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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 8:9-15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헤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 계신 분들도 예전에 세상 교회에 다닐 때는 헌금 많이 하셨죠?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도 하고 많이 하셨을 거예요. 지금은 헌금이나 연보를 할 기회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드릴게요.
지난달에 서울 모임에서 대구 교회에 오셨을 때 연보를 하신 분들이 있는데, 여러분, 연보를 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하십니까? 늘 습관적으로? 남들이 하니까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는 계속 연보 이야기가 나옵니다. 돈 이야기라서 어떤 면에서는 매우 민감한데요,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연보는 돈을 나누는 게 아니에요. 헌금도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은혜를 나누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그것을 서로 나누는 겁니다. 반드시 그건 나누어지게 되어 있어요.
먼저 우리에게 연보가 되신 분이 있죠?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라는 연보를 받은 우리가 그분을 나누는 것을 연보라고 해요.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쉽게 말해서 나는 돈으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신앙 고백으로서의 연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연보를 할 때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연보나 헌금은 돈을 바치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헌금이고, 또한 그 은혜와 사랑을 한 몸 된 지체들과 나누는 게 연보예요.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헌금이나 연보는 내 것을 바치거나 내 것을 나누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믿음 안에서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믿음 안이에요. 내 의지, 내 결단, 내 열심으로 아깝지만 드려야 하니까 하나님께 드린다는 게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즉 예수 안에서, 은혜 안에서, 사랑 안에서 주님을 나누는 것입니다.그것을 (사랑 안에서) 균등하게 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일을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된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궁핍한 형제나 고난당한 지체들에게 어떤 도움을 베푸는 게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어디에 나옵니까? 복음서에 나오죠?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작은 소자에게 하는 게 바로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마 25장)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주님, 우리는 한 적이 없는데요, 우리는 예수님이 주리실 때, 목마를 때, 옥에 갇히셨을 때 예수님께 해드린 게 없는데요.”라고 해요. 왜 그럴까요? 안 했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죠.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어디 안에서? 믿음 안에서..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사랑으로 한 모든 게 주께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열심히 했잖아요. 우리가 이웃 구제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도 섬기고 다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한테 왜 그러세요?” 그럼, 그들은 누가 한 겁니까? 자기가 한 거죠. 믿음 안에서 한 게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를 위해 한 거란 말이죠 양과 염소의 차이가 그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를 섬긴다는 것을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참 어리석은 거예요. 나한테 아무 유익이 없단 말이에요. 아무 힘없는 작은 소자 한테 하는 건 나에게 돌아올 반대급부가 없는 거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일처럼 보이는것, 그렇게 세상이 보기에는 아무 가치 없는 일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가셨는데, 그분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뭔가 하면 그분의 삶 자체가 이 세상에 합류되지 않기 위해서 이 세상과 계속 경계선을 가지면서 살다가 가셨거든요.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 정신, 세상 가치와 맞서기 위해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 신인 사탄과 싸워야 하는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하늘에서 온 자로 사람들에게 분명한 선을 그으십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세상에서 난 자로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고 만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게 너무 싫었어요. 너도 똑같이 사람인데, 왜 우리와 다르냐는 거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경계선, 세상과의 구별을 절대 양보하시지 않습니다. 왜?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이죠.
(요 8장)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면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 다시 말하면 그냥 내어버려 두심이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은 일도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그분을 계시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이 누구신지조차 몰라요. 그게 하늘에서 오신 분과 세상에서 난 자들의 다름이예요.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혀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와의 약속에 충성되심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에요. 아버지와의 약속을 위해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끝까지 포기하셨거든요.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자기 부인.
