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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선 지연작전(풍기-안동 전투)
1. 전투 개요
풍기-안동 전투는 국군 제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제8.12사단과 7월 14일부터 7월 31일 가지 풍기-영주-안동 일대에서 벌인 방어전투다.
제8사단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철수한 이후 풍기분지에 살상지대를 계획하여 14일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12사단을 무력화 시켰다. 이로인해 북한군은 제8사단을 투입해 제12사단을 증원하게 된다. 따라서 제8사단은 24일 옹천-안동 지구로 철수한다.
국군 제8사단은 24일 내성천 방어선을 형성하여 3일간 대치하며 28일 내성천 방어선이 돌파되자 옹천-안동으로 철수하며 지연전을 수행한다.
한편 이 무렵 중부전선을 담당했던 국군 제1군단이 7월 25일 안동으로 이동하고 이에 앞서 21일에 수도사단이 보은에서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이 후에 28일 문경 유구에서 철수한 제1연대를 풍산에 배치하였다가 31일 안동읍 뒷산에 재배치하여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게 한다.
'50.8. 1일 새벽에 안동을 철수하게 되는데 건너기도 전에 안동교가 폭파되어 장교 21명, 사병 814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는 대 참사가 벌어지는데 바로 제2의 한강교 폭파사건이다.
2. 전투경과 및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풍기-영주전투
7월 12일 죽령선에서 무러난 제8사단(이성가 대령)은 풍기를 중심으로 제10연대(고근홍 중령)를 5번도로 좌측 장군봉-426고지선에, 제21연대(김용배 중령)는 도로 우측 258고지-277고지-299고지에 배치하여 V자 형국을 만들어 진지를 구축하고 좌측방 지역에는 청풍지역에서 철수하면서 위치를 모르던 제21연대 제7중대가 9중대와 예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7중대장으로 하여금 경찰 병력을 포함해 500여 명으로 구성된 예천 홍성대대를 노상동 부근에 배치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12사단은 단양전투의 손실 병력을 보충하고 7월 14일 차량으로 죽령을 넘기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전날밤에 제8사단의 차량을 이용한 역후퇴전술에 속아(차를 라이트를 켜서 내려가고 올라 올때는 크고 올라와 철수한 것으로 위장) 별 대책없이 v홈 안으로 들어왔다가 2회에 걸쳐 살상지대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15일에 측방기동으로 전술을 바꾸게 된다.
15일 이후이틀간 조용했던 전장은 18일 02:00를 기해 전 정면에 기습공격을 감행해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 되면서 7월 20일에 제2사단 소속의 제16연대가 사단에 배속 되었다. 그러나
측방인 에천 방향에서 적 연대규모가 기동하는 것이 포착되어 육본은 사단을 오천으로 철수토록 조치하고 예천에 배치된 제18연대로 하여금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토록 하여 24일 철수를 완료하고 내성천 차안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제18-1대대는 예천으로 복귀하였다.
"소백산 핏물을 먹고 살았어요."
풍기에는 희방사라는 고찰이 있다. 이곳에 나를 알고 있는 스님이 있다하여 찾았다. 소백산 정상에서 국망봉에 이르는 구간은 나무 한그루없이 억새풀같은 초목만 무성하였다. 이곳에서 전투는 제1연화봉일대 무선 중계소 지역이 전쟁터였다는 것은 단양지구 전투에서 알아보았다.
다시 비로봉으로 와서 비로사방향으로 내려서 비로사에 갔다. 이곳으로 차량이 오게 되어있다. 삼기리의 금계천이 많은 제보자들, 특히 피난민들의 이야기에서 군인들이 많이 죽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군장을 어깨에 메고 총을 잡고 죽어갔다는 것인데 대부분 부상자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제보를 한 할머니는 서울에서 온집안이 피난을 나서 문경을 거쳐 단양으로 여기서 소백산을 넘었는데 바로 지금의 금계천 상류로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몇살때 피난이였습니까?"
"내가 9살에 밑에 동생이 남동생 1명, 여자동생 1명이 더 있는데 여자동생은 피난 길에 죽었어요."
"그럼 민간인은 없이 군인만 죽어있었습니까?"
"어린 나이에 꼭 군인인지 민간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머니 이야기가 군인이라 이야기했어요. 내려오는데 폭탄이 떨어지고 비행기도 나타나 총을 쏘아 많은 사람이 다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핏물은 어떻게 먹게 되었어요?"
"내려오다 밤이 되어 산속에서 잠을 잤는데 계곡 옆에서 잤어요. 여름이라 너무 더워 밤에 물을 먹고 싶어 흐르는 물을 먹었는데 아침에 보니 색깔이 좀 이상해서 어머니가 살펴보니 바로 위에 군인이 죽어서 개울에 엎어져 있었어요."
"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갔다 살아왔어요."
할머니는 억세게 기가 쎈분이였다. 어린 나이에 무섭지도 않고 당당하게 따라다녔단다. 그런데 이 소백산맥을 넘으면서 피난민들이 한지역에 몰려서 있는데 북한군이 들어와 웬만한 남자는 다 붙들어 갔다. 조국해방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며 곧 돌아온다고 떠들어댔다.
아버지는 북한군이 주는 베낭을 메고 산을 출발해 한밤중에 떠나가고 엄마와 자식들은 울수도 없었다. 비는 억세게 내리고 엄마와 아버지는 뭐라고 수신호를 주고 받고 하였다. 결국 이 비로 인해 막내가 감기가 왔는데 어디서 약도 구할 수 없고 결국 죽어갔다.
풍기에는 어머니 외가가 살고 있어 산속에서 얼마동안 머물다 찾아갔다. 이때는 북한군이 판을 치고 다녔다. 매일 이상한 여자가 돌아다니며 호구조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당당하게 나와서 돌아다니며 이집저집을 넘겨보았다. 사람이 안보였다. 아버지는 떠난지 얼마되었는데 돌아오지않아 엄마에게 물어보니 곧 온다고 했다. 얼마가 지나 국군이 올라오고 할머니는 다른 피난민들이 다 돌아가는데 아버지를 기다리며 머물러 있는데 아버지가 나타났다. 낙동강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북한군과 함께 다녔고 북한군이 한밤중에 모두 사라져 아버지는 도망쳐서 올라 오는데 국군이 와서 함께 풍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색씨색씨, 풍기 성내리 또랑에 남겨진 발가벗은 용사"
우린 할머니의 이야기로 풍기읍내에 길거리에 군인이 죽어서 많이 있었다는 제보를 들었다. 그래서 풍기역 일대를 중심으로 마을회관 등을 찾아서 마을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따라오라 한다. 전쟁을 이곳에서 모두 보냈다며 미군 욕을 한다. 전쟁하러 왔는지 여자 만나러 왔는지 군인과 같이 다니며 "색씨색씨" 하며 집집마다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밖에는 잘 나오지 못하는데 할머니는 임신을 한 상태로 한 번 집앞에 나갔는데 아니 발가벗긴 남자가 또랑 옆에 있어 너무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어요?"
