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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 코너 스크랩 수필 혼불 사랑 ‘등나무집’
황종원(중앙대) 추천 0 조회 82 10.10.17 12: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남역 7번 출구에서 한남대교 쪽 300미터 커피빈 옆에 등나무 집.  

 

친구 따라 강남에 왔다가 강남역부근 등나무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한동안 친구 부부가 경영하던 집이었다.

그 집 박 사장은 만날 적 마다 내게 사주명리를 배우라고 다구치며

“내가 하고 싶은데 마누라가 반대를 해서... 자기는 일이 있으면 점집에 찾아가면서...”

내 생전 점집에 한 번도 안 가던 내가 그 덕에 사주명리학 공부를 하고 몇 년 사주 상담을 하게 만든 인생이 길라잡이였다.

등나무 집은 승승장구를 했다. 가게를 넓혀도 손님이 줄지 않았다. 입이 굳은 부인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재미있어요.”

집을 더 사고 땅도 사고 운이 열렸다.

세상일에는 양이 가장 심할 때 음이 시작한다. 그 반대 역시.

땅 사서 집 짓고 재미 못 보고도 큰 손해는 없이 ‘똔똔’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박사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애 엄마가 몹시 힘들어요. 황형하고 통화를 하고 싶어해서요. ”

“ 누구 아빠. 제 운세를 봐주세요. 지금 죽고 싶을 지경예요. 요즘 신문 보셨죠., 강남에 몇 백억 사기 사건에 저도 걸려있어요. 제 돈 다 잃고 깡통 차는 것은 참을만 해요. 남의 돈까지 끌어다가 사기꾼 입에 다 털었어요. 언제 풀릴까요?”

이제 겨울이 시작하였는데 봄이 언제 오냐고 묻는다.

이 때의 상황은 나도 아는 사람에게 집 담보를 해 투자를 해서 거덜난 판이었다.

대책이 무책이다.

죽겠다고 했으나 죽기를 마음대로 하나.

벙법은 36계 줄행랑뿐.

전화 통화 하고서 몇 달이 지났다.

연락이 안 된다.

주위 사람 아무도 부부가 어디로 간 지 모른다.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빚잔치를 못하고 도망치듯 갔다고 한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부부의 노후가 이렇게 36계줄행랑이 되어

난병유랑 難病流浪이 되었구나.

그들에게 받은 사랑이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정 주고 떠난 사람이 물기어린 눈에 떠오른다.

 

 

등나무 집의 최명희 지정석

 

 

                                                          한길사 판 혼불은 절판되었다.

 

 

                                                            매안 출판서 혼불이 나왔다.

                                                                      

 

서울 강남 지하철역 7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젊은 물결로 얼이 빠질 지경입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머리털이 바글바글하고, 아가씨의 옷차림이 너무 어지롭고, 심한 노출에 남정네들은 눈 갈 데를 모릅니다.

똑바로 보면 주책없으며, 곁눈으로 갔다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접촉 사고가 날 지경이지요.

한남대교 방향으로 극장으로 동아 극장이 이름부터 구식이었고 정답기까지 했건만. 한동안 걸음 뜸했다고 세리의 강재규 감독에 큰돈 벌어 사서는 지금 개봉 전야에 있으니 이름 하여, 낯설기도 낯설지. ZOOOOZ라니. 발음을 어떻게 한대요.

즈으으으즈?

가기서 오십 미터쯤 가면 성업공사 건물이 나옵니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 <통 삼겹살. 등나무 집 강남점> 이라는 고기 팔고 술 팔고 밥 파는 집이 있습니다.

본점은 압구정동에 있고, 그곳은 가게 주인이 손님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라 하면 가곡을 불러준다거나 생일 축하 노래를 성악 하듯이 불러주고 텔레비전에도 가끔 나오는 명소가 되었답니다.

손님으로는 탤런트들도 바글대고, 유명 운동선수가 오면은 밥값은 안 받고 오히려 경기하느라고 수고 많았다며 주인이 봉투에다가 몇만 원씩 넣어주는 괴짜 집인지, 상술이 대단한 집입니다.

