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이 어떠셨나요? 지난 주일날 우리가 감사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는데 한 주간 동안 감사함이 가득한 삶을 사셨나요?
아니면 사탄에게 줘서 감사의 자리에 불평과 불만이 들어오고 심지어 분노하는 날들을 보냈나요?
감사가 있었던 삶을 살았다면 그 삶이 오는 주에도 오는 주에도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고 감사를 빼앗긴 삶이라면 다시 감사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전했듯이 감사 기도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진다고 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열심도 헌신도 헌금도 다 그래요. 그렇다고 아주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끝까지 신실한 경우도 많이 있어요. 그리고 또한 신실하긴 한데 잘못된 방향으로 그래서 다른 믿음이 나타나고 그에 대한 열성 열심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소위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죠. 한국에도 있고 영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어느 곳에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참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참 믿음이 참 열심히 사라지고 아니면 잘못된 다른 믿음들이 생겨나는 배경에는 초대 교회를 건강하게 지켰던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그 교회들을 건강하게 지켰던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종말 신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초대 교회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어려웠죠. 밖으로는 유대인들 외 또 로마인들의 위협 핍박 박해가 있었고, 안에서는 교회 안에 일어나는 다툼과 분쟁들도 있었고 또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거짓 이단적인 가르침들이 있었어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한 교회가 건강하게 서 있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데 그렇게 해준 것 교회를 또 교회에 다니는 성도를 지켜준 것이 있으니 앞에서 말씀드린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믿음이다는 것이에요.
그때만 있을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음에 신실한 분들 있죠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열심히 썩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열심히 생기는 그런 분들을 보면 그 인생에 분명히 종말 신앙이라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단들이 종말론에 집착을 하여 종말론으로 사람들을 꼬입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순진한 마음들을 끌어들이고 그리고 다 빼앗으려는 사기꾼들이 많다 하는 것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늘 갑자기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면 오셔서 맡기신 재능에 따라서 달란트에 따라서 이제 최종적으로 결산을 하시겠다 하시면 우리의 행위를 다 아시는데 그 행위에 따라서 영혼을 결정할 심판을 내려주신다면 나의 마지막 날이 바로 오늘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단들이 믿기로 잘 사용하는 질문들이에요. 그래서 신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걸려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답에 있는 것이 답에 있는 것이지 이 질문들 자체가 아니에요. 이 질문들은 지금 한 전문들은 성경에서도 주어지는 질문이고 바른 대답과 함께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아주 건강하게 해주는 중요한 것입니다.
건강하게 해주는 이 종말의 신앙 안에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기본적으로 있어요.
첫째는 다시 오실 그 주님에 대한 소망이 있고 둘째는 이 세상 것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경계가 깨어 있음을 믿고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것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사이를 지나가는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을 생활을 더 자라게 도와주는 것이 정말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돼요. 본문이 속한 마태복음 25장에는 3개의 비유가 나와요. 3개의 비유로 되어 있는데 모두 다시 오실 주님의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때에 오는 신랑의 비유이고 두 번째는 종들의 재능에 따라서 맡기고 간 달란트를 가지고 최종적으로 결산하는 주인에 관한 비유이고, 오늘의 말씀이 되는 세 번째는 이 영광의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이 마지막 비유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말씀이 있어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하며 사는 우리가 첫째로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어디에 관심을 갖고 어떤 사람들과 사임을 갖고 어떤 일을 행할 것인지에 관한 관해서 알려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믿음에 관한 겁니다.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때 말하는 믿음은 주님으로 임금으로 왕으로 믿는다는 뜻을 가리키는 겁니다. 충성을 바치는 자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이나 조직이나 재물이나 능력이나 기술이나 천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31절로 33절을 보면 인자가 나와요. 예수님의 세 번째 비유의 첫 번째 보면 인자가 나오는데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데 그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을 하는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을 하듯이 하고, 그래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축복을 선언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벌의 벌을 선언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인자, 이 비유 속의 인자가 지금 말씀하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이시라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 주님의 자리, 임금의 자리가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반복해서 말해도 감이 없다고 했죠.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오늘을 그리스도의 왕 주일 크라이스트 킹 선데이라고 하고 지킬 교회력의 마지막 날이죠. 세상에 주라고 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의 충성을 요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을 넘어서 우리의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에게만 속해야 할 이 절대적인 충성 언디바이디드 로열티 이 절대적인 충성을 사람이나 물건이나 이념이나 행동이나 그룹이나 재물들 그런 것들에 바치게 해요. 교회조차도 그런 풍조의 휩쓸려 갈 때가 있었고, 심지어는 교회가 그런 풍조를 만들어낸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듯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주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부를 때 쓰는 주 큐리오스, 두 퀴리오스를 가질 수 없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 권력에 복종을 하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권력보다 높으신 분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러한 세상 권력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행할 때나 아니면 마땅히 하나님만 받으셔야 하는 충성을 요구할 때에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음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속하든지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어느 쪽에 속하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맞죠 둘째로 우리의 관심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있는 곳이 우리의 관심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있는 곳에 우리의 관심이 있는 것이 중요하죠.