"아무리 전쟁때라 할지라도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지요. 엎드려 있는게 아니라 벌렁 누워 있어 좀 그러길래 발로 굴려서 또랑에 밀어넣었어요. 여기 근처예요."
그러나 이미 길이 복개되고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길을 파헤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상한 대대장(제21-제1대대장 윤태현)"
제8사단이 죽령을 버리고 풍기로 물러서 V자형 병력배치로 5번 도로상에 살상지대를 구축하고 있을때에 '50. 7월 18일 02:00에 드디어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 되었다. 하지만 도로상 우측 제21연대의 좌일선 부대인 제1대대는 적의 기습을 물리치며 진내전까지 벌이고 물러나지 않는데 북한군 소수병력이 대대 관측소 부근까지 오자 바로 철수명령을 내리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로인해 그 우측의 제2대대는 퇴로차단의 위협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로인해 사단의 방어계획이 차질을 가져오고 인접 제2대대 장병들의 원성이 높았다.
하지만 다음 안심리 248고지에 새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동안 빼앗긴 258고지의 북한군이 재편성하는 호기를 포착했음에도 역습을 하지않고 소극적으로 방어에만 치중하여 작전실패와 명령 불복종의 책임을 물어 즉결처분하게 되었다.
당시를 목격한 송모씨가 증언한 내용을 보면 그날 저녁 헌병 2명이 카빈총으로 팬티 차림에 구덩이 옆에 서있던 윤소령을 총살했다고 한다.
그 후 이문제는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유족의 청원을 받아들여 적법절차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라는 권고를 내리게 된다. 이유는 한국전쟁 때에 분대장 이상에게 즉결처분권은 7월 26일 0시부터 부여한다는 참모총장 훈령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지금 싯점에서 그 위중함을 옳게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한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주요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속성은 한순간 실수나 오판이 가져오는 피해는 한두명이 아니라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 온다.
한 예로 실제 전쟁 초기에 우리 일선 지휘자(관)들의 사상이 불손하여 대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들어가지도 했고(제8연대 표무원, 강태무 대대장), 전쟁이 발발하여 청량리에서 출동대기하던 이 제8연대에 이00 중대장이 아군의 이동 상황을 전령을 통해 첩자에게 알려(쪽지에 적흰 금액이 병력숫자와 일치)주려 한것을 평상시 수상하게 여기던 장교가 그 전령을 붙잡아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당시 인접 중대장인 정승화후에 참모총장) 중대장에게 통보하고 정 중대장은 다시 서종철(후에 국방장관) 연대장에게 통보하여 즉결처분되는 상황도 있다. 그 당시는 불순 분자가 군내부에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전쟁은 비극이다. 준비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천부산의 소대장"
유독히 책임을 엄중하게 물은 연대장이 제8사단에 다 있다. 제10연대장 고근홍대령도 두번째가라면 서러운 분이고 지금 제21연대장 김용배 대령도 그렇다.
그러나 전사를 들여다 보면 이런 연대장이 있었기에 제8사단은 2개 연대밖에 없으면서도 전쟁 초기 가장 동쪽에 치우쳐 누구로부터 지원도 없이도 적 제5사단과 제766육전대를 물고 늘어져 쉽게 물너나지 않았다. 그 포병들은 대부분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되어 진내전투도 육박전으로 하고 절대 북한군에 지지않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이런 영향에서인지 5번도로 좌측을 담당한 제10연대는 장군봉과 바로 밑에 있는 천부산을 오르내리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하다 우측 제21연대가 붕괴되면서 철수해야만 했다.
나는 풍기 동천사에 들러 인연이 있는 스님(계룡대 법당 근무)을 찾았다. 절을 안내받고 나와 점심을 밖에서 같이 했다. 그런데 식사도중에 어느 아저씨가 자꾸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무슨 하실 이야기가 있는냐고 물었더니 내 복장이 '유해발굴단'이란 조끼가 생소하여 짘켜보았다 한다.그러면서 본인이 7살에 전쟁이 났는데 대촌리 주성골에 들어가 부모님과 숨어살다 나왔다 한다.
"장군봉에서 3구를 보았고, 천부산에는 소대장이 묻혔다."
본인이 직접 다 안다며 현장 안내도 가능하다고 하여 뜻밖의 제보자를 만나 나는 일단 차를 이용하여 천부산에 올랐다. 임도를 따라가니 천부산은 쉽게 올랐다. 차에서 내려 한 20분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숲 사이에 봉분이 무너져 내린 3기가 어렴풋이 보인다.
"내가 이곳에서 아버지가 묻는 것을 직접보았습니다."
"그럼 소대장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계급장이 있는데 소대장이라 했고 나머지 두분은 꺽기가 3개씩 있었는데 일등중사인지 상사인지 뭐라고 했어요."
우린 다시 나와 장군봉을 올랐다. 차로 밑으로 내려와 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 올랐는데 산 능선에 호가 줄지어 있다. 열심히 호를 구축하여 적을 기다린 흔적이 뚜렸했다. 탐지기로 대보니 소리가 요란하다. 3구의 시신을 보았다는 곳은 능선에서 약간 북쪽으로 7부 능선정도 되는데 평평한 곳에 약간 볼록한 곳을 가리킨다. 그곳을 기초 굴토해보니 반합이 나와 우린 매우 희망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발굴결과 천부산에서 1구, 장군봉 일원에서 3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달봉산아래 도로속에 묻혀진 국군"
남쪽에서 옛고개를 넘으면 바로 새터가 나온다. 옹천지구 전투가 되기전에 가장 격전이 이곳 평은면 옛고개를 중심으로 반경 5km내에서 벌어진다. 내성천이 흐르고 있어 천연적 장애물이 될 것이라 하지만 적 침투부대들이 사전에 들어오고 풍기-영주지역에서 적의 침투전술에 혼이난 제8사단 병력이 다시금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나는 새터에 있는 마을의 고추농사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집에서 만났다. 여기에는 사과 과수원이 많은데 고추 농사를 3,000평이나 하는 집이다. 아마 20년 동안 이곳은 5번정도 탐문하게 되는데 집에 사람이 없어 별로 만나지를 못하다가 어떻게 붑를 함께 만났다.
"어르신 좀 쉬어가며 일하세요?"
"아이고 비오면 고추가 다 버려요. 빨리 말려야 하는데 이제 힘들어요."
"저희가 좀 도와드리면 안됩니까. 할 수 있으니 뭘 할까요?"
"고맙습니다. 지금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 마당에 펼쳐 있는 고추를 갑바로 덥기만 하면 됩니다."
우린 바로 갑바로 고추를 덮고 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포도를 가지고 나오셨다. 집에서 포도밭을 조금 한다고 하신다.
"할아버지 전쟁때 여기 살았다고 저 밑에 아저씨가 말하던데 혹시 죽은 시신을 못보셨나요?"