우리가 흔히 말하잖아요. 예수 믿는 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좇는 것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여기서 말하는 자기 부인이란 자기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는 자기 부인이 아니에요. 그건 종교인들이 하는 거죠. 그리고 백날 해도 자기부인 안 돼요. 그럼, 뭐냐?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기 부인이에요.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 그 자기 부인 안에 우리를 연합시키시는 것.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기 부인 안에 우리를 합류시켜 주신 것을 우리의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믿음입니다. 그분의 주 되심, 그분의 십자가 다 이루심을 믿는 거예요. 골로새서에서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다 이루셨음을 믿는 그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평강 안에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입니다. 온전히 이루어진 사랑 (요일4:18-19)
그렇게 주님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약속에 신실하심이 우리의 구원이에요. 만약 그러지 않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했던 마귀의 말처럼 돌이 떡이 되게 하는 일에 열심하면서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셨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큰일 나는 거예요. 우리 구원 없어요. 그런데 그분은 세상의 공공의 적이 되어서 온 세상이 합심해서 그분 하나를 살해하려고 하는, 그렇게 결국 그 처참한 십자가에서 생을 마치셨어요. 그 약속에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아담으로부터 오늘까지 유일한 죽음, 진짜 생명 있는 그분의 죽음만 진짜 죽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그 십자가만 현실이라고 하세요. 다른 건 전부 현실이 아니에요. 야고보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하죠. 세상 전부가 가상 현실이에요. 미국과 이란이 전쟁을 하고 기름값이 얼마를 하던 스타벅스가 문을 닫든 말든, 삼성전자가 성과급을 6억을 주든 말든 그건 전부 잠시 보이다 사라지는 것들이에요. 영원한 현실, 진짜 현실은 하나밖에 없다니까요. 뭡니까? 하늘에서 오신 그분의 죽음이에요. 십자가. 하나님에게는 그 십자가만 영원한 현실이라니까요. 실감이 잘 안되세요? 여러분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현실은 죽음 뿐이에요 그걸 자꾸 잊어버리고 사니까 보이는 것만 현실인 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잔치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세상과 경계선을 두고 살다가 가셨는가? 왜 그래야 하셨는가? 이유가 뭡니까? 영원 전에 약속이 있었거든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약속이에요. 그 약속으로 인해 창세전, 우리가 있기도 전에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는 속량이 등장하는 것입니다(엡1:7)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죄가 되셔야 했던 거예요. 약속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가 되셨고, 우리의 저주를 대신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단 말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라는 연보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셔야 했기에 우리도 그 연보를 받아서 그분의 가난케 되심이라고 하는 은혜의 일에 참여되기 위해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더 풍성해야 한다는 게 오늘 본문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단순히 너희 많이 가진 자들이 적게 가진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 헌금 많이 해라, 연보 많이 해라 하는 말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지금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의 참된 양식은 떡이 아니고 돈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체험시켜 주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유혹 앞에서 성도는 수시로 갈등하면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원치 않는 자기 부인의 길로 내몰리게 됩니다. 왜?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적으로 우리 주님의 피, 그 죽음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죽음이 나누어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 약속이 우리 안에 심기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원치 않는 자기 부인, 자기 부정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기 싫지만, 주께서 띠 띠어서 끌고 가고 계십니다. 왜요? 그 길이 생명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회초리도 드시고,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과 환난을 살아내게 하십니다. 아들이라면 누구나 받는 징계입니다.(히12:5-11)
여러분 아시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진리입니다. 돈이 생명이에요. 이렇게 세상 신이 펼쳐놓은 촘촘한 그물 안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촘촘한 그물 안에 갇혀서 생명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오직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에요. 다들 힘을 축적하는 게 생명인 줄 알아요. 그렇게 고지에 올라서서 나의 나 됨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 자아실현, 자기 성취, 자기 증명이 인생 뿐인 인생을 사는 안개들이에요.
