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0일.
어제는 아버지께서 소천하신지 3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도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향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 조카 한 명을 제외하고 가문의 권속들이 모두 모였다.
'해사'는 군대조직이라 생도가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까지 총 20명이 본가에서 뜻 깊은 시간을 함께 했다.
살갑고 고마운 만남이었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3년 전에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셨다.
그날을 기억하며 가문의 모든 멤버들이 현 장로님의 명복을 빌며 기도했다.
또한 아버지의 유훈을 다시 한번 각자의 가슴판에 새겼다.
서로가 걷는 길은 달라도 늘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또한 의미 있고 기쁘게 살자고 다짐했다.
한 명이 불참했지만 건강하게 성장한 3세들이 전부 모이니 큰 시골집이 오히려 비좁게 느껴졌다.
현재 큰 조카는 '과학기술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런데 둘째 조카도 '서울대' 석,박사 통합 과정에 지원했단다.
자랑스럽고 듬직했다.
군대 전역 후에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조카도, 여성 ROTC를 위해 뜨겁게 도전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 밑으로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등 다양한 3세들이 있었다.
요놈들이 다 모이니 왁자지껄하고 활력이 넘쳤다.
참신한 MZ 세대들의 얘기를 듣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간만에 가문의 식솔들이 모여 집안이 시끌벅적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추도예배를 드릴 시간이 되자 목사님과 교인들이 승합차를 타고 오셨다.
동네 어르신들도 많이 오셨다.
그렇게 40여 명 이상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은혜가 넘치는 추도식이었다.
고향 집은 큰 편인데 '추도식'에 참석한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그날따라 무척 작고 좁은 듯했다.
모두다 한마음, 한뜻으로 소천하신 아버지를 추억하며 기렸다.
그러면서 아버지(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더 열정적이고 더 헌신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다.
각자의 인생 주춧돌을 튼실하게 쌓는 건 전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었다.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고백했다.
기도, 배려, 헌신의 자세로 나의 인생을 야무지게 경작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추도예배가 있던 날은 모처럼 화창한 날이었다.
햇살은 강렬했고 세상은 더없이 푸르렀다.
또한 아름답고 복된 주일날이었다.
넓은 들판에선 다양한 곡식과 과일들이 따가운 햇볕을 받아가며 결실을 향해 잰걸음을 하고 있었다.
고향의 어르신들은, 금년 봄과 여름에 유달리 잦았던 비로 인해 소출이 줄어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고 계셨다.
저마다 시름이 깊은 표정들이었다.
나는 농사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8월 하순의 강렬한 태양과 맑은 바람은 하늘이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임에 틀림 없었다.
그동안 잦은 비와 바람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역경 속에서도 감사와 풍요가 튼실하게 여물어 가고 있음을 보았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상경하는 길.
자동차 안에서 나는 가족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 그분의 생애, 그분의 가르침과 유훈에 대한 다양한 얘깃거리들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그런 의미에서 오가는 길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머지않아 예쁜 코스모스들이 하늘거리며 지금 우리가 달리는 이 시골길 양켠에 가득 찰 터였다.
앞으로 10여 일만 더 지나면 9월이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절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긴 했다.
추석 전후의 고즈넉한 고향 풍광들이 마치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파노라마처럼, 벌써부터 내 눈 앞에 선연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아마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살가움 때문일 게다.
고향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과 감동의 옹달샘이니까 말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함께 했던 40여 명의 고마운 분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주님의 은총이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시길.
2011년 08월 21일.
추도식에 다녀와서,
감사의 마음으로 기록 한 줄 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