"바로 저 길에 묻혀있어요."
"네, 저기 보이는 길에요?"
나는 깜짝 놀랐다. 옹촌에서 영주로 가는 935번 도로가 전쟁때는 달구지가 다니는 정도인데 국군이 길로 걸어서 넘어가는데 이미 좌우측에 북한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사격을 하여 길바닥에 널너히 죽었는데 총이고 수류탄이고 쌓였다고 한다.
날씨는 덥고 비는 내리고 사람이 썩어가는데 얼마나 미끄러운지 모른다고 한다. 너무 죽어있으니 빨갱이 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을 긁어모아 길 바로 옆에 또랑에 집어넣고 묻으라 하여 시키는대로 했는데 나중에 미군이 들어오며 탱크들이 밀어붙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길이 넓어졌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북한군 베나을 메고 여기서 걸어서 다부동까지 밤중에 출발하여 갔다주고 새벽에 돌아오고 했단다.
"뭘 메고 갔어요?"
"뭔지도 한번도 열어보지안했어요. 그럴겨를이 없어요. 가면은 그곳에 받으러 온 군인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아주 어린학생들이 많이 보여요."
"다른 곳에 군인들은 못받어요?"
"저기 산 능선 보이지요. 거기가 5번도로 오운터널이 있는데 그 능선을 타고 가면 천등산까지 이어져요. 국군도 후퇴할 때에 옛고개가 막히어 그 곳으로 내려갔고 북한군도 그 능선을 따라 내려갔고 나중에 올라올때도 그 능선으로 와서 강건너 풍기쪽으로 갔어요. 그래서 전후에 올라가 탄피며 철모며 많이 주어다 놓았는데 저기 철모 하나 있네요. 그때 것이요."
할아버지는 한 30년전에만 해도 산에 나무하러가면 송장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산에도 안가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옛고개에서는 포장공사 하면서 따을 파니 전투화만 해도 한트럭 분이 나왔다고 한다.
"이곳 영지산에 1개 중대가 죽었어요"
할아버지가 평온리로 들어가라 하셨다. 마을에 가면 노인들이 그동네는 많이 있다며 장 알려줄 것이라한다. 그리고 옛고개와 봉수산에도 시체가 쌓여 있었고 옹천역부근에 철도 승무원 관사가 있는데 그곳에도 수없이 국군이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알려 주셨다. 고추 말리는 것을 한번 덮어주었다 우린 엄청난 제보를 들어 주변 일대를 거의 1주동안 정밀 탐사 및 탐문을 하였다.
먼저 평은리 마을회관을 찾았다. 그런데 회관이 아닌 동네 입구에 무슨 일이 있는지 여러 어른이 나와 계셨다. 차에서 내려 씩씩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높은 사람이네 어떻게 왔습니까?"
"이 동네에 6.25전쟁 때 많은 군인이 죽어서 있다고 새터에서 알려주어 찾아왔습니다."
"에이, 없다. 너무 늦었어"
나는 어르신들께 없어도 좋은데 그 장소가 어딘지 알려달라 했더니 영지산(505m)정상 부근이라 하신다. 동네에서 밥을 지고 올라가다 동네 사람도 포탄맞아 죽었다고 한다.
"아니 북한군 여군 장교를 묻어 놓은 곳을 아는데 그건 안찾아요?"
"네? 그곳은 어디 입니까. 발굴은 안해도 자료는 남겨야 하거든요."
동네 어른 함분이 우리차에 동승하여 영지산으로 올랐다. 임도를 따라 어느정도 갔는데 산개울을 지나는데 산속에 웬 좋은 집이 있다. 그런데 갑짜기 항소새끼만한 개가 달려와 짚차를 넘본다. 얼마나 떨렸는지. 그런데 주인이 부르니 곧 달려가는 모습이 귀엽게 보인다.
드디어 하차 장소에 서서 설명을 듣고 어르신은 차로 다시 내려가고 우린 산을 올랐다. 오르다 보니 5부능선에서부터 모두 개인호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서니 동북방향에 개인호보다 큰 10개의 호를 발견하고 탐지기를 대어보니 소리가 울린다. 고지 주변 일대가 온통 개인호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탐사내용을 이야기 하니 정말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 한 분이 별도로 만나자는 제안을 하여 나는 양해를 구하여 일행을 남겨놓고 어른을 별도 만났다.
"넓게 파인곳은 전쟁중에 8사단이 와서 군인을 화장해 간 장소요. 이 산에서 1개중대가 포위되어 다 죽었어."
"그렇습니까. 혹시 어르신 연세가 그때 얼마셨는지요?"
"내가 그때 15살인데 키가 작아서 안잡혀가고 살아났어요. 아까 있던 사람은 잘 몰라."
"혹시 북한군을 만나 보았습니까?"
"우리 집에서 그놈들이 살다 갔어요. 아군이 왔을 때는 우리 집에서 먹을 것 다 가져갔고."
"사실 국군이 다 죽은 것은 동네에서 밀고를 해서 그래요."
동네에서 밥과 술을 군인들에게 주었다. 군인들이 얼마나 굶었는지 밥이 부족하여 밥을 더하여 지게에 지고 산을 올라 주고 내려오는 사람을 침투한 북한군이 잠복하다 붙들어가 정보를 캐내어 어둠이 오는데 기습하였는데 산 위에 불꼿이 오르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북한군 신호탄이었다 한다. 졸지에 모처럼 밥을 먹고 쉬고 있다가 총한번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곧이어 아군의 포격과 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북한군도 수없이 죽었다.
며칠 지나 한번 올라가보니 죽은 군인들이 널려 있고 어디서 왔는지 들개들이 몰려들어 물어뜯고 있어 겁나서 그냥 도망왔다고 한다.
그러다 9월에 이번에는 군인이 들어와 동네를 요절내 버렸다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북한군을 따라 떠나버려 애매한 사람들이 붙들려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집안이 꽤나 있다한다.
동네사람들이 동원 되어 시신을 모아서 지금 보이는 호구덩이에 모아 놓고 임시 무덤을 만들었고 이듬해 가을에 8사단이 와서 현장에서 파서 화장해 갔다고 한다. 우린 이 지역에서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럼 북한군 여군 대위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놈들이 여군 앞에 와서 경례를 올리고 군관동무라고 하는데 물어보니 대위라 했어요."
"그런데 조금전에 동네 분 한명이 지금 여군 대위 묘가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아네요?"
"그 말을 믿을건 못됩니다. 왜냐하면 북한군이 밀려 올라갈 때는 반대로 국군이 이곳을 포위하여 북한군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포격으로 대부분 다 죽었는데 불타죽었어요. 원자폭탄을 쏘았다고 하던데."
