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호박
권정숙
“남편도 없이 혼자 병실에 있어. 참 무심한 남편이네.”
남편이 내게 무의식으로 했던 말이다. 그 말끝에 나는 버럭
화를 냈다. 왜 화를 내는지 황당해 하던 남편은 곧 눈치를
챘는지 말문을 닫아 버리고는.TV에만 열중한다.
4형제 중에 조카딸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던
남편이 입버릇처럼 원했던 딸 둘을 순산하고 7년만에 세 번째
아이를 가졌다. 처음에는 나이를 생각 않고 정신이 나갔다는
등 셋을 어떻게 키울꺼냐는 등 구박이 심했다.
간접적이었지만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나서부터 원래 작은
나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자 그때서야 배를 만져 보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 딸은 태동을 얌전하게 했는데 이 녀석은
엄마 뱃속에서 축구를 하는지 위아래에서 좌우로 인정도 없이
발로 차고는 하였고 그럴 때마다 “짜아식 축구 선수가
되려고 미리 연습하는데”하며 흐뭇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예정일이 지나도 녀석은 앞으로 고달플 바깥 세상이
싫었는지 나올 생각을 안했고 하는 수 없이 정말 아들인지
궁금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촉진제를 맞고서라도 녀석을 빨리
불러내야 했다. 그날은 14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라서 의미가
있는 날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병원에다 데려다 주고는 곧바로 현장으로
향했던 남편이 그날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이 한참
바빴을텐데도 나를 지켜 준다는 것이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내게는 처음 느껴 보는
크나큰 기쁨이었다. 산통을 겪는 아내들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같이 아파하는 모습들이 몹시도 부러웠었다.
엄마를 찾고 남편 욕을 하며 두번 다시 아이를 갖지 않을
꺼라면서 울부짖는 소리를 그날 남편은 처음 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아내의 산통 소리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고통 소리를 들으면 몸달아 할까 봐 기저귀를
입에 물고 참아 내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지금까지도
TV에서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면 저렇게 요란스럽냐고
코웃음을 치고는 한다.
드디어 녀석이 밖에 나오려고 하였고 아주 급했다. 의사는
다른 아기를 받고 있었고 나는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급했기에 남편이 꼭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일 보러 간
것이다. 세 번째만큼은 내 옆에 있다가 “아들입니다”라는
말을 맨 먼저 들려주고 싶었는데, 그때의 내 마음이 얼마나
허망했던지 남편은 그때의 내 심정을 알기나 했을까?
결국 큰아이들과 같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아이를
낳았고 한참 후에 들어온 남편의 첫 마디는 “짜아식 나를 꼭
닮았네”였다 처음 아들을 안아 보면서 내게는 수고나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는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억만금을 준다 해도 얻지 못할 선물을
남편에게 안겨 준 것 같아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순산을 한 내게 의사는
국을 먹고 바로 퇴원해도 좋다고 했지만. 있으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날은 어두워지고 집에는 어린
딸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
아이를 낳은 지 두시간 여만에 남편은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고는 다시 일터로 나갔다, 누워 있을 여유도 없이 곧바로
집안 일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며칠을 내몸을 혹사시키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편은 돈도 안되는 사업에 몸과
마음은 밤낮 없이 바쁘고 집에 산모가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 같았다.
매일 술에 취해서 별빛이 있을 때만 집에 왕래를 하니 아내
얼굴인들 제대로 본적이 있었을까. 따뜻한 이불 속에서
온몸을 감싸고 바람 쐬이면 안되고 손발에 물대면 안되는,
하루 네 다섯끼 미역국에 고실실한 새로 지은 밥을
받아먹는 산후 조리는 내 꿈속에나 있을 뿐이었다.
밤낮으로 눈물나는 서러운 와중에 내몸은 푸욱 삶아 놓은
호박으로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을 남편은 알지 못했다. 아이를
낳은 후유증에 하혈을 하며 걸음을 걷기가 힘들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어도, 그랬지만 집안 일과 세 아이들 돌보는
것은 모두 나만의 몫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타지의
생활이 이렇게 서러운 것을 나만큼 느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어느 날에는 내밥 찾아 먹기조차 이 들었기에 남편에게
오늘은 일찍 좀 들어오라고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친구
사무실 개업하는데 손님을 받아야 한다면서 호박처럼 부풀은
아내는 안중에도 없는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날도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왔고 참다못해 울분을 토하는 나에게
해준 말은 미안하다 라는 말 뿐, 내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모처럼 남편에게 받아 보는 아침상의 미역국에
서러움의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지는 것을 남편이 알았을까?