사장과 처음 만났을 때는 나를 괴짜로 알더니 나보다 더 괴짜고, 요즘에는 돈 챙기기 바쁜지 뵙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등나무 집을 찾으려면 한국 야후에서 등나무라 하던지. 엠파스에서 등나무 집이라 해도 홈페이지 나오는 가게입니다.

서울에 몇 군데 있는 등나무 집 중에서 잘 나가는 등나무 집중에 하나가 여기 강남점인데, 오늘은 이 집에 내가 특별한 일을 하러 가는 중입니다.

올해 초에 개업할 때 걱정이 많았다지만, 요즘은 저녁 7-8시 경이면 손님을 다 받을 수가 없어서 옆에 있는 일식당으로 가시라고 여유를 부릴 정도로 손님이 바글대는 문전성시의 음식점이 되었습니다.

이 집에 왜 가는가 ?

작가 최 명희를 여기 모시려고 가는 중이지요.

등나무집사장은 전 직장 친구의 부인이고, 직장친구는 시골 동네방네 수세식 화장실과 정화조를 전국에 200군데나 만들었으며 그 중 유명한 곳은 관악산의 연주암의 화장실도 만든 현대환경의 박 사장입니다.

내가 나가는 회사에 환경 관계 일이 있어서 엊그제 만났었지요.

왕복 4시간을 회사를 오고 가면서 나는 회사일 보다 작가 최명희의 요즘 일을 그에게 말하기 바빴었고요.

"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혼불을 사랑합네 하는 사람들이 정작 그 사람의 무덤에 묘비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니. 이런 경우가 세상천지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누군가 시끄럽게 굴어야 성사가 될는지. 내가 도맡기로 했습니다. 청와대에는 김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에 혼불을 보았다니 무슨 기회가 있을 때 최 명희를 언급해달라 이메일을 보내고. 서울시장 고건 씨에게는 혼불을 사랑하는 모임의 한 사람이니 혼불 작가 최명희가 강남구에 살았으니, 살았던 곳마다 '여기는 최 명희가 혼불 1권을 썼던 곳이다.' 하던지, 또는 다른 곳에서는 '여기는 혼불 제2권부터 10권까지 썼던 곳이다.' 하면 얼마나 멋스럽겠소. 그리고 박형, 박형만 해도 가게가 강남 아니요. 혼불을 썼던 도곡동 주공 아파트나 성보아파트와 가까우니 가게 한쪽 벽에다 최 명희와 관계되는 기사를 쫙 붙여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분위기를 좀 바꿔주는 거요. 혹시 알아요. 고기집하고 최명희하고 분위기가 안 맞더라도 그곳에 오는 사람 중에 한 가닥 하는 친구들이 있을 때 최명희 묘비 세워주는 여론을 일으킬 사람들이 와서 뭔가가 결실이 맺어질 줄."

길게 사설을 풀었었지요.

나는 떠들고 그는 잊었으리 하던 참에 어제 전화가 박 사장에게서 왔습니다.

" 황형, 우리 가게에 3미터가량 백 판을 만들었어요. 최명희와 관련된 자료를 준비해서 와줘요. 뭔가를 보여줄 수 있게."

하니 어찌 이리 반가운가.

박 사장의 사무실은 작가 최명희가 살다 돌아간 성보 아파트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아침 일찍 내가 다니는 회사 일을 젖혀 놓고 그의 사무실에 가서 내가 가진 자료를 복사 했습니다.

박 사장과 함께 그의 부인이 하는 등나무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가게에 들어서니 한복판 벽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놓았군요.

나는 박 사장 부인에게

" 뭔가 해보자고요. 파리의 음식점 어딘가에 가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왔다가 앉았던 장소라고 적혀 있답디다. 비록 최명희라는 사람이 우리 집에 안 왔어도 해도 우리가 대접을 해줄 만한 사람이니 뭔가 특별한 것을 해봅시다. 손님이 넘치는 것은 잘 아는데. 이럴 때 뭔가 우리 식당의 테마를 만들어 보자고요. 내가 혼불 작가 최명희에 대한 기록을 도배하다시피 할 테니. 들어줄 게 있습니다. 최명희 지정석이라 하는 테이블을 하나 만들어 줘요. 그리고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먹은 음식의 10%를 깎아줘요. 혼불의 독자거나 아니거나. 그 자리에 앉으면 혼불 독자가 되니까."