이렇게 죽어간 산위로 국군과 마을 사람이 올라서 시신을 골라 아군은 별도로 한곳에 모아서 묻었고 북한군은 그 자리에 내버려 두거나 파인 포탄 구멍이나 개인호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도망 간 것으로 알았던 동네에 머물었던 여군이 그 위에서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묻어주냐는 것이다. 여차하면 다 죽는데 묻을리 없는데 나중에 이야기로 주인없는 묘가 나즈막하게 한곳 있는데 그게 여군묘라는 소문이 퍼져 있다고 한다.
나는 그곳을 굳이 가보려 하지 않았다. 북한군일 확률이 많아서다. 그리고 내가 조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 발굴을 하여 30여구의 유해가 식별 되었다.
"봉화읍에 남겨진 9인의 화장 유해"
봉화읍 참전전우회에서 박중태님이 연락이 왔다.
한번 저보고 오라고 한다. 동네에 자가 봉송된 유해인지 모르지만 9구가 있어 군에서 호국단체들이 관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거에 달려가 현장을 보니 일정한 장소에 전사자 이름까지 새겨진 추모비가 있고 이름이 세분이 있다. 나는 용사님과 유족협회 회원님을 만나 관리하게된 배경을 들었다.
"지금 이곳에 여기 묻혀있는 유족이 한분이라도 있습니까?"
"벌써 몇십년 지났는데 한번도 온적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분들이 이곳에 묻히게 되었습니까?"
"봉화 지구에 큰 전투는 없는데 우리가 제대하고 와서 보니 전쟁중에 군인들이 목함에 유해를 가지고 와서 동네사람들에게 묻어달라고 하고 갔다고 들었어요."
"그럼 아마도 잘못 자가 봉송된 유해인데 현재 자리에 있었는지요."
'처음에는 이자리가 아니고 다른 곳에 있던 것을 보훈회관 뒤편에 안장했는데 이곳에 묻을때 몇은 들어 왔어요."
참 딱한 이야기다. 유가족이 없는 유해다. 전시에 자가봉송 되어온 유해가 주소가 틀리거나 유가족이 피난이나 여타 이유로 살고 있지않으면 동구밖에 놓고 가버리는 경우가 사실 많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땅이 개인땅이고 이름이 있는 유해도 병적조회결과 나타나지 않으니 답답해 졌다. 결국 발굴하여 단에서 관리하기로 하고 발굴을 개시하여 파보니 정말 까만 재가 일부 있고 하얗게 타다남은 뼈 몇조각이 있을 뿐이다.
"예천 백마산 골짜기에 국군 유해가 많다?"
우리 전사에 예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찾기가 힘들다. 전사기록은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이곳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기록만 있다.
그런데 예천의 지역주민 한분이 서약사 뒷산이 봉덕산-봉화산-백마산이 이어지는데 국군이 들어왔다가 몰살 되어 길바닥에 널여있고 일부는 오상골(?)이란 계곡에 몇삽 흙으로 덮어 매장했다는 제보를 해왔다.
나는 단양을 조사하면서 하리는 조사를 해본 적이 있다. 하리를 거쳐 단양으로 가는 루트가 미군의 비행기 폭격에 유리하기에 북한군 병력이 이용한 코스다.
하지만 바로 예천읍 뒷산에 국군이 점령(?)했다가 큰 피해를 당했다는 것은 처음이라 먼저 읍내에 가서 읍대장을 만나 마을 회관을 한군데 들렀다. 하지만 대부분 시큰둥산 답변이었고 한분이 28번도로 예천천문우주센터 가기전 갈머리재에 전투가 있어 군인이 죽었다고 한다.
"영주 용혈리 기찻굴(금광굴)에 시체가 쌓였다."
우리는 먼저 갈머리재로 이동하여 길 좌우측으로 200m내외의 야산이라 바로 현장 탐사를 해봤다. 개인호가 많지는 않아도 일부 굴토되어 있어 탐지기를 사용해보았으나 별 반응이 없다. 마침 경운기를 몰고 가는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를 하니 영주 용혈리 기차굴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다.
"아니 어르신이 그쪽 소문을 어떻게 들었어요?"
"내가 지금 평온 파출지서 앞에 살다 이곳으로 온지 한 50년 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우리가 평온 지역 탐문시 들었고 그 당시에 북한군이 미군의 폭격을 피해 그 안에 탄약이며 여러가지를 숨겼다는 제보를 확인하여 이미 조사를 했었다.
"지금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고 북한군이 떠나갈 때 다 어떻게 처리해버려 아는사람이 없습니다."
어르신은 이곳에 이사와서 나무하고 산나물 채취를 위해 갈구리 매봉산(341m) 능선을 타고 북으로 자구산, 장군봉, 천부산, 소백산맥 도솔봉에서 묘적봉 등 안가본 산이 없다고 한다.
"그럼 혹시 어디에 개인호나 전쟁 유품이 남아 있습니까?"
"장군봉에 가장 많아요. 그 곳은 한다리 건너 호도 있고 탄피나 수류탄 박격포탄도 있었어요."
"여기 백마산이나 봉덕산에는 안갔습니까?"
"그곳은 예비군 훈련하러 갔어요. 우리가 호를 파고 했지."
잔득 부푼 희망을 안고 왔는데 난처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왔으니 올라가야한다는 고집으로 점심을 읍에서 해결하고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생각이상으로 호가 많은데 예비군이 판 호는 아니다. 예비군이 판 호는 벌써 형태가 다르다. 규격이 갖추어져 있고 각이 그래도 남아 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에 호는 그렇지 않다. 탐지기를 돌려 소리가 들려 기초굴토를 해보니 탄피와 기관총에 쏘는 탄알를 물고 있는 삼발이가 나온다.
이곳 봉화산 백마산 사이에 용산리라는 계곡형 마을이 있는데 동쪽으로 길게 구릉이 있다. 이곳 앞 동네가 생천리인데 금곡천이 흐르고 남쪽에는 한천이 흘러 아마도 안동으로 들어가는 수도사단 병력이 거쳐간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그러나 골짜기에 국군이 많이 있다하여도 이미 훼손되어 찾기 힘들고 몇번의 수해로 다 씻겨 내려가 아무것도 없다는 지역주민 이야기다.
결국 이곳 일대의 개인호가 무려 400여개 식별되었지만 1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나. 안동 부근 전투
7월 24일 금광리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내성천변에 방어진지를 편성한다. 이날 새로 편입딘 제16연대가 중앙에 배치하는데 이 연대는 제2사단 소속이었고 7월 21일 예속이 변경 되는데 병력이 1,340여 명인데 1,000명이 의성에서 모집한 신병이었다.
7월 25일에 제2군단에서 제1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었다. 사단은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이 바로 시작될 것으로 알고 강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오히려 금광리 강건너 적 관측소로 판단되는 334고지를 공격하여 아군이 탈환하고 1개 중대를 대안상에 배치하였다.
이때 수미상의 병력이 예천과 안동 사이인 풍산으로 이동하고 있어 안동방어가 어렵다고 보고 좌측 영강전투에 투입된 수도사단 제1연대의 배속해제를 요청하여 28일 풍산으로 이동조치한다.