본문을 통해서 얻는 바는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셨나요?
무엇에 관심을 두셨나요? 그는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들의 안녕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본문 34절로 36절에 보면 그들이 누구입니까?
주린자들이오 목마른 자들이오, 나그네 된 자요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실 만큼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지금 두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로 그들처럼 피로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가까이하고 사임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됩니다. 여러 은이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 사귀고 싶은 사람 생각할 때에 꼭 마음에 넣을 말씀이 됩니다.
넷째로 우리가 할 일이에요. 다시 34 36절을 보면 주인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것을 주는 것, 나은을 자는 자를 영접하는 것, 허혈받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것, 병든 자를 돌보는 것, 또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것
내용적으로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죠.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맛있는 비싼 음식을 사라고 하시지도 않았고, 병든 자를 기도를 열심히 해서 고쳐주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았죠. 목에 갇힌 자를 풀어주라고 가서 싸워서 풀어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들을 말씀하셨고, 개인적으로 어렵다면 공동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있을 수 있어요. 시대가 다르기 때문일 수 있고, 국가가 감당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고, 또 그런 사람들이라고 지금 말한 사람들이라고 모두 다 도움을 꼭 받아야 하는 경우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 이 말씀을 멀리하거나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조경점을 찾을 만큼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사랑과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피로가 그래서 우리의 도움이 물일 수 있고 물 한 잔일 수 있고 밥 한 그릇일 수 있고 입던 옷일 수도 있고 따뜻한 영접일 수도 있고 병문안이나 방문일 수가 있어요.
이런 것들이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작은 일들일 수 있는데, 오늘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우리의 영생과 영벌을 결정할 만큼 아주 큰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잘 따라오셨는데 지금까지 들은 말씀이 조금 어렵게 들릴 수도 있어요. 우리의 임금이 누군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래요. 또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또 어떤 사람들과 사귀야 할지, 또 무엇을 행해야 될지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까지 기록돼 있는데, 이 말씀들이 여러분들에게 좀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두 가지 그림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첫 번째 그림은 하늘에까지 높아지려고 했던 사람들이 쌓은 바벨탑 그림이에요. 그렇죠 이 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늘에 닿으면 유명해지고 그리고 하나가 돼서 흩어짐을 면할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까지 높아지면 우리가 잘될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익한 말들이었죠. 소설가 이승우 씨가 말한 대로 탑이 높아진 만큼 가까워져야 할 하늘은 탑의 높이와 상관없이 꼭 그만큼 멀리 있었다. 사람들이 움직여서 높아져도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높은 채로 있었다. 하늘의 부동성에 대해서 말하는 건데, 결국 탑을 쌓았던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생기고 의심이 나타나고 혼돈과 다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때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고 지금도 이어지는 세상의 주된 흐름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어떤 현상이에요? 내가 받은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 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아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자유도 얻었는데, 그 모든 것을 그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나의 욕망을 위해서,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세상이 세상에서 얻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없는 것들인데, 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름을 내려고 하고 성공하려고 하고 부자가 되려고 하고 계속해서 더 높이 높이 높이 높이 더 많이 많이 많이 얻으려고 하는 경우들이 그렇다 하는 것이에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고 있다면 오늘의 말씀이 어렵게 들릴 수가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시고 있는 이 말씀이 어렵게 들린다면 반대로 얘기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벨탑을 쌓는 사람처럼 하고 있을 수 있다 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그것을 좀 더 잘 보여주는 것이 다음 그림이에요. 이 두 번째 그림은 한나 하몬드라는 분이 그린 거꾸로 자라는 나무예요. 작가는 이 나무의 뿌리는 천국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여기 써있는 대로 그리스도는 정상을 향한 끝없는 경쟁으로서의 성장 대신 겸손과 관대함과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가지고 아래로 성장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땅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우리 주님, 그리고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아주 잘 보여주는 그림이고, 아주 잘 보여주는 말이고, 또 그만큼 우리의 신앙을 도와주는 여러분의 생각을 도와주는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이 그림처럼 우리는 천국의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아요. 보통 뿌리를 내리는 나무를 생각할 때 우리가 땅에 뿌리를 둔 나무만 생각하지만 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보게 하는 겁니다. 천국에 뿌리를 내릴 나무와 같아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나무가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 자라는 나무예요. 이 땅의 열매가 아니라 하늘의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나를 위한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나무예요.
그리고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는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됐다면 잘 기억하셔서 여러분 중에 아무도 주님께서 오실 때 준비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지 말고 잘 준비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 아무도 자기 생각대로 행하여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불림을 받지 말고, 모두 다 주인의 뜻대로 행해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듣기 싫은 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라는 말을 받지 말고 모두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와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서 예비한 나라를 상속하라 하는 그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