그리고 그 배후에는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있어요. ‘왜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해? 이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돼.’.. 어떤 인간도 이런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자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그 시험을 대신 통과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먼저 하나님께 시험을 받은 민족이 있죠? 이스라엘입니다. 광야 사십 년간 하나님이 낮추시고 시험하셨는데, 결과는 다 실패했습니다. 출애굽한 1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죽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가 여호수아(예수)를 앞세워서 가나안에 들어가요. 그게 우리 구원을 생생한 그림으로 앞당겨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마귀의 시험, 우리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 통과할 수 없는 마귀의 시험을 예수님이 이겨내시고 그 이김을 우리에게 그냥 입혀 주셨어요. 이긴 자는 이만희가 이긴 자 아니라, 이긴 자는 예수님 한 분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날 지붕에 십자가를 걸어놓은 예배당 안에서조차도 마귀의 가르침대로 자기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예수 이름을 팔고 있잖아요. 예수 잘 믿으면 이렇게 성공한다고 말입니다. 교회 간증이란 게 전부 그거잖아요. 우리나라가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성장 제일주의가 한국 사회를 휩쓸다 보니 교회까지도 물량주의, 실용주의 성장 일변도로 치달았어요. 목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꿩 잡는 게 매다. 일단 교회는 키워놓고 보자. 이렇게 해서 기업들이 써먹는 마케팅 이론이 교회에 도입되었어요. 보험회사에 가면 현수막 붙여놓은 거 있잖아요. ‘오늘도 혼자 오셨습니까?’ 예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 입구에도 그거 붙여놨었어요. ‘오늘도 혼자 오셨습니까?’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벽면에 전도 실적을 그래프로 만들어놨죠. 이게 교회인지 보험회사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런 교회가 복음의 진리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금요 기도회라고 하면서 온통 방언에다가 방언 통변한다고 목사가 다니면서 머리에 안수하면서 방언 한마디 하고 통변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계시가 되는 거예요. 이놈들이 전부 성경을 새로 쓴다니까요. 그런 곳이 귀신의 처소란 말예요. 세상 교회들이 전부 그짓을 한다니까요. 그걸 신령한 것으로 알아요. 이런 사단이 쳐놓은 그물 아래 갇혀서 파닥거리면서 아무도 못 빠져나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들을 기회조차 빼앗는 곳이 된 거예요. 사람들을 가두어놓아 버렸다니까요.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아예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그들에게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다 안다고 하죠. 나도 안다고.. 이게 참 무서운 일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다 줄 수 있는 능력자가 마귀예요. 교회도 키워주고 병도 낫게 해주고 돈도 벌게 해주고 어려운 시험에도 척척 붙게 해주고 말입니다. 수능 때만 되면 교회에서 특새(특별 새벽기도)하는데, 그거 누구한테 기도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까? 대구 근교에 동화사 갓바위는 수능철이 되면 터져나갑니다. 갓바위 부처에게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새벽부터 잠 안 자고 교회 가서 빌 게 아니라 갓바위에 가서 빌면 돼요.
그래서 김성수 목사가 유명한 말을 하나 남겼잖아요.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그런 예수 그런 십자가 그런 교회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 마귀를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오죽하면 666이라고 할까요 777이 하나님의 수인데 하나님과 방불하다고 해서 666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도 자기가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을 사람 없습니다. 세상 신에게 다 갇혀 있다니까요. 예수님 말씀처럼 마귀의 세간처럼 붙들려 있는데 그 강한자를 결박해서 세간같은 우리를 구출해 내는 걸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전쟁에 전리품으로서 우리 구원인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양복 입은 무당이 한판 신나게 굿판을 벌이는 곳. 그곳에서 같이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소리지르고 박수치고 노래 몇 곡 부르고 그러면 스트레스 해소는 되겠죠. 그런데 그런 종교 행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악행임을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교회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어요. 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 큰성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우리 카페에 글을 올렸는데, 우리나라 교단 중 장자 교단이라고 하고 정통이라고 하는 합동 측에서 가장 큰 교회가 서울에 있는 ‘ㅇㅇ의 교회’입니다. 옥모씨가 1대 목사이고, 지금은 2대 목사 거쳐 3대 목사를 결정했다고 하던데, 그 교회에서 1년에 한 번씩 부흥회를 합니다. 이번 부흥회 강사가 열 명쯤 되는 것 같던데, 그 대표 강사가 ‘릭 워렌’이에요. 이 사람이 지은 유명한 책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지요. 이 책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읽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예요. 이 사람은 미국 대통령도 자문하고 새들백교회 담임 목사도 했지요. 이 사람이 지은 이 책이 왜 그렇게 인기가 좋은지 아세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피조물은 자기 목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자기 목적을 가지고 살 수 없어요. 그래서 성도는 자기 목적이 부정되면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이끌려가는 사람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럼, 성도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든 예수든 뭐든 이용해서 자기 목적달성에 이용하죠. 그렇게 하나님과 거래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 이 책에요. 우리나라 교회들이 그렇게 필독서로 추천하는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그런 아류의 책이란 말입니다. 문제는 이 릭 워렌이 기존 보수적 기독교, 자기 말로는 근본주의라고 하는데, 그 보수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비판해요. 성경만이 진리라는 것을 비판해요.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 예수님의 여러 가지 기적,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빼면 기독교에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인간만 남죠. 인간이 전부라는 거예요. 그 배후에 뭐가 있습니까? 사단이 있죠. 이런 자를 교회가 강사로 세워요. 교인 수가 수만인 교회 강단에 이런 자를 세워요. 그리고 이 사람은 또 기독교와 이슬람의 통합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어떻게 빛과 어둠이 함께합니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할 수 없다고 고린도후서에서 말하잖아요. 교회가 어둠 그 자체이다 보니 빛을 싫어 하는 거에요 자신이 어둠인 것이 드러날까봐.....