7월 28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되어 먼저 우측 제21연대(김용배 연대장)가 옛고개 북동쪽 천본리일대에서 남쪽으로 무려 11km나 후퇴하게 되는데 제1대대(대대장 임익순소령,차후에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금성지구 전투에서 '53.7월 14일 포로가 되었다 포로 교환시 돌아옴)가 지휘체계가 무너져 생긴 일로 대대장이 보직해임된다.
한편 중앙의 제16연대(김동수 중령)는 오합지졸로 저항 한번 못하고 옹천으로 뿔뿔이 흩어져 철수한다. 이에따라 제8사단은 다시 방어선을 천등산-204고지-연곡-오로봉-233고기를 잇는 선상에 설정하고 좌로부터 제10-21-16연대순으로 배치하였다.
7월 29일에 북한군은 내성천을 도하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이미 국군은 한단계 내려가 충동이 없었다. 그러나 30일에 다시 전 정면에 공격을 개시하여 우측 제16연대의 조기붕괴로 그 좌측 제21연대, 제10연대 순으로 배후가 차단되는 위기에 놓이며 한땐 역습성공 등으로 사기가 충천되지만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위력에 밀리게 되고 낙동강-반변천-오십천 연변에 설정된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지시가 7월 31일 하달되었다.
8월 1일부터 수도사단 제1연대의 엄호하에 철수작전이 개시되지만 안동교와 안동철교를 폭파하는 싯점에 부대별 제대로 연락이 안되고 철수시기가 지연 되면서 북한군이 안동교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진입함에 따라 06시경 폭파할 다리가 선발대인 제10연대와 제21연대 일부가 통과한 07:30분경 폭파가 이루어 졌다.
이로인해 대 혼란에 직면한 제8사단 제21연대 1,2대대와 제16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는 무기를 강변에 유기하고 일부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고 일부는 북으로 북상하는등 아수라장속에 제16연대는 지휘체계가 마비되면서 장교 21명, 사병 814명이 전사 또는 실종 되었다.
"내성천 전투의 진실을 말하다(?)"
내성천 전투(7.24~26)당시 제8사단은 신천리 위족으로 제21연대를 나중에 사단에 예속된 제16연대를 신천리-강동리 구간, 강동-석탑동간은 제10연대를 배치하는데 전사 기록에는 제10연대는 내성천 넘어 금왕리의 334고지를 공격하여 확보하는 등 공세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간 강동리, 평온리 사람들은 많은 인원이 군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렇다. 북한군이 오기전에 내려와서는 강변에 진지를 구축도 하지않고 동네에서 반 강제로 먹을 것을 해 갔다줘야 했다. 바로 제16연대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병력의 70%가 의성에서 입대한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니 제대로 훈련도 못받았고 무기도 제대로 없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갑짝스레 군대가 도망가 버렸다. 사실 북한군이 오지도 않했는데 무슨 연유인지 국군이 옛고개 선으로 후퇴해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지만 강가에 지뢰를 매설하고 떠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역민들이 또 아침밥을 해서 찾아가니 아무도 없다.
"아니 그렇게 매 끼니마다 밥을 해서 날랐어요?"
"이장이 나서서 해야 한다고 하니 집집마다 있는 것을 각출해 한 장소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해서 가져가는데 한번은 군인들이 와서 직접 해가기도 했지요."
"그럼 연기도 나고 적에게 노출되는데 어떻게 밥을 했어요?"
"다 집집마다 있는 마른 나무를 사용해서 하고 산에서 마른가지를 해서 했지요."
"그런데 왜 피해를 엄청 보게 되었습니까?"
"글쎄 지뢰를 강변이 아닌 우리들 논과 밭같은 곳에다 심어놓아 농사지으려 가다가 동네사람이 엄청 죽었어요. 지금도 부상당해 치료도 못받고 불구자 되어 있는 어른이 있어요."
"총소리도 없이 북한군이 집앞에 왔어요."
우리는 낯이 뜨거웠다. 아무리 군기가 없다하더라도 총도 안쏘고 물러났다니 할 말이 없었다. 지뢰를 어떻게 묻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 죽은 군인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잠자고 일어나니 국군은 없고 북한군이 나타나 강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는 금왕리 334고지로 향했다. 제10연대에서 공격하여 강 넘어 있는데 탈취하여 1개 중대가 머물렀다고 전사기록이 되어 있다. 이미 용혈리 금광굴에 죽은 시체가 많았다는 제보로 왔다간 적이 있기에 쉽게 찾아갔다. 올라서니 산고지 전체가 개인호로 되어 있는데 탐지기를 가동해 보니 별로 소리가 나지않는다. 뺏고뺏기는 혈전을 했다는데 전투흔적이 부족하다. 평은리에서도 영지산에 군인들이 싸우지도 못하고 포위되어 전사했다하더니 아마도 제16연대의 이런 모습에 좌우측의 연대들은 덩달아 철수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내가 여기서 전투한 참전용사요."
옹천역 부근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찾았다. 대부분이 이곳에 사는 나이드신 어른들은 같은 이야기가 역 뒤에 열차가 들어오는 코너에 있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가장 많이 싸웠고 죽은 군인들이 여럿 있었다 한다.
"참전용사님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우리가 지금은 사용하지않는 역전 앞에서 지역 주민과 이야기를 하는데 참전용사 모자를 쓴 한 어르신이 할머니와 아들 되는 분과 여기를 찾았다. 알고 보니 당시에 제8사단 제16연대 참전용사였다. 싸웠던 곳을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아드님이 모시고 온 것이다.
"용사님, 우린 유해발굴단 입니다. 혹시 어디서 피해가 많았나요?"
"바로 저기 산에서 전차포를 맞아 1개분대는 죽었을 것이고 미군 비행기가 지원을 나와 적 탱크를 파괴하는 바람에 우리가 여기서 역습을 했어요."
"혹시 역습하여 점령한 곳을 아시겠어요?"
우린 졸지에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전투현장을 탐사하게 되었다. 바로 토골의 토곡지를 지나 291고지가지 걸었다. 등산화를 신고서 85세의 나이지만 잘 걸으셨다. 마침 대구 KBS방송국에서 현장 촬영이 나와 의미있는 취재지원도 되었다. 거으시던 용사님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 우리가 이 일대에서 전사한 군인을 가매장하고 떠났는데 집이 지어졌네?"
"네? 혹시 집자리인지 아니면 집주변인지 구분이 되시는지요?"
용사님의 기억을 되살려 폐가인 집주위를 두세번 돌았다. 큰 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집 뒤에 처마밑이 해당된다는 잠정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집을 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집은 왜 사람이 살다 아무도 없을까? 별별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입구에 있는 집에 사람을 만나 혹시나 저 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구전되지않느냐고 물어야 했다.
"용사님 몇명정도 묻혔나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분대병력은 넘는다고 봐야지요."
