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도하, 앞에 보이는 다리를 지나면서 육도하가 해란강과 만난다.>
카나다장로회토성보교회와 한락연공원
연변의 기독교 역사는 1948년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단절이 되었다.
카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철수를 한 뒤에 끝끝내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파송국가들은 2차세계대전 이후 복구와 냉전으로 말미암아 선교사 연구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중국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으로 취급하고 특별히 기독교를 적대시하므로 교회 건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파괴하였다.
북한도 마찬가지이므로 간도의 기독교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우리 한국의 학자들은 간도가 지리적으로 멀고 심리적으로 멀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해방 이후 남하한 몇 몇의 크리스천들이 기록한 것을 자료와 연구 빈곤으로 종합적으로 분석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검증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팩트로 받아들여 정통과 정사로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1920년 일제의 대학살 때 불에 탄 학교가 29개인데 대부분의 글들이 일제의 대학살 때 명동촌과 명동학교만 박해와 피해를 많이 받은 것처럼 글을 써서 편견을 심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교육, 독립운동을 목표로 하는 사립학교가 연변에 81개인데도 그런 글들이 우리에게 당시 간도에는 학교가 명동학교 하나만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연변에서 나온 책이나 한국에서 나온 책이나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이유는 그것이 팩트여서가 아니라 연구를 하지 않고
몇 몇 사람이 쓴 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79년의 세월이 흘러서 건물들은 거의 다 사라졌고 그 시대를 산 자들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카나다장로회 산하의 110여 개의 교회가 세워진 장소, 위치 확인조차도 어렵다. 그러나 좁은 나는 당시 교회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이 크므로 지역 교회의 위치를 찾으면 간도의 유명, 무명의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을 찾을 수 있다.
오랫동안 용정뿐 아니라 간도의 첫 교회인 용정시교회와 용정중앙교회 그리고 용정동산교회 위치를 알고자 하였다.
7년의 노력 끝에 용정시교회가 용정중앙교회로 개명되었다는 사실과 두 개 교회의 위치와 역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용정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용정이 된 합성리와 용강동교회의 위치도 파악하게 되었다.
용정과 2km 반경 안에 5개의 교회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용정 조선인의 새로운 종교와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을 대변해준다.
당시의 모든 기록에 지역 교회들의 주소가 적혀있지 않고 국공내전 이후 중국의 행정구역이 달라졌으므로 지리와 지명을 잘 아는 현지인의 도움 없이는 소재지 파악이 어렵다.
그러나 금번에 가이드의 도움으로 용정중앙교회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였고 용정이 이주 조선인들의 거점이 되고 독립운동의 본산이 된 이유를 확신하게 되었다.
용정은 화룡과 안도, 연길과 도문, 훈춘과 교통이 사통오달이고 앞으로는 서전벌을 뒤로는 평강벌을 두고 있으며 화룡에서 오는 임산물이 풍부하여 물자가 집결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살만한 곳인데다 근대교육, 민족교육이 최초로 실시된 곳이며 카나다장로회선교부가 동산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간도의 중심이 된 것이었다.
카나다장로회의 교회 창립자들은 선교사들에게 신앙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고양되었으며 민족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교회를 세우며 학교를 세웠다. 1920년 일제의 대학살 당시 불에 탄 학교 29개 중에 60% 이상이 기독교 미션스클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오늘 용정시 서북쪽에 우뚝 서있는 용정교회는 토성보교회 터를 물려받은 교회이므로 관심과 눈길이 더 쏠린다.
비록 삼자교회이기는 하지만 용정시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어올리고 있다.
육도하와 해란강이 만나는 그 일대를 조선인들은 토성보라고 불렀다.
조선 이주민들이 빈민가와 시장을 형성하였으며 해란강이 있어서 물자가 풍부하게 모였다.
토성보는 용정에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토성보교회는 세워지면서 곧 바로 노회가 모일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비암산에서 동쪽 서전벌을 바라보면 우측으로 하늘색 유리로 지어진 큰 건물이보이는데
그 교회가 현재는 용정교회이고 과거에는 토성보교회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토성보교회는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분립하였다. 용정중앙교회는 육도하 동쪽, 오늘날 시가지 쪽에 있었고
토성보는 육도하 서쪽에 있으며 서로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교회가 분립되어 창립되는 과정에서 한 교우가 중국인에게 큰 집 두 채를 사서 토성보교회에 기증하였다.
그리하여 토성보교회는 처음부터 예배당 건물을 갖추었고 또한 다른 건물에 부속학교도 세우게 되었다.