그래서 성경은 이런 자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하지요. 지금은 이렇게 악한 세대입니다. 새벽이 오기 전의 캄캄한 어둠이란 말입니다. 세상 교회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의 섞은 술에 다 취해버렸어요. 세상이 좋아하는 것, 세상이 가치라고 하는 그것들이 교회에 그대로 다 들어왔어요. 세상과의 경계가 없어져 버린 교회는 교회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들과 함께 잠자지 말고 깨어있으라고 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고 합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악한 세대입니다. 가장 큰 예배당을 가진 교회 자칭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가 이런 부흥사들을 세워서 한판 굿판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또 강사 중에 강ㅇㅇ 목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뉴에이지 영성 운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권ㅇㅇ 목사는 총신에서 차등 상급론을 가르친 사람 차등 상급론에 관한 논문을 쓴 사람이에요. 여러분 교회 키우는 데는 상급론 만큼 좋은 게 없어요. 교인들에게 동기 부여하기 젤 좋죠.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 가면 상급이 다르다고 해요. 그러면 천국에서 누구는 백 평짜리 맨션에 살고 누구는 합숙소에 살고.. 그런 곳이 천국이겠습니까? 이런 것 가르치는 자가 어떻게 총신 교수를 하고, 어떻게 이런 자를 교회 부흥회 강사로 세우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랬어요. “이미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어떻게? 내어버려 두심으로. 너희가 믿고 싶은 하나님, 믿고 싶은 예수를 믿으라고 내어버려 두는 그게 심판이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들이 섬기는 건 성경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들은 세상 신, 맘몬을 섬겨요. 물론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죠. 그들에게 예수는 자기 목회를 성공하게 해주고 사업을 성공하게 해주고 자식들 잘 되게 해주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는 예수니까.
재미있는 건, 오늘날 종교의 세계에도 세상 경제 논리가 그대로 들어가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큰 교회는 더욱 커지고 작은 교회는 소멸돼요. 사람들이 보기에도 큰 예배당이 있고 사람들로 붐비는 교회에는 뭔가 있을 것으로 보이잖아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축복하시니까 저렇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로 다 몰려들어요. 통계를 보면 대형 교회의 시장 점유율이 70% 이상이랍니다. 가령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라고 치면 칠백만 명 이상이 큰 교회에 몰려 있어요. 이제는 개척교회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 어떤 교단 조사에서 신학교 나와서 목회 안 하고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의 수가 전체 신학교 졸업생의 70% 이상이랍니다. 그러니까 젊었을 때 철없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신학교에 갔는데, 막상 나와보니 이것으로는 먹고살지 못하겠다 싶으니까 목회 안 하고 다른 직업 구하는 겁니다. 영세한 골목 상권이 대형마트에 다 잡아먹힌 꼴입니다.
이런 세상 교회의 행태, 세상 정신과 세상 가치에 물든 교회, 하나님의 원수가 된 교회가 오늘날 현실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교회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자꾸 공급해서 그렇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뭐예요? 복 주는 하나님이잖아요. 물질 복, 건강 복, 자식 복, 출세 복.. 그래서 나온 게 순복음교회 조용기씨 삼중 축복입니다. 거기에다 양념으로 신비주의까지 더해지면 사람들이 환장을 합니다. 대형 교회가 되는 비결은 그 두 가지예요.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이것을 적당히 섞으면 교회가 커져요. 그런 큰 교회에는 일요일에 은행 직원들도 출근합니다. 돈 계수하는 기계 들고. 교회로 출근하는 거에요. 여러분 이건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당입니다. 맘몬을 섬기는 사단의 회당. 그 배후에 세상 신이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회 목사들이 노회에 가면 교인 수부터 자랑합니다. 그리고 건축 헌금이 얼마고, 새로 짓는 예배당이 몇 평이고, 당회장 승용차, 교회가 사들인 부동산 자랑합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부흥 강사로 가면 수행하는 집사만 수십 명이랍니다. 폼 나죠. 그런 거 하고 싶어서 일단 교회부터 키워놓고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능력 주시는 하나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런 성경 구절만 뽑아서 해는 거예요.
