누런 열매가 햇빛에 비치니 나무
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
이렇게 무르녹는 귤나무 숲 속 풍악이야 제주목사와 수행원만이 누리는 특권일 터, 부럽다면 부러울 뿐이다.
그렇게 농익은 귤은 제주사람 몫이 아니었다. 고르고 골라 저 육지 한양으로 봉진(封進)하는 것이었으니 열매는 가고
향기만 남을 게다. 한양으로 가면 제사용은 예조로, 진상용은 왕실로 들어갔다. 처음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국가의
규모가 정비되고 활력이 넘치던 세종대왕 시절 점차 증가하였다.
나아가 민가(民家) 과원의 감귤마저 징수를 시작하였더니 이들은 민가의 감귤나무 숫자를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
가 맺기 시작하면 열매 숫자를 세어 기록하고, 심지어 주인이 열매를 따면 절도죄로 몰아대는 국가범죄가 시작되었다.
폐해가 극심하자 중종 때인 1521년 별방, 수산, 서귀, 동해, 명월의 방호소에 관립 과원 30곳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도 잠시뿐, 매년 제주목사가 7, 8월에 민가 과원을 순시할 때면 관리들은 붉은색 물감 붓으로 표시
하고 기록했다가 귤이 익는 날이면 모두 헤아려 가져갔는데 까마귀나 까치가 쪼아버리기라도 하면 주인이 대신 납부
하도록 하였다.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독약 나무와도 같아졌고 혹 자기 땅에서 귤나무가 자라면 잘라버리고 말았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개혁군주인 광해로서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즉위한 바로 그 해 제주 사람들이 호소하는 말을 듣고 진공해 오는 감귤 수량을 크게 줄여주었다.
광해는 뒷날 정변으로 쫓겨나 제주로 유배를 왔는데 사람들은 그 은덕 기억이나 했었을까.
그보다 150년 전 사림의 종장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읊은 제주노래 「탁라가(乇羅歌)」엔 그저 곱고 아름다울 뿐,
제주 사람 힘겨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엔 간 적도 없이 그저 소문만 듣고 했던 노래니까 그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