"저전리 둠벙에 버려진 유해"
나는 이곳 북후면의 웬만한 곳은 다 탐사를 하고 탐문을 했다. 도진리 어느집에 탐문을 갔다가 누구 맘대로 집안에 들어왔느냐며 ㅅ자 ㅈ자 ㄱ자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학교 선생을 하다 정년 퇴임한 아저씨인데 너무하다 싶었다. 청주 국사봉 아래서 멱살잡혀 고생하던 생각이 났다.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하며 죄송하다고 물러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은 있다.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쟁 당시에 그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천동 제비원 미륵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묵념을 올렸다.
나는 '14년에 5번도로 상 저전리에 가서 마을주민 간담회를 가졌다.
점심시간과 연계하여 이장님이 나서 모셔온 인원이 15명이나 되어 성대한 간담회가 되었다. 대부분 이야기가 국군은 길따라 주로 내려가고 그 뒤를 북한군이 따라가는데 죽은 군인이 길주변에 또는 논속이나 밭에 있어 대부분 7~8월 더위에 썩는 냄새에 질리어 북한군 통제로 마을에서 나가 다 치웠다고 한다.
"우물 속에 묻힌 유해는 어떻게 하나요?" 김종찬 어른이 물어왔다.
"지금도 우물인지요?"
"동네우물 이었는데 지금이야 우물이 아니고 길이되었어.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
전쟁 당시에 15살이었단다. 왕상골과 이곳 오산리, 이하리 일대는 보이는 것이 죽은 사람이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 동네 개들과 그 당시는 웬 여우가 그리 많은지 이것들이 물어뜯고 다녀 입이 벌게 가지고 어슬렁 거리니 미친개라 때려 죽여야했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이 매일 하는 일이 불려나가 죽은 군인 묻는 일이여"
동네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피난못가고 남아있는 사람은 죄다 불려나가 부역을 하는데 하는 일이 죽은 군인 묻는 일이 제일 많았다. 죽은 군인은 국군인지 적군이지 구별도 안된다고 한다. 이유는 대다수가 옷을 입고 있지않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 거시기 하지. 그런데 자꾸 하다보니 아무것도 아냐. 그저 보이는대로 괭이나 삽으로 끌어당기고 굴려서 개울이나 파인 구멍에 밀어넣고 몇삽 언지면 그만이지"
"그러면 곧 노출되어 보일텐데요?"
"그렇지. 그런데 얼마 있어 군인이 올라와 보이는 것은 다시 부역으로 가서 모아서 갔다주면 화장해 가져가요. 안보이는 곳은 누가 힘들여 다시파. 그냥 놓아두는거야."
"묻은 장소를 몰라서 수습이 안된 유해도 상당히 있을거 아니예요?"
"당시는 아차하면 붙들려가 반 병신이 되던지 감쪽같이 죽어버려요. 그러니 누가 안나서지."
"둠벙 속에 있는 유해는 찾을 수 있나요?" 한어른이 물어본다.
"물속이라면 조금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명확히 남아 있다면 농촌 일하는 시기를 고려하여 물을 빼내고 발굴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둠벙이 다 모래로 메워져 논농사 짓고 있어 모내기 전에 파면 돼요."
나는 바로 아저씨를 모시고 현장으로 갔다. 5번 도로 상에서 한 200m밖에 안들어 간다.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모래가 쌓인 곳이 그리크지않다. 아저씨는 원래 이 자리에 둠벙이 있었는데 언제인가 수해로 둑방이 터져 둠벙이 다 메워졌고 논이 되어버렷단다.
"이곳에 유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내가 8살인데 국군이 오산리 방향으로 산을 넘어 가고 있어 나와서 구경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군인이 몇이 모여 있어 다가서니 오지말라 큰소릴 해 바로 못가고 조금있다 군인이 사라져 가보니 군인이 둠벙가에 쭉 길게 누워 있는데 10명이 넘어요. 그래서 집에 와 아버지께 이야기 하니 가지말라고 했어요."
"그럼 어떻게 이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시는지요?"
"나중에 들으니 북한군이 오고 동네 사람들이 불려나가 둠벙에 밀어넣었다고 들었어요."
"이 논 주인이 누구신지 아세요?"
"우리 일가인데 아직 모내기 하려면 한달이 남았으니 그안에 빨리 파내면 괜찮아요."
"발굴된 유해중 가장 완벽한 완전유해, 뼈의 색깔이 황색으로 너무 좋았어요."
우린 바로 기동발굴을 개시했다. 모래를 한삽 한삽 거둬내니 먼저 전투화가 보았다. 모래 색깔이 황색이라 나오는 모습이 모두 황색이다. 드디어 뼈가 보인다.
"일동 차렷, 경례!"
"아이고 정말 나오네. 이런 벼락맞을 놈들. 이렇게 사람을 물속에 버리다니."
제보자분이 눈물을 흘리며 본인이 절을 좀 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약식제례를 준비하여 제보자 분을 술을 올리게 해드리고 발굴을 계속하였다. 전체적인 윤곽이 나오는데 수류탄도 나오고 M1탄창과 실탄도 나온다. 우리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검은 색의 유해라면 조금 마음이 우울해지는데 이렇게 황금색이 뚜렷한 유해가 손도 발도 발가락까지 완벽한 유해가 나온다.
하지만 그 당시에 물속에 던져 넣었다는 제보대로 엉켜서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한다. 드디어 발굴이 종료 되고 우리는 10구를 발굴하였다.
"북한군이 포로를 초등학교에 수용했다며 그 주변을 조사해 보세요". 손재덕 어른의 이야기다.
"왕살골 일대 산에는 다 해골이야. 마을 여기저기 온통 시체가 널렸어." 남규섭 어르신이 82세로 연장자인데 당시에 18살로 군대에 가야하는데 병걸려 못가고 나중에 전쟁 끝나고 갔다.
"전쟁 끝나고 피난갔다 와서 마을에서 소총을 수백정 걷어다 지서에 반납했어요." 남경섭 어른 이야기다.
"나는 국군 포로, 밥좀 주세요"
가곡리를 지나는데 마밭에서 일이 한창이다. 이곳 안동이 마를 집중으로 재배하는 모양이다. 차에서 내려 밭으로 들어가 찾아온 이야기를 했더니 얼시구 좋다고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아주머니들 틈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6.25전쟁때 죽은 군인을 찾는다 이거요?"
"그렇습니다."
"아니 저기 학교있지 그때도 있었는데 저기가 포로 수용소였어."
"국군입니까 북한군 입니까?"
"북한군 같으면 말도 안해. 국군이 100명도 넘게 붙잡혀 있는데 나는 1학년이야. 그러니 형들이니 찾아가서 놀았지."
"그렇다면 부상을 당해서 죽은 인원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그렇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북한군은 안보여. 복장도 민간인 복장도 있고 학생복을 입고 있기도 하고 상의를 벗고 있는 사람 펜티만 입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해요"
"얼마나 있었습니까?"
