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생각 작사, 최순애
일제강점기인 1925년, 어린이 잡지 <어린이>에는 열두 살 소녀 `최순애` 시가 실렸습니다. 서울 간 오빠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오빠 생각>이 입선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원에 살고 있던 최순애가 지은 시 오빠 생각은 멀리 경상남도에 사는 열다섯 살 소년 `이원수` 가슴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이원수와 최순애는 러브스토리에 성공하여 혼례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10연간 편지로 맺어진 오빠 생각 노래는 이런 사연과 함께 국민동요로 남았습니다. 오빠 생각 가사는 떠나간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는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동시인 것입니다.
최순애 시 오빠 생각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귓들 귓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어린이》(1925.11) -
오빠 생각 가사, 동요 탄생
어린이라는 잡지는 어린이날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이 만든 잡지입니다. 열두 살 소녀 최순애는 이 잡지 열렬한 독자였습니다. 여러 편 시를 투고하고 퀴즈응모에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최순애(1914~1998)가 1925년 잡지 어린이에서 입상한 뒤, 1926년에는 이원수(1911~1981)가 <고향의 봄>으로 입상하였습니다. 얼마 뒤 `홍난파(1898.3.19.~1941.8.30.)`가 고향의 봄을 노래로 만들었고, 오빠 생각은 5년 뒤에 박태준(1900~1986)이 작곡을 하게 됩니다.
최순애가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에 이렇게 애착을 보인 것은 가정 내력도 한몫을 했습니다. 아버지 `최경우`는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사업을 숭배하듯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아홉 살 터울 오빠 `최영주`도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사업에서 활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방정환 무덤을 세운 사람이 최영주이며, 아버지도 방정환 곁에 산소를 만들었고, 자신도 방정환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고 떠났습니다.
오빠 생각 노래 가사는 최순애와 최영주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오빠 최영주는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관동대지진`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자 이를 피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일본 순사들은 오빠를 감시하고 따라다녔습니다. 오빠는 한 달에 한 번 집을 방문했는데, 올 때마다 선물을 사 오곤 했었습니다. 일본 경찰을 피해 서울로 떠난 오빠는 다음에 올 때 또 선물 사 오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 뒤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건강을 망쳐서 요절했습니다.
한편 오빠 생각 가사가 된 이 동시를 읽은 어린 이원수는 감동하여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순애와 이원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빠 생각 가사를 쓴 뒤 최순애와 이원수에게 직접 친분이 생긴 것은 동요 시인인 `윤석중`이 만든 `굴렁쇠`라는 회람잡지 덕분입니다. 회람잡지란, 윤석중이 표지를 만든 뒤 다른 회원에게 편지로 보내면 거기에 글을 쓴 뒤 다시 다른 회원에게 편지로 보내면서 잡지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편지와 문학 글로 10년 인연을 맺어 오던 최순애와 이원수는 드디어 첫 만남을 약속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원수가 민족의식에 눈을 뜨며 참가한 반일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되고 만 것입니다.
오빠를 그리워하던 오빠 생각 노래는 이번에는 님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되었고, 최순애는 이원수를 그리워하며 오빠 생각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징역 10개월을 지내고 출소한 뒤 이원수와 최순애는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과수원집 유복한 최순애에 비해서 너무 가난한 이원수 집안 형편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어찌어찌하여 최순애 집에서 혼례식(1936.6)을 한 뒤 최순애는 이원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원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살림살이도 거의 없는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이원수는 돈을 거의 못 벌어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슬하에 3남 3녀가 있습니다.
비록 이원수가1940년대부터 갑자기 친일자로 변절했고, 황국신민으로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자는 글을 쓰는 등 행위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고향의 봄>, <겨울나무>, <엄마 없는 날>, <꼬마 옥이> 등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문학에서는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맞는 일입니다.
오빠 생각 동요로 유명해진 최순애는 문학 활동을 접고 2남 2녀를 키우는 데 주력했고, 책을 내려고 준비했던 시들이 6.25 전쟁으로 모두 불타면서
그 뒤 작품은 크게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오빠 생각 가사가 국민에게 주었던 서정성은 단순한 동요가 아니라 서글프면서도 한 서린 감성이었습니다. 작곡가 박태준은 잡지 어린이를 보던 중 이 시를 발견하고 바로 오빠 생각 노래를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거기에는 당시 문예반 교사였던 박태준이 정식 작곡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던 때에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최순애에게 감동하여 만들었다는 사연도 있습니다. 작곡가 박태준은 특히 마지막 부분을 작곡할 때 흐르는 눈물이 오선지를 흥건히 적셨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이원수는 일제 말기 전시체제에서 내선일체에 관한 글 5편을 기고한 것 때문에 친일파로 몰려 비판을 받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관련하여 2011년 이원수 선생 유족들이 이원수 친일행적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창원 용지공원과 마산 산호공원에 이원수 시비가 세워졌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에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고향의 봄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1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 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동요) 고향의 봄과 오빠생각 이원수& 최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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