1920년 토성보교회에서 강두화 목사와 박걸(A.H.Barker) 선교사가 협력사역하기를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1921년 제 1차 간도노회가 토성보예배당에서 열렸으며 토성보교회는 장로 1인 피택을 노회로 부터 허락을 받았다.
1922년 강두화 목사가 서고도(Williiam Scott) 선교사와 함께 협력사역을 하였다.
1923년 제4차 간도노회가 토성보교회당에서 열렸다.
1923년 강두송 목사가 파송되어 교회 설립 공인예배를 드리고 곧 바로 당회를 조직하였다.
김도현, 이광수, 김찬성, 이은경, 신찬선 등이 장로로 세워져 교회 업무를 맡아 보았다.
특별히 설립공인예배를 드린 강두송 목사를 간략하게 소개한대.
그는 1912년 함경노회에서 신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서 수학을 하였다.
1916년 제 6회 함경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청진교회에서 첫 시무를 하였다.
1917년에는 청진지방에서 매도날(D.A. MacDonald) 와 협력사역을 하였다.
1918년에는 강두송 목사는 청진, 나남, 경성 세 교회에서 매도날 선교사와 협력 목회를 하였다.
1919년에는 청진교회에서 박걸과 협력사역을 하였다.
1920년 두도구예배당에서 열린 제 5회 노회에서 부회계가 되었다.
1920년 10월 동경에서 개최된 "만국주일학교연합회"에 노회 대표로 추천을 받았다.
그의 글 "부인문제"는 1922년에 발행된 <종교계명사강연집>에 실렸으며 남녀인권과 인격의 동등성을 다루었다.
그의 글은 <신학지남>에도 가끔 발표되었다.
1921년 간도노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강두송 목사는 그대로 청진교회에서 예씨(J.V Lacy) 선교사와 동역을 하였다.
1922년 함북노회 부노회장이 되었다.
1923년에도 함북노회 부노회장에 당선되었으나 토성보교회로 파송되었다.
1940년 이후 강두송 목사는 청진서부교회를 담임하였다.
용정교회에서 육도하 쪽으로 걸어나오면 천변에 잘 꾸며진 낙연공원이 나온다.
공원 한 가운데 한낙연의 흉상이 있다. 용정시 정부가 그가 태어나서 성장한 토성보에 그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든 것이다.
한국에는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1919년 가을에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자금까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인 1호로 혁명열사로 예우받고 있다.
그는 1931년 파리로 유학하여 파리미술학원에 입학하였다. 1937년 중국으로 돌아와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석하였으며 1941년 서안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1943년에서 1947년에 그는 난주와 서안에서 20차례 미술전시회를 열었으며 <중국의 피카소> 로 명성을 얻었다.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육도하와 해란강에서 물고기 잡고 헤엄치며 놀았을 어린 한락연을 생각한다.
비암산에 올라가며 용주사 저녁종 소리를 들었을 십대의 한락연을 생각한다.
용정 3.13 만세 시위 때 스물 한 살인 청년 한락연을 생각한다.
1919년 가을에 유학을 떠나는 그를 그려본다.
안타깝게도 토성보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한락연은 상해 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 중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그는 심양에 파송되었기 때문에 카나다장로회 교회를 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멀지 읺은 곳에 용정중앙교회가 있었다.
토성보교회가 좀더 일찍 세워졌으면 그의 인생이 어
떻게 달라졌을까를 생각해 본다.
중국 조선족 최초의 화가인 한락연, 중국 공산당 1호 조선족 당원인 그가 오늘의 중국공산당과 조선족 사회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2024년 10월 22일 화요일 묘시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김혁 저 <한락연>,연변인민출판사,2016
*양전백 편저, 이교남 번역,<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한국기독교사연구소,2017
*호이전, 문홍복 주필,<연변문사자료 제8집,종교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육도하가 해란강을 만나는 지점에서 이백미터 정도 아래에 용문교가 있다.>
<해란강과 구 용문교. 좌측에 십자가 탑의 건물이 현 용정교회로 토성보교회 자리에 지어졌다.>
<신 용문교.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는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신 용문교 다리 입구에 있는 용의 상>
<해란강. 하얀 반원형의 교각이 육도하에 걸쳐 있는 다리다. 그 우측에 교회탑과 십자가가 보인다>
<일제시대에 세워진 구 용문교. 지금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가운데 건물 우측으로 보이는 것이 비암산 자락이다.>
<한
<공원 안에 세워진 그의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