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징, 예수의 표징
갈라 4,22-5,1; 루카 11,29-32 /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2022.10.10.;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와 달리 군중에게도 쓴 소리를 하셨습니다.
그 요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숱한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고 당신이야말로
신성을 지니신 존재라는 표징을 담고 있는데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군중은 요나의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당해 바빌론으로 끌려가기 직전 시대인
기원 전 6세기 경에 활약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알려진 세력 가운데
최강국이었던 고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니네베로 혈혈단신으로 들어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나서,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 임금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니네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려세운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요나 예언서에 담긴 이야기가 실제 역사라기보다는 교훈문학으로 창작된 것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스케일은 무척 컸던 셈입니다. 바빌론 유배 이전 시절에 욥기에
등장하는 욥이 실존 인물도 가공 인물도 아닌 이스라엘의 이상적 인간형으로서 묘사된
것처럼, 요나 예언서에 등장하는 요나 역시 바빌론 유배를 겪고 나서도 그리스와 로마
세력 등 무신론 계열의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연이어 지배를 받게 된 이스라엘이
갖추었어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보여주는 평균적 인간형으로서 묘사되었습니다.
당시 앗시리아는 수메르 문명을 계승하고서는 세계 최초의 철기 문명을 일군
히타이트족의 군대까지도 무찔렀던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는데,
그 수도인 니네베로 가서 요나가 혈혈단신으로 들어가서 회개시킨다는 구도 설정 자체가
대단히 무모해 보입니다. 여기에는 바빌론 유배의 주범인 앗시리아의 힘에 대한 공포와,
유배를 당했던 이스라엘의 무기력함에 대한 자기변명적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파견 결정에 반항하기로 마음먹고 당시 땅 끝으로 알려진
타르시스로 도망치려고 배를 탔는데, 여기서 폭풍우를 만나서 고래의 먹이가 되어
고래 뱃속에서 사흘밤낮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줄거리에는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인간적 반항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메시지가 우화적 형식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니네베로 다시 돌아간 요나가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돌아다니자
니네베의 임금부터 대신들과 백성들이 회개하기로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은 더욱
극적입니다. 그런데 사실 천문 관측 기록에 의하면, 요나가 무모하게도 니네베 시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던 그 시절에 두 번의 기근(기원전 765년, 759년),
한 번의 개기일식(기원전 765년 6월 15일)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자 강제로 끌고 온
소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운 나머지 하느님을 믿지도 않던 임금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느닷없이 회개한 일(요나 3장)은 황당해 보여도 실제 일어났던 일이어서 역사적
교훈으로 요나서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 예언서에서 역사적 교훈이
된 표징은 니네베 시민들이 재앙을 만나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요나를
고래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지내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시민들을 설득시킨 설교의 감화력보다
더 큰 설득력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군중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계셨습니다. 요나가 고래뱃속에 머물던 그 사흘이 지나면 부활하시어 진정한 표징을
주시겠다는 다짐과 각오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던 복음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소식을 듣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그 깊이와 스케일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역사의식과 구도정신을 일깨워 주시려고
군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요나의 사례를 굳이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갈라티아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는 사도 바오로 역시 그들에게 아브라함에게서
난 두 아들에 관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맥을 짚어주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지니는 자유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갈라티아 지방을 통치하던
로마 제국이 법적으로 부여하는 자유와 부자유의 틀을 훨씬 넘어서는 본질적인 자유를
그들이 복음 덕분에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율법의 종살이를 하는 멍에를 메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어차피 한 번은 죽기 마련인데, 스스로 하느님의 뜻이나 소신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느냐 아니면 자신의 본능이나 이익을 위해 살다가 죽임을 당하느냐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사(自然死)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노화
현상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요나의 표징은 하느님의 명령을 피해
비겁하게 도망하다가 고래뱃속에 갇혀 지내야 했던 사흘만의 감금이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징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만 이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죽음으로서 사흘만의 부활로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죽임이 아니라 죽음이, 동시에 감금이 아니라 부활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없애주어
하느님 나라에로 이끄는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