"한 한달은 있었다고 봐야지. 이 형들이 밥을 얻으러 집집마다 찾아다녀요. "배고파요 밥좀 주세요"라고 다니는데 그러다 비행기가 오면 얼른 숨어요"
지금까지 제보를 받으며 국군 포로이야기는 두군데다. 국민 방위군관련 이야기는 경남과 경북쪽에 가면 꽤나 된다. 국군 포로는 춘천에 횡성지구 전투에서 붙잡힌 제8사단 포로가 무려 몇천명 있었다는 내용인데 이 내용은 차후 기술하겠다.
참 마음이 아프고 눈물나는 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음이다. 제보자께서는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군인인 나는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였다. 얼마나 힘들고 죽음이 눈앞에 있으면 북한군이 없는데도 국군끼리 조를 짜서 함께 다니며 밥을 얻어 먹었을까. 분명 한명이라도 트릿하면 그 조를 싹쓸이로 죽여버렸을 것이다. 아예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게 무지막지한 모습으로 죽여버리니 저 한발만 건너 도망치면 살것 같은데 같은 동료를 생각하니 어찌하겠는가~!. 그러다 북한군이 밀려서 올랑오는 밤에 어디론가 걸어서 떠났다는 국군 포로 이야기~!
"제2의 한강교(안동교) 폭파사건"
전사책에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간에 옥신각신하다 명령을 전하는 시기가 늦어져 결국 '50. 8. 1일 06시경에 폭파하도록 통제 되고 있었다. 이미 7월 30일 폭약장치가 완료 되었다.
하지만 사단별 연대별 명령 접수시간이 상이하여 제8-16연대는 06시경에야 철수명령을 받았으니 그나마도 전투력이 약한 연대는 우왕좌왕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군이 다가서니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폭파조의 능숙한 솜씨로 스위치가 눌려지고 인도교도 철교도 날아갔다.
"'50. 6. 28일 한강교 폭파로 절대 병력이 한수이북에 남겨지다."
쓰라린 과거를 알고 있던 군인들은 물에 뛰어들고 북으로 도망치고 제16연대 병력이 강건너에 모인 숫자는 250명 미만이었다. 1,100여 명이던 연대 병력이 전사 137명, 부상 120명, 실종 594명 등 총 851명이 손실 되었다. 1개 연대에서 이러니 그 당시에 미처 도하를 완료하지 않은 제21연대 일부와 수도사단 제1연대 등의 피해를 합치면 천명이 넘을 것이다.
서로가 먼저 강을 건너니 엄호부대는 누가 하느니 옥신각신 하더니 06시경 폭파토록 되어 있는 명령을 06시에 받았으니 말이다. 잘못은 반복되어서는 안되는데 우린 그런 지혜가 부족하다. 그래서 결국 누가 다 죽었는가!
우린 안동교가 있는 태화동일대 전 제71사단은 안고 있던 산을 샅샅이 뒤졌다. 강변에 내려가 혹시나 모래밭에 있을 용사님을 찾았다. 강변일대 모든 경로당을 찾고 시장에 장이 서는 날에는 길거리에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전사한 국군을 보았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전사 137명에 실종자가 594명이라는데 본 사람이 없으니 이상하다.
서울 종로에 사는 권용화님이 전화가 왔다.
본인이 13세때 이하리에 살았으며 7월말 전투에 국군이 많이 죽었고 북한군이 물러간 다음에 국군이 와서 현지에서 화장해서 목함으로 유해를 가져갔다 한다.
"그럼 이제는 한구도 없다는 말씀인지요?'
"그게 그게 아니고 그 당시에 집이 방앗간을 했는데 국군 7명이 죽어 있어 한구덩이에 매장했으며 아버지가 지금 그곳에 살고 계시니 가서 만나보세요." 이렇게 해서 우린 그곳을 찾아 아버지를 만나고 해당지역을 찾아 굴토를 했는데 1구만을 발굴했다.
"어르신, 7명인데 어떻게 한 구 밖에 없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참 거시기한데 말하기가 곤란하네요. 그 당시에 문등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병에 좋다고~."
"안동역에서 기차가 폭발하여 제2국민병이 몇백명은 죽었다?"
어느 날은 서울 강서에 사시는 김형욱님이 엄청난 전화를 했다.
국군이 반격작전으로 올라가는 '50. 9월에 동원된 군인이 안동역에서 북한군 잔당들이 기차를 기습하여 120여 명이 전사, 모두를 안동교회 뒷편 비탈진 산에 다 묻었다는 제보를 받았다. 안동교회는 백년이 넘은 교회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우린 혹시라도 교회 장로분들 중에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까하여 몇 분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모르고 있고 한분이 교회 뒤에 과수원이 있는데 이곳이 시체를 묻은 곳이라 한다. 물론 안동역에서 기차사고로 죽은 국민방위군이 얼마나 묻혔는지는 모르지만 그 곳일대가 맞을거라 한다. 우린 과수원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서는데 한 집에 나이가 든 분이 계셔 물었다.
"어르신 혹시 저기 보이는 과수원이 언제쯤 만들어졌는지 아시는지요?"
"한 50년 되었지요. 저기가 야산이고 피난민촌이 학고방처럼 있었는데 모두 도쟈로 밀어 버리고 과수원이 만들어졌어요."
"그럼 도쟈로 땅을 밀때에 죽은 사람들 뼈가 나온다는 소문은 없었습니까?"
"그야 옛날에 공동묘지 비슷하게 있었으니 많이 나왔다고 봐야지요. 하지만 누가 관심을 갔었나요. 그냥 밀어버리고 어쩌다 유족이 있으면 파 갈 수도 있겠지요."
"나의 희망은 사라졌다. 아마 그 과수원 자리에 국군용사님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하리.오산리 일대를 수없이 탐사.탐문하였다."
이곳은 모두 200m 내외의 낮은 산들이다. 올라서는데 부담이 없다. 바로 옆에 중앙선이 달리고 있다. 그러니 군인들이 길을 잃고 헤매이며 철길따라 강남가는 것이다. 어떤 용사님은 북으로 올라서고 어떤 용사님은 남쪽으로 내려선다.
"'51. 5월 전투 예행연습"
'51. 5월 인제 현리지구 전투시 중공군과 북한군에 포위된 제3군단의 제3.9사단인원들이 흐르는 내린천을 따라 가면 남으로 가는줄 알고(내린천은 거꾸로 남에서 북으로 흘러 인제 합강리에서 소양강으로 흘러드는 강임) 떼지어 가다가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웃지못할 슬픈 이야기가 있는데 이미 이곳 안동에서 그런 사례가 있는 것이다.
요즘 어느 가수의 "안동역에서"란 노래가 대세인데 아마 그런 사연이 녹아들아 모두의 관심을 받는지도 모른다.