" 손님이 넘치는 데… . 저녁 9시 지나서 하면 어떨까 ?"

등나무 집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집입니다.

" 안 돼요. 손님이 많이 올 때 깎아줘요. 대신 날짜는 오래 끌 수 없으니 9월 중순까지. 여기 홈페이지에 올려줘요. "

" 나는 '혼불'을 모르는데. 사람들이 물어보면 뭐라 한대요?"

" '혼불'에 미친 친구가 떼 써서 해놓았다고 해요. 그리고 내 글이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으니 그걸 보라고 해요. "

박 사장은 곁에서 듣다가

" 자료를 붙이는 작업이 끝나면 '혼불'을 사다가 게시판 아래에 쭉 걸어 놓을 참입니다. "

실제로 우리가 작가 최명희 자료를 붙이는 작업 후에 강남역 지하에 있는 동화 서적에 가서 열권을 사서 책 한 구석에 구멍을 뚫고 못에 걸어 놓으니 최명희 지정석에 앉는 이들은 무심코라도 책을 펼쳐볼 테지요.

벽에는 한길사에서 펴낸 리브로에서 복사한 '혼불은 나의 온 존재를 요구했습니다. ' 라는 제목의 작가 최 명희가 소설 혼불과 그 인고의 작업과정을 쓴 첫 쪽을 붙이고,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에 동대, 연대, 숙대에서 상을 받았던 작품과 보성여고 교사 시절에 중앙일보의 신춘문예 당선 시절의 밝은 모습과 동아일보에서 혼불이 당선될 때의 활짝 핀 모습이며 일생의 연역과 돌아간 뒤의 신문 기사며, 혼불에 대한 애정을 평론으로 대신한 장일구씨의 신춘평론 당선작으로 벽을 채웠습니다.

돌로 가득하고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에 찾아오지 않는 순례자를 기다릴 필요가 무엇인가요.

그대는 매일 수백 명의 시선 속에 몽블랑으로 혼불을 쓰고, 수백의 입은 그대를 말하리니. 그대의 조용한 성격에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 망동을 너무 책하지 말아 주시오.

어느 날 등나무 집 집마다 하나씩 하나씩 혼불을 생각하는 추억의 벽을 만들어 갈 참이며, 그러다 보면 소문이 바람을 타고 그대의 무덤에 묘비가 서리니. 오고 가는 길손은 술잔을 들며 말하리니, "나는 최 명희의 지정석에서 그녀를 만났노라."

그대는 결코 박제되어서는 아니 될 따뜻한 체온과 피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000/8/12)

 

 

전직 직장 동료가 마련해준 출판기념회

 

 

                                            절판되었다. 구글도서에서 책 이름을 치면 100 쪽까지 볼 수 있다.

 

여기에 어느 음식점 이름이 실명이 나오고 내 책의 제목이 광고하듯 나온다. 거친 뉴스와 상처를 주는 기사에 신물 나는 세상에 기쁨을 주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있었던 일에 관계되는 이들을 밝히는 일도 기쁨이다.

서울 등나무 집 강남점은 극동건설에서 근무할 때 동료였던 박재하 사장이 운영하고 있다. 며칠 전에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박 사장의 부인이 "책을 내셨으면 출판 기념회를 하셨나요?" 하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내 책이 막 나오던 날에 책을 펴낸 흥부네 박의 박영발 사장과 인현동 스카라 극장 뒤의 복집에서 복 찌개를 함께 먹었다. 시간이 있으면 밥을 볶아 먹고 싶었으나 박 사장은 전화로 책 주문을 받고 시간에 쫓겨서 건성으로 급하게 점심을 때웠다. 두 사람만의 쓸쓸한 점심이 출판 기념회라면 출판기념회였다.

"출판기념회라는 것이 뭔가요. 책을 하나 만들었으니 충분하지요" 하니 부인은 "우리 집에서 하세요."한다. 대개 음식점을 하는 사람들이 손님 끄는 방법으로 무슨 행사가 있으면 여기서 모이세요 하는 말은 친한 사이에 있는 일이었다. 내 형편으로서는 사람을 모으고 밥값 치르고 할 여유가 없었다.

