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회고 섞인 목소리가 말하는 통기타와 맥주, 청바지로 대변되는 1970년대의 문화를 얘기할 때, 음악적인 면에서는 포크가 압도적으로 젊은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포크는 지금의 힙합처럼 기성 세대의 반감을 사며 울타리 쳐진 문화였고 우리 대중 음악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소금의 역할을 했다.
양희은 바로 이 시대를 김민기의 페르소나로, 포크 음악의 프런트우먼으로 맹렬히 달려온 뛰어난 보컬의 소유자이다. 그녀의 보컬 속에 깃든 청아함과 외로움은 한 어두운 시대의 표상을 휘저으며 통기타 살롱 시대의 10여 년을 달려왔고 또 그 만큼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그녀는 재수하던 시절 친구와 같이 들른 <YMCA 청개구리>라는 찻집에서 송창식, 서유석, 김도향, 윤형주, 뜨와에무와, 김민기, 4월과 5월, 라나에로스포 등을 만나며 통기타 가수들과 인연을 맺는다. 대학 입학 후에 아르바이트를 찾던 그녀는 송창식의 소개로 이종환이 운영하던 금수강산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최고로 잘 나가던 업소인 오비스캐빈(OB''s Cabin)의 오디션에 합격해 이후 10여 년간 이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며 디스코의 득세로 업소가 불황을 맞을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그녀는 이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민기의 ‘아침 이슬’을 듣고 반해 자신의 데뷔 앨범에 이 곡을 넣었다. 그리고 이 후 김민기의 모든 언어와 멜로디는 철저히 양희은화 되어 대중에게 알려진다. ‘아침이슬’은 1973년 정부가 선정한 건전가요에 뽑혔다가 그 다음해에 금지 곡의 목록에 오르는 시대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김민기의 곡만을 부르며 ‘아침이슬’, ‘금관의 예수’, ‘상록수’, ‘작은 연못’, ‘서울로 가는 길’,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을 전국민의 가슴속에 심어 놓은 양희은은 1975년 국가에서 시상하는 <대한민국 가수상>을 수상하기도하지만 김민기가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활동이 저지되자 훗날 따로또같이의 리더인 이주원과 음악 작업을 한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사들 속에 내포된 심오한 소외의 단상이 메아리치고 있는 이 노래들은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그리운 내님네는’, ‘한 사람’ 등이었다.
1980년 방송통폐합 이후 나라에 환멸을 느낀 그녀는 미국으로 잠시 떠난다. 그리고 1984년에는 ‘하얀 목련’으로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며 주류의 물줄기를 타고 1985년에는 차세대 포크 음악의 신성 하덕규와 같이 작업한 ‘한계령’으로 길고 긴 사랑을 받는다. 하덕규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자주 가던 설악산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노래는 당시에는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으나 1990년대에 넘어오면서 중년층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오래도록 국내를 떠나 있던 그녀는 그룹 어떤날의 기타리스트이며 클래식 수업을 받고 있던 이병우의 도움을 받아 1991년 새 앨범을 발표한다. 이병우식 멜로디와 기타가 한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는 이 앨범에서는 ‘그 해 겨울’과 ‘가을 아침’이 라디오를 타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1980년대 하반기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풀린 금지곡들 때문에 다시 조명 받았다. 앨범 <양희은이 처음 부른 노래들>은 그녀의 명성을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는 세대들에게 인기 품목이었고, 김민기가 만들고 그녀가 부른 노래들은 갑자기 신세대 콜렉터들의 수집 목록이 되었다. 1970년대 김민기 데뷔 앨범의 희귀성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양희은이 부른 히트곡들은 물론이고 ‘백구’, ‘불꽃송이’, ‘그 사이’ 등도 재조명 받았다.
지금도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는 양희은은 라디오의 DJ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95년에는 한국방송 PD 연합회에서 주는 최고의 진행자상을 받았고 김승현과 진행하는 <여성시대>는 아줌마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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