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오면 한 여름이 시작되는 성하(盛夏)의 계절이다. 겨울의 찬 바람과 숫처녀의 향큼한 봄바람을 뒤로하고 들어서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는 화산의 폭발력이 가슴을 달구고 있다.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널푸른 바다에라도 뛰여들고픈 욕망이 솟아 오른다. 모자람이 없는 모든 것이 풍부해지는 세월이다. 오늘 사가정역에서 용마산(348m)으로 향하는 지기들은 어떠한가. 서류바 패노우 위짜추 까토나 네명의 노객들도 출발만은 가볍다. 산객들이 거의 없는 한적하지만 조금은 경사의 맛도 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선다. 정상까지는 쉬엄 쉬엄 올라도 한 시간이면 넉넉하다. 십여분을 오르면 십분 이상을 숨을 다듬어야만 하는 노객들이니 어찌하랴. 육체는 성하(盛夏)가 아닌 계절에 비유하면 늦가을의 모습에 어울린다. 그토록 푸르던 나뭇닢으로 덮혀 있는 울창함은 보이지 않고 있다. 탈색된 낙엽 몇닢이 쪼그라든 초췌함으로 숨가쁘게 나부끼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 떨어져 흩날려 버리면 어디 가서 찾을 수도 없지 않겠나. 어찌보면 당연하면서도 예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자신만의 관점과 아집으로 쌓아 놓은 삶의 돌탑은 철옹성이 아닌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의 정치적 판단은 자신만의 아성(我城)이다. 80여년 가까이 돌멩이와 철붙이로 녹여 만든 철두(鐵頭)와 석두(石頭)의 철석두(鐵石頭)가 아닌가.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둔탁한 철두(鐵頭)의 망치소리만이 튕겨져 나오고 있다. 상대방의 철두를 녹여주는 화끈한 용광로는 커녕 호롱불의 따뜻한 아량은 찾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잘 잘못을 떠나서 옳고 그름을 마다해도 결론은 없다. 자신만의 주장과 언성만이 산울림으로 돌아오고 있다. 오늘도 어제처럼 어쩌면 내일도 오늘과 같은 그대로의 설전(舌戰)은 계속되리라. 백년지기의 노객들과 함께 산행을 하며 침을 튀기는 고집스러움 속에서도 우리들에게는 우리들만의 삶의 행복과 활력소가 스며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의 두시간이 걸려서 용마산 정상에 오르니 서울 시내가 노객들의 발 아래 놓여 있는 게다. 손에 잡힐듯이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만장대가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남산도 관악산도 대모산도 수락산도 모두가 노객들에게는 아름다운 젊음의 짜릿한 추억들이 켜켜히 쌓여 있으리라. 앞으로는 이처럼 오르기는 커녕 오매불망 추억만으로 그리워해야 할 그런 세월도 머지 않았을 게다. 미련일랑 버리고 지금 이 순간도 또 다시 아득한 추억의 흑백 사진이 되리라. 못 다 함과 아쉬움은 언제나 가슴에 남는 법이거늘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으리오. 지금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음으로도 행복이 아닐까. 몇컷의 폰샷이 주름으로 도배한 얼굴을 웃음으로 잠시 돌려주고 있다. 건너편에 있는 아차산은 왼쪽에 두고 긴고랑계곡으로 내려선다. 우거진 숲속에는 물소리도 들을 수 없는 커다란 돌들이 계곡을 메우고 있다. 간혹 물이 모여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산객들이 차지하고 있다. 시원한 계곡 산바람이 후덥지근한 노객들의 가슴을 잠시나마 풀어제끼게 하고 있다. 중곡역에서 기다릴 대바기를 맞으러 서둘러 하산한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더 이상 걷는 것이 무리라는 패노우도 맛집에 들어서면 만사가 행복함으로 다가온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BEER 한 잔과 쐬주는 노객(老客)들에게 천군만마(千軍萬馬)와 같은 삶의 구세주이며 활력소가 되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