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전수칙의 딜레마
<론 서바이버>(피터 버그, 액션/드라마, 15세, 2013)
‘유일한 생존자’란 뜻을 가진 <론 서바이버>는 2013년에 제작되어 2014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인데, 2005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소수의 미군 네이버씰 대원과 200여명의 탈레반과 벌인 교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에서 착안하여 만든 작품이다. 전쟁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구현해 내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교전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오프닝 씬에서 비교적 길게 보여주는 지옥 같은 훈련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실제 전쟁 상황에서 무엇을 경험하며 또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전쟁의 리얼리티를 경험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적인 평화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 내용은 미 해병에 막대한 인명손실을 가져오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적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중에 벌어진 이야기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지역에 근접하여 매복하고 있던 부대원은 산속으로 들어온 민간인과 조우한다. 부대와 통신 두절이 되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중에 부대원 사이에 심각한 갈등 상황이 벌어진다. 한편에서는-생존자의 관점이다-그들을 민간인으로 보고 교전수칙에 따라 그들을 살려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탈레반에 속한 사람이라고 보아 후환이 없는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선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관의 명령을 받기 위해 통신 연락을 시도했지만 거듭 실패하고 만다. 결국 최고 상급자의 결정에 따라 그들을 민간인으로 보고 교전수칙에 따라 살려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 후에 그들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200여명의 탈레반의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작전도 실패할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내 반 탈레반 운동을 하는 한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오직 한 명만 살아남는 결과로 임무를 마치게 된다.
영화는 결국 교전수칙을 따르는 일 때문에 임무도 실패하고 또 부대원을 잃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생존자의 관점이기도 했기 때문에 영화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누가 군인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전시 상황에서 교전수칙을 지키겠다는 결정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쉽게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일한 생존자가 쓴 책을 영화로 만들면서 감독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단순히 미국 영화에서 전형적인 영웅주의를 내세운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왜냐하면 유일한 생존자는 그다지 영웅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았을 뿐이다. 혹시 그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교전수칙을 어겼던 미군들의 여러 비행이 언론에 회자하여 미국의 여론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미군의 자부심을 회복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을까? 그래서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교전수칙을 지킨 미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일까? 이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갈 만한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 내 우파의 작품이라고 단정 짓고 비판하기 전에 이것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비록 교전 중이라 해도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사살하는 것은 정당한 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실 탐탁지 않게 여겨진다. 정당방위를 위해선 상대가 직접적인 공격을 해 와야 하는데, 아무런 공격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잠재적인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군사적으로 공격할 순 없는 일이다. 결국 정당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모든 결과를 열어두고 그들을 살려둘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쟁 상황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꽤 복잡한 윤리적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주는 위협이 실제 상황에선 매우 크기 때문에 전쟁 중에 민간인을 사살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 군인들의 심리적인 자기 방어 전략이다. 이것은 베트남전에서 매우 심각했고, 이라크에서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서도 그랬다. 한국 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을 사살한 군인들에게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아니면 국가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군인은 자신이 공격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교전수칙을 지켜야 할까? 아마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런 질문을 고민하도록 초대한 것 같다. 상당히 복잡한 윤리적인 상황이다.
전쟁 중 벌어지는 복잡한 윤리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기독교에서 전쟁을 말하는 몇 가지 방식을 살펴보자. 하나는 성전이다. 상대국, 특히 이교도 국가 혹은 불의한 국가와 전쟁을 치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군 전쟁이지만, 오늘날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다. 근본주의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견해다. 성전은 이교도 심판의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논리도 있기 때문에 교전수칙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 정당전쟁론이 있다. 정당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에 있어서 정당해야만 전쟁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전쟁이라는 것이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급변하기 때문에 매사에 정당성을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부당한 전쟁을 온갖 논리로 포장하여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노력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쉬 정권에 의해 벌어진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정당전쟁론에서 교전수칙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전수칙에 근거해서 전쟁수행 과정의 정당성이 보장받기 때문이다.
이것과 달리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을 포기하는 평화주의적인 입장이 있다. 퀘이커 교도나 존 요더의 입장을 따르는 메노나이트에게서 발견된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평화주의적 관점은 다소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다. 불의에 대한 저항 자체를 포기하거나 부조리한 상황을 피해 도피하는 경향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나타난 대안은 전쟁의 발발을 사전에 막는 평화주의다. 이것은 흔히 ‘정의로운 평화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은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다. 상호 갈등과 충돌 때문에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가서 무력이 아닌 평화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모색한다.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WCC는 평화운동의 기본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 속 미군의 네이버씰이 직면한 딜레마는 미군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다소 원론적인 말이지만,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벌인 아프가니스탄 전쟁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보복전쟁은 한풀이에 불과하다. 일시적 감정적인 해소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조적으로 또 다른 상처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한 미군은 미 해병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탈레반 인사를 제거하기보다는 더 이상 피해가 없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남북의 갈등과 반목의 상황에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평화의 메시지로 옷을 입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 이유이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하며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적대 관계를 더욱 고착화 시킬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적당한 방법이 결코 못된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평화주의, 곧 남북의 적대 관계가 현저한 곳으로 가서 더 이상 갈등과 반목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남북의 대치 상황에서 기독교가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