안동 대교는 파괴 되었지 어디로 가겠는가, 일부는 철로길을 따라 가다 아마도 포로가 될 것이고 바로 그 옆의 산에서는 용감한 군인들이 적에게 대항하여 싸우다 전사했을 것이다.
한 동네에 들어가 물으니 옥달봉(264m)에서 육박전이 벌어져 '헌병'도 이곳에서 죽어 있었다고 하며 우리는 산으로 안내했다.
"헌병이 어떻게 죽어 있는지 아셨어요?"
"헌병 철모를 쓰고 죽었는데 철모가 총구멍이 나고 죽은 군인의 두개골이 터져 있더라고."
"산이 온통 시체로 한 200명은 죽었지 , 우리 밭에도 2명이 묻혔소"
이하리에 사시는 김중동님이 연락이 왔다.
"피난 갔다 오니 마을 어른들이 공동묘지 아래쪽에 국군은 매장했다고 합니다."
오산리에 지역 분이 전화가 왔다.
"뒷산에 밤마다 살려달라고 꺼내 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김연희씨가 말하는데 발굴해 달라"
오산리에 김규화님이 제보를 했다.
"밭머리에 큰 참나무가 있는데 피난 후에 들어오니 시신이 너무 많아 나무 밑에 매장하였다 한다"
이하리에 김00님이 전화다.
"산이 온통 시체였다. 100~200명은 죽어있었다 한다."
이하리와 오산리는 5번도로와 중앙선 사이에 있는 인접하고 있는 동네다. 이곳에 가면 산이 아니라 구릉성 야산이다. 동네 모든사람들이 산에 가면 시체가 굴러다녔다 한다. 지역 특성산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집성촌으로 대다수가 친인척 간이다. 하지만 동네에 가서 들으면 원수지간이 많다.
"저 집은 부역자 집이요. 그 아버지는 북한군 따라 가버렸어요."
나는 오산리 황새골에서 양의골을 거쳐 이하리 옥달봉(264m), 중앙선 이하역 아래 솔골에서 230고지를 거쳐 이하리 머질이로 탐사를 이어갔다. 야산에는 포탄이 터진 흔적들이 있고 개인호는 그렇게 많치는 않다.
머질이에 들어서니 한분이 경운기를 운전하여 들어서고 있있다. 말을 못하는 분이다. 원래는 그렇치않했는데 귀가 먹으면서 말도 목하게 되었다 한다. 나는 글을 써서 보였다.
"이곳에 국군이 많이 죽어서 묻혀 있다는데 혹시 이시는 곳 없습니까?"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손짓으로 하시더니 발로 바로 옆에 작은 활엽수가 있는 곳을 올라서시며 장화신은 발로 쿵쿵 내리 찍으셨다. 나는 직감으로 이 곳에 뭐가 있다는 눈치로 받아들이고 탐지기를 들이댔다. 삑삑 소리가 크게 울린다. 이때 저만치 있는 집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나오셨다.
"뭐 하시는 분들이에요?"
큰소리로 억양이 화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남자분을 뭐라 하더니 빨리 오라는듯 경운기를 잡아 당겼다. 그런 아닌데 우리가 뭔가 이 어른을 이용하는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서 상황 설명을 드리고 한참을 설득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집도 전쟁의 피해자였다. 집이 다 타버리고 있는 먹을 것을 다 가져가 버려 굶다시피 한여름을 보내야 했다. 아저씨의 고막이 비행기 포탄 소리에 그만 나가버려 이렇게 되었단다.
"괜스레 말 한번 했다고 또 불려다니는 것은 아니지요?"
전쟁이 지나간 곳은 어디나 부역자 문제와 고자질 문제로 주민들간의 보이지않는 갈등이 무척이나 쌓여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니 어쩌겠냐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죽고사는 문제였으니 집안간에 쉽게 그 응어리가 가실리는 없다.
우리는 이 일대에서 어른이 장화신고 쿵쿵한 곳에서 7구의 유해를 포함하여 2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해 냈다.
"그럼 나머지 유해는 어디로 갔는가?"
많은 의문점이 남는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군이 전혀 유해처리를 안한 것이 아니고 낙동강선에서 반격으로 올라갈 때는 사단들이 후퇴할 때의 역순으로 38도선까지 주요 격전지를 거쳐서 지나갔다. 이때 유해처리를 일부 하게 되는데 화장을 하여 자가봉송 시키던가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는 가매장을 하고 갔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이 유해를 처리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않아 대대별, 또는 가까운 전우나 지휘관이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도 작고 하셨지만 ㅔ1사단 13연대의 황대형 일등상사나 수도사단의 이종록 중령의 이야기는 전쟁중 휴가를 나와서 동료나 지휘자의 유해를 파서 그 집에 전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황대형 선배는 낙동강 칠곡의 328고지에 와서 같은 동네 전우의 시신을 찾아놓고 다시 저쟁터로 갔다가 다음 휴가때에 그 유가족과 갔는데 유해가 없어졌다는 일화를 알려 주었다.
이종록 선배는 청주 오근장 전투에서 대대장이 전사하여 그 유해를 짚차에 실고 미원에 가매장했다가 그 이듬해에 휴가차 와서 발굴해서 유족에게 보냈다고 한다.
문제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북한군 통제하에 있을 때에 부역으로 참가한 인원들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모르쇠로 일관하다보니 같은 지역이라도 발굴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전사에 없는 임동 마령리에 국군이 묻혀 있다.?"
전사책에 보면 전투요도에 임동의 마평리에 그림이 없다. 안동 철수 작전간에 이곳으로 이동한 부대이동로가 없다. 다만 내성천 철수작전간에 7월 28일 중앙의 제16연대가 무너져 우측의 제21연대가 덩달아 예안까지 철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제1대대장 임익순 소령('53. 7. 14 금성천 이청동 전투에서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옴)이 보직해임 된다.
이후 7월 30일 축차 방어선에서 좌일선의 제10연대가 천등산-도촌동선을 유지한 반면 중앙의제21연대는 연곡동-319고지선을 유지하다 우측의 제16연대가 예안방향에서 북한군 1개연대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지리산(335M)-240고지선으로 물러나면서 축차 철수한다고 되어 있다.
대구 수성의 김호성의 제보다.
"마령리 야산 봉우리에 파편이 많고 유해가 매장된 것을 직접 보았다."
대구 동구 김창훈의 제보다.
"어릴적에 이곳에 살았는데 마령리에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적군과 국군이 대치중에 야간에 기습으로 국군 수명이 죽어 골짜기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께 들었다. 또한 아기산(591m)에도전투가 있었다."
우리는 일대를 정밀 탐사와 탐문을 실시했다. 그러나 전사에 없는 제보인데 실제 가서 보니 아기산같은 경우는 능선을 따라 개인호가 집중적이지는 않아도 실제 존재하고 있고 고천리나 갈전리 분들이 국군이 왔다가 내려갔다고 증언한다.
그런가 하면 마령리는 제보자의 말대로 해당 지역을 발굴 결과 2구의 유해를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