박 사장은 자기 아내의 말에 이어 "황형, 우리 집에서 해요. 우리가 다 할게. 황형은 전혀 부담 갖지 말고. 우리 함께 근무했던 극동 오비들을 다 부르자고요."

"말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

"아니. 황형. 말만 들을 게 아녜요. 농담이 절대 아닙니다. 꼭 요."

"꼭, 그렇게 하지요" 하고 대답하면서 나는 그 마음만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헤어져서는 나는 며칠을 보냈다.

그랬더니 여의도에서 빌딩관리를 하는 회사의 이사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형님, 이야기 들으셨지요. 출판 기념회를 한다는 말. 날짜가 정해졌으니 꼭 나오세요." 하니 등나무 집 박 사장이 이 사장에게 말을 전해서 이 사장이 연락책을 맡아 극동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에게 파발을 돌린 모양이었다.

극동 OB는 매년 연말에 모인다. 극동건설에 있을 때부터 이 사장이 주관해서 모였다. 그 식구들을 이번에 내 일로 모이자 했던 것이다.

나는 내 책을 만들어준 흥부네 박의 박 영발 사장에게 연락했다. 흥부네 박의 박사장은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

긴장하는 듯해서 꼭 나와 달라고 당부했다.

등나무집 입구에는 '어머니. 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출판기념회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등나무 집에서 칼러프린터로 출력을 한 것이다.

쑥스럽고 낯설고 등나무 집의 수고가 콧등이 찡하다.

사람들이 모였다.

아직도 극동 건설에 근무하는 사람, 작은 건설회사의 전무, 또는 상무, 원예원의 사장, 아파트 관리 사무소의 소장, 재개발 관리처분 대행사의 사장, 작은 종합건설회사의 사장 등등으로 세월이 바뀐 만큼 바뀐 직장을 가지고 모였다. 이 자리에는 신문사의 문화부의 기자가 올 리 없었고, 문단의 중진이 와서 자리를 잡을 일이 없다.

등나무 집에서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와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대단한 작가가 아닌 줄 알면서 나와 사진을 찍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나를 쑥스럽게 했다.

등나무집사장은 축하 케이크를 장만해서는 "미안해요. 2단짜리로 해야 되는데 못 구했습니다."

누가 미안하여야 할 것인가.

등나무 집을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대자보를 보는 30대 이상인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고 음식점의 종업원들에게 묻고 그들의 눈빛이 우리 쪽으로 쏟아질 때 나는 수줍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30대 손님이 우리 쪽으로 와서 작가의 서명이 있는 책을 사겠다고 했을 때 나는 너무 무안했다. 나는 그냥 글 쓰는 사람이라면 적당하지 무게가 실린 작가라는 말에는 너무 낯뜨겁다. 책에다 서명을 해주니 "책 제목이 제게 너무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 악수 한 번 해도 될까요." 하니 그 말이 너무 황송할 지경이었다.

전화가 와서 온다던 이가 못 온다고 했고 못 온다는 이가 오기도 해서 열 네 명이 모였다. 잠깐 보이지 않던 흥부네 박 사장이 꽃바구니를 들고 왔다. 바구니에는 '작가 황종원 출판기념회 흥부네 박'이라고 리본이 매달려 있다. 글 몇 줄 썼다고 작가라는 말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나 마음은 고마웠다.

등나무 집 박 사장의 부인은 우리가 나름대로 행사를 진행하려 하자

"잠깐만요. 샴페인을 사러 보냈어요. 잠깐만요." 하고 난 뒤 샴페인의 코르크 마개가 펑 소리 요란하게 천장을 치며 우리 일행은 기분 좋게 일을 진행했다. 여의도에 있는 작은 회사의 이 사장이 사회를 본다.

"이 모임은 함께 근무했던 황 형이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 일을 하게 해준 흥부네 박 사장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모임을 지원해주신 등나무집 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흥부네 박 사장이 거든다.

"직장을 그만둔 뒤 긴 세월이 흘러도 이렇게 모일 수 있으시다니 부럽습니다. 저는 열심히 책을 만들었고 열심히 팔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주 힘들군요. 요즘 테러 때문에 국내에서 나오는 책들은 많이 힘이 듭니다. 좋은 글에 제가 흥미를 갖고 좋은 책을 만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모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흥부네 박 사장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황 형이 책을 썼다기에 건설 현장의 시공 방법이거나 재건축이나 재개발 추진방법인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내용입니까?"

