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으로 인해 불뱀들을 도구로 하신 징벌, 징계에 빠져 죽어가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은 그때 당시 그와 같은 징벌 및 죽음에서 살 수 있고 구원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과 통로였고..
실제로 모세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렇게 그 장대 위의 놋뱀을 바라보았던 자들은 죽어 가다가 정말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완전히 죽게 된 상황에서 그 장대 위의 놋뱀을 보게 됨과 함께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기적적으로 전적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따지고 봐도 그러한 역사가 가능했음은 그 장대 위의 놋뱀 자체에 어떤 능력이나 구원의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전적으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사실상 그와 같은 장대 위의 놋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면서 오늘날의 우리들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붙잡음과 같이 마찬가지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삶의 자리와 인류 역사의 현장들 속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할 수 있도록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러한 장대 위의 놋뱀은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시고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며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과 어떤 식으로든 전적으로 직결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구원은 결코 구주 예수님 단독이실 수는 없는 것으로 조금만 통찰해 봐도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그와 같은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을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예정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심으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애초에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 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정말 누리고 경험하며 나타나고 성취되어 지게 하시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래 본문과 같은 실질적인 구원의 사건은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주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강조하시기 직전에 요한복음 3장 14~15절에서와 같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굳이 부연하신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듯이..
이와 같은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과 얼마나 관련되고 연계되는 것인지를 어느 정도는 확인시켜 주신 것임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래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을 불뱀에 죽어가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라봄과 함께 살게 하신 것은 오늘날의 우리들로 치면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대로 자복하고 돌이키며 간구하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수 없는 것인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오직 한 분이신 분이자 구원자이시고 중보자이시며 유일한 길과 통로와 접점이신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감과 함께 직접적, 경험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한 실질적인 응답과 누림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모든 역사들에 있어서의 전제와 기준과 관건은 말씀, 말씀대로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간과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실제로 아래 본문에서도 모세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믿고 따랐던 자들만, 곧 인간적인 이치와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맞지 않고 도저히 납득 불가며 어떤 면에서는 참 황당할 수도 있고 마치 만화 내용과 같을 수도 있는 말씀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그대로 믿고 따랐던 자들만 그와 같은 구원의 일을, 응답과 실제와 누림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크고 작은 모든 구원의 일들, 기도의 응답과 예비들의 실제와 누림들 등에 있어서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과 관련해서 동일한 이치와 원리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사실 그 이유는 조금이라도 복잡하거나 어려울 수 없는 것으로 우리들이 그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구주 예수님께서야 말로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인 것이고, 또한 우리들이 사모하고 의지하며 간구해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며, 게다가 시공을 넘어 모든 실제와 누림들이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도 단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것이고, 그렇듯 근원적, 본질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신 것이며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21:4~9)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8월 20일(화)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