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09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산은 높고 그 물줄기는 길고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남도 거창군을 품에 안고서 경상, 전라, 충청의 경계라는 삼도봉을 거쳐 덕유산을 지난 백두대간이 ‘산은 높고 물은 길다’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의 고장 장수의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되어 금강의 발원지 수분리가 있는 신무산의 뜬봉샘에 이른다.
비단강이라는 이름이 붙은 금강은 나라 안에서 여섯 번째로 길고, 남한에서는 낙동강과 한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길며, 총 유역 면적만 해도 9,886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당서(唐書)』에서는 금강을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다. 금강의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으로,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와 익산 웅포의 곰나루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불리는 금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동국여지승람』에는 “수분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골짜기의 물이 하나는 남원으로 향하고 한 줄기는 본현으로 들어와 남천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천은 북으로 흘러 용담현 경계로 흘러간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금강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즉, 상류에서부터 적등진강(赤登津江), 차탄강(車灘江), 화인진강(化仁津江), 말흥탄강(末訖灘江), 형각진강(荊角津江) 등으로 불리며,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불린다.
금강의 발원지에 대해 현대 문헌 중 『한국지명사전』에서는 육십령과 천마청산, 『한국지명요람』과 『큰사전』(한글학회), 『새한글사전』에는 전북 장수군, 『국어대사전』(현문사)과 『세계대백과사전』(학원사)에는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 사이, 『한국지명총람』에는 신무산 수분이고개(수분재)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두산동아 『세계대백과사전』에는 장수군 소백산맥 서사면에서 발원한다고 지명에도 없는 부분을 명시하고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수분이고개에 있는 김세호라는 사람의 집 남쪽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은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금강의 발원지가 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새로 집이 지어져 그렇지 못하다. 수분리 남쪽에 있는 고개인 수분이고개는 해발 600미터쯤 되는데 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섬진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금강이 되기 때문에 물이 나뉜다는 뜻에서 수분이고개라고 하였다.
수분이고개를 지난 강물은 장수군 천천(天川)을 지나 용담댐에 이르고 금산, 영동, 옥천을 거쳐 대청댐에 이른다. 공주와 부여 그리고 강경을 지난 강물은 웅포를 거쳐 군산에서 서해에 몸을 푼다.
장수현의 백제 때 이름은 우평현(雨枰縣)이다. 신라 때 고택(高澤)으로 고쳐서 장계군에 딸렸다가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려 말기의 문인 윤여형의 시에 “산길에 가을바람 새벽의 찬 기운을 빚어내고, 서리 맞은 황엽은 말안장에 가득하네” 하였던 장수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으로 높고도 험한 산들이 즐비하다. 남덕유산, 백운산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함양으로 넘어가는 육십령이 있다. 고개가 높고 험해서 60명이 모여야 넘었다고 하고, 고개의 굽이가 60여 개가 되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고 부르는 이 고갯마루를 사이에 두고 말씨와 풍습이 바뀌었다. 금강의 발원지인 신무산과 팔공산을 경계로 섬진강과 금강으로 물길이 나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팔공산을 성적산(聖迹山)이라 쓰고, 그 산에 운점사(雲岾寺)라는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운점사는 성적산에 있다. 신라 진평왕이 중수하였으니 원효의 도량이었다. 남북쪽에 만향점(滿香岾)이 있는데 승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서 강법하였다. 이상한 향기가 풍기어 붙인 이름이고, 본조 세종조에 승 성주(省珠)가 다시 중수하였다.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았는데, 그 절터에는 지금 비구니 도량인 팔성사(八聖寺)가 있다. 이곳 장수에는 장수 삼절(三絶)이라 하여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세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주논개(朱論介)의 충절이다.
적상산성 사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주구천동 투표함이 도착해야 선거가 끝난다”라는 말과 함께 “이 친구 아직도 무주구천동이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궁벽한 산골의 대명사였던 무주 적상산에 있는 적상산성(赤裳山城)에는 광해군 16년 묘향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했던 사고 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