"기획 의도는 이랬습니다. 추석에 맞추어 책을 펴내면서 이런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넉넉함으로 예로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라는 추석이 내일모레, 다들 고향 생각에 가슴 설렙니다. 늘 이맘때면 생각합니다만 고향에 추석이나 설 명절 말고도 아이들 데리고 한번쯤 찾아갔을 법 하지만 그동안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리고 좀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주말마다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았는지 한번도 찾아가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가봐야지, 이번에는 꼭 가야지’ 하면서도 이제껏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고향,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기 때문일까요, 그러기에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 보름달같이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우리 사정 다 알고 이해한다는 표정입니다. 늙은 당신들 걱정하지 말고 우리나 행복하게 잘 살라는 어머니 마음입니다. 어머니, 왜 꼭 무슨 날- 생신, 어버이날 -이나 명절이 되어야 이리 절실해집니까? 얼마나 벼르고 별러 오신 걸음인데, 그저 편한 맛에 외식으로 때우고, 어디 한번 제대로 따뜻한 밥 한번 차려 모시지 못했습니다. 당신 몸 주체하시기도 어려운 데 또 봉지 봉지마다 넣어 한 보따리를 챙겨 주시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귀찮기도 했습니다. 고백하건대 몇몇은 썩혀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걸 다 아십니다. 그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하시고, 오히려 ‘밖에서 사 먹는 것들은 부실할 텐데, 그나마도 제대로 챙겨나 먹는지’ 하고 걱정하십니다.

지금 어머니는 또 이것저것 알곡들만 골라 따로 챙기고 계십니다. 추석에 내려올 자식들 차에 실어 보낼 것들입니다. 자식들이 서른, 마흔 살이 넘어도 어머니에겐 여전히 당신 등에 업힌 아기입니다.

겨울이 멀지 않은 가을, 그동안 너무나 마음 편하게 대했던 부모님께 어리광을 피우던 나이로 돌아가 어머니 등을 주물러 드리며 마음을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선물 보따리보다 자식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정말로 큰 선물입니다. 늘 말로는 ‘괜찮다, 괜찮다.’ 하시나 조금도 괜찮지 않으시니, 시간은 늘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시간은 늘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는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

물어보던 사람의 시선이 진지하고 말하는 사람도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머니, 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가족 이야기입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몸 반쪽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 아내와는 아직 ‘여보, 당신’ 소리도 수줍어 못하는 신혼생활 23년째이고, 걸어 5분 거리에 어머니는 혼자 살게 하고, 대신 장모님을 23년이나 모시고 사는 우리 이웃 이야기입니다.

병마와 싸우는 남편을 붙잡고 애통해하는 젊은 아내의 눈물이 있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직장 생활의 애환이 있고, 전화로나마 서로 안부를 주고받던 친구와의 우정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40년이나 계속 쓰고 있는 황 선생님이 자신과 가족은 물론 이웃들의 삶에서 찾아낸 절실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제1부 영혼이 있는 사랑, 제2부 행복한 가족, 제3부 그래도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누어 담아낸 60여 이야기가 모두 우리네 팍팍하고 힘든 삶을 적셔주기 위해 방금 두레박으로 건져 올린 샘물 맛입니다."

듣고 있던 빌딩 관리 회사의 이사장은

"형님이 책을 미리 보내 주셔서 난 앞에 부분을 읽다 말고 눈물 나서 책을 덮어 버리고 캐나다에 가있는 후배에게 보냈어요"하고 "불효자들의 가슴을 찍는 사모곡입디다."

누가 또 물었다.

"몇 부나 찍었습니까? 많이 팔릴 것 같습니까?"

"2천 부를 찍었습니다. 어려울수록 책을 보는 것은 선진 외국의 성향입니다. 현재의 처지를 벗어나려는 방법을 찾아보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어려울수록 책을 안 봅니다. 책에도 운명이 있습니다. 좋은 책이 그냥 사라지는 수가 있고, 별것도 아닌 책이 화장하고 가꾸고 매스컴 타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지요."