아이 낳은지 며칠 후, 멀리서 손님이 내려왔다. 집을 모르는
손님을 남편이 직접 모시고 오느라 모처럼 대낮에 집에
들렀다. 손님은 나를 바라보고는 몹시도 안타까운 듯이 혀를
끌끌 찼다. 퉁퉁부은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며 첫마디가 노란호박
같다면서 울먹였는데 손님의 어깨 너머로 남편의 눈가에
이슬이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손님은 안타까워하시며 돌아가서는 며칠 후 붓기 빠지는
한약을 보내 주었다. 아이 낳았다고 한약 먹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저녁 예전보다 조금 일찍 들어온 남편은 역시 술이
취했고 나를 끌어안고는 미안하다 면목이 없다 당신 몸이 그
정도였는지 정말 몰랐다며, 그날 우리는 양가에 안 계신
부모님을 원망도 하면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참 많이도
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 상황을 어떻게 견뎌
냈는지 신기하다. 뒤늦게 낳은 녀석이 아들이었기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렇게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 이젠 아이들이 다 자랐다고
생각되는 요즘에는 내가 속을 썩인다고 남편은 불만이 많다.
집밖을 모르던 내가 공부한다고, 모임도 친구도 많아지고
외출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밤새도록 잠 안자고
기다렸던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 살림밖에 몰랐던 예전의
아내를 다시 그리워했으리라. 하지만 나도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고 싶다고 반항을 한다. 친구도 만나서
수다도 떨고 여행도 다니고 공부도 하면서 푸른 창공을
날수는 없어도 날갯짓은 하고 싶다고 남편의 이해를 바라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내 욕심인 것 같다.
계획성 없는 생활이 싫어서 월급봉투 받으며 살게 해
달라고 밤낮없이 졸라대는 나에게 남편은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벌써 15년이 되었지만 그때가 언제일지
기대를 할 수가 없다.
늣동이를 낳은 후 힘든 일을 못하는 약골이 되었고, 잡티
하나 없어 화장을 안해도 깨끗하던 얼굴에 기미가 생기면서
심통이 날 때면 아들 낳고 몸조리 못한 것으로 남편에게
화풀이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 피곤해도 거동이
힘들 정도로 아픈 내 팔 다리를 풀어 주면서 이젠 그때 일좀
잊고 지내라며 어떠한 투정이든 모두 받아 주는 가슴 넓은
남편이 되었다. 내게 무심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는 것
잘 알면서도 남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지만 식구 하나
늘어나니 기쁨과 한숨이 교차되더라는 말을 아내인 내가
모를리가 없으련만,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럽고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는 남편의 말을 빨리 이해 했더라면 그까짓것 쯤은
서러움이 아니었을터인데 라는 생각에 미안함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는다.
1998
첫댓글 남편에게
화풀이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 피곤해도 거동이
힘들 정도로 아픈 내 팔 다리를 풀어 주면서 이젠 그때 일좀
잊고 지내라며 어떠한 투정이든 모두 받아 주는 가슴 넓은
남편이 되었다. 내게 무심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는 것
잘 알면서도 남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지만 식구 하나
늘어나니 기쁨과 한숨이 교차되더라는 말을 아내인 내가
모를리가 없으련만,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럽고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는 남편의 말을 빨리 이해 했더라면 그까짓것 쯤은
서러움이 아니었을터인데 라는 생각에 미안함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는다.
심통이 날 때면 아들 낳고 몸조리 못한 것으로 남편에게 화풀이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 피곤해도 거동이 힘들 정도로 아픈 내 팔 다리를 풀어 주면서 이젠 그때 일 좀 잊고 지내라며 어떠한 투정이든 모두 받아 주는 가슴 넓은 남편이 되었다. 내게 무심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는 것 잘 알면서도 남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지만 식구 하나 늘어나니 기쁨과 한숨이 교차되더라는 말을 아내인 내가 모를리가 없으련만,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럽고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는 남편의 말을 빨리 이해 했더라면 그까짓 것 쯤은 서러움이 아니었을터인데 라는 생각에 미안함이 마음 한 켠에 자리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