"만약 적자를 보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도 장사지요. 하다 보면 잘 되는 수도 있고 안되는 수도 있으니까요"하고 흥부네 박의 박영발 사장은 말했다.

"광고해야 책이 팔리지 않겠습니까?" 하며 누가 또 물었다.

"광고를 하여야 하지만 입으로 입으로 전달되는 것이 제일입니다. 신문에 기사화가 된다거나 방송을 탄다거나……."

박 사장 말에 나는 내심 뜨끔했다.

책이 나오기 전에 MBC FM 여성시대에 내 글이 가끔 방송을 타면서 알게 된 실무자에게 2 년 전에도 어느 출판사의 담당이 내 책을 기획한다기에 내 책이 나오면 방송에서 언급 하여주마 하던 말을 들었던 일을 나는 흥부네 박 사장에게 말을 했었다.

작가도 아닌 이가 신춘문예에 나온 일도 없는 이가 내일 모래 60의 나이를 바라다보며 인터넷 신문에 열심히 글을 올리고 무엇인가 자기 의견을 말한다는 사실이 뉴스감은 되리라 생각을 했었다.

방송국에 책을 보내고 편지를 보냈어도 아직 반응이 없다.

나는 책 한 권을 얻었으니 손해를 볼 일이 없다. 반대로 내 말에 작은 희망에 찼던 흥부네박의 박 사장에게는 절실한 현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흥부네 사장은

"책은 책대로 운명이 있으니까요. 열심히 해보아야지요. 다른 인터넷매체에서도 서평에 언급이 없군요.“

지푸라기를 잡은 심정을 보인다.

"책을 보냈지만 아직 반응이 없네요."

나는 숨은 기분이었다.

흥부네 박 사장은 내 글을 책으로 만들고 여기저기 일간 신문이나 월간지에 출판사의 출판 기획의도를 보냈으나 아직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책은 광고한다고 다 팔리는 것이 아니다.

신문에서 서평에 무게가 실려 몇 줄 내주는 효과는 대단하지만 내 글이 아주 우습게 보였거나 미국의 테러 사태가 너무 큰 탓이거나. 기자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달려가는지도 모른다. 그는 무슨 운명으로 인터넷에서 내 글을 보고서 이렇게 혼쭐이 나서 가슴을 앓고 있는가?

내가 등나무 집의 사장에게 20여 년을 친하면서 도와준 것이라고는 없다. 극동건설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다란 미사일기지 현장에서 주임이었던 나는 캠프와 자동차 관리를 맡고 있었고 대리였던 박 사장이 내게 차량 지원을 바랐을 때 남에게 해주는 만큼만 해주었을 뿐 나는 융통성이 없었다. 내가 먼저 귀국하고 나서 뒤에 귀국했던 박 사장은 내 아내에게 주라고 은목걸이를 귀국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의 부인에게 해 준 것이 없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의 나날을 보낼 때 함께 일하자고 권하던 이가 박 사장이었고, 그 일을 하지 않고 나는 ISO에 빠져 심사원 되는 공부를 했고, 그 중간에 자기 회사에서 일거리를 내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던 이가 박 사장이었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뿐이다.

내가 그에게 해 준 일은 무엇인가.

등나무 집을 개업했을 때 내가 좋아는 쉴 셀버스타인의 그림을 모사한 그림을 여러 장 그려서 음식점 벽의 공간에 붙여주었던 일 뿐이며 그의 이야기에 말동무를 하여준 일 뿐이었다.

혼불 작가 최명희를 찾다 보니 박 사장마저 나와 동감을 해서 등나무 집 한쪽에다가 작가 최명희를 기리는 자리를 만들어서 그 자리에 앉는 손님들에게는 먹은 음식값의 10퍼센트를 깎아 주고 있다. 나는 박 사장에게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내리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해 득실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왔었다.

나는 등나무 집의 박 사장에게

"박형, 정말 고맙습니다."

"재미있잖아요. 이렇게 모이는 것이……."

하는 그의 마음은 투명하도록 고왔다.

미움마저도 그리움으로 새겨지던 때, 그의 따스함은 먼 훗날에도 추억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인사말이 끝났다.

"어머니를 위하여"

샴페인이 돌고 소주잔이 돌았다. 세상은 때로 가슴이 시릴 만큼 살 맛이 난다.

200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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