그럼, 교회 성장도 못하고 세상에서 출세도 못하는 건 왜 그래요? 쉽게 말해 예수 잘못 믿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 이혼하면 교회에 안 나가요. 좋은 회사에 취직하지 못해도 창피하다고 안 나가요. 어떤 교회는 청년이 취직하자 그동안 못했던 십일조를 한꺼번에 받는 곳도 있대요. 돈에 환장한 거죠. 이러니까 목사든 교회든 모이면 빕니다. 주시옵소서~ 새벽부터 빌고, 철야하면서 빌고, 금식하면서 빌고 해서 결국 한국 교회 폭망했습니다. 기록된 교회사를 보면 이게 증명됩니다. 교회에 돈이 쌓이거나 권력을 가졌을 때 반드시 망합니다. 수천억짜리 예배당도 있고 해외 지부도 수십 군데 만들고 우리나라 장로 대통령도 세 명 배출했어요. 얼마 전에는 불신자 대통령을 부활절에 강단에 세웠잖아요. 그런 한국 교회에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이 없어요. 복음이 없어요. 대한 예수교에 예수가 없어요. 순복음 교회에 복음이 없어요. 사랑의 교회에 예수사랑이 없다니까요 기가 막히잖아요.
이렇게 이땅의 교회들이 십자가를 파묻어버렸습니다. 십자가가 아예 금기어가 되었어요. 평생 교회를 다녔는데 ‘피’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인들입니다.
이렇게 세상 신의 능력은 참 놀랍습니다. 아무도 거기에서 못 벗어나요. 아니 하나님이 그렇게 가두어 두셨어요. 벗어나지 못하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어둠의 세상,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음란하게 섬기는 이 세상 속에 아직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 두셨어요. 그리고 그들만 알아듣는 하늘의 언어로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서로 나누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은혜의 풍성함이 어떻게 균등하게 나누어지는지에 관한 말씀이에요. 돈을 균등하게 나누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진리, 사랑이 어떻게 균등하게 나누어지는지 연보를 통해서 바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그런 세상 힘의 원리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회수된 자들이 있어요. 그들만 이 세상 집착에서 벗어나서 눈이 세상으로부터 하늘 소망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새벽에 계시록을 보다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씀을 봤어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리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실체를 알고 있는 성도들에게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세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있습니까? 날마다 그곳을 바라봅니까? 우리는 지금 우주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있어요. 그런데 이런 시간과 공간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니까요. 우리 몸도 이런 몸이 아닌, 새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신부로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합니다 (계21:1-2) 그렇게 완료된 현실을 이땅에서부터 살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들만 교회에요.
그 소망이 없이 그냥 교회다니고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거예요. 성경은 그것을 인생뿐인 자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러겠어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성도는 이미 그 새 소망이 자기의 현실이 된 사람들이에요. 보이는 현실이 현실 아니라고 하잖아요. 날마다 새로운 소망으로 채워져 가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세상 만물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부터 별세하는 모든 과정을 연보라는 나눔을 통해서 한번 체험해 보라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소유, 내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나로부터의 자유를 잠시 누리게 되는 연보입니다. 가장 아끼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돌보심, 주님의 다스리심을 너희가 한번 살아보라고 일부러 연보를 말합니다. 왜? 너희는 이 세상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역사, 우주까지도 그리스도의 한 몸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그것 배우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의 서로 나눔, 같은 통점을 가진 그 한 몸, 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고난을 받으면 같이 아파할 수 있는 한 몸, 그들이 교회예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이 공급되는 지체들, 그 한 몸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세상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현실을 연보라는 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다스리심이 서로 나누는 연보의 형태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다.. 세상 힘이나 세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다른 현실, 그 하나님의 현실에 대해서 눈이 열려야 한다.. 그게 바로 한 몸 된 교회의 나눔이고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몸 된 교회, 피로 사신 교회는 서로 경쟁이 있을 수 없고, 서로 비교가 있을 수 없고, 그리고 그 교회는 성장이 있을 수 없으며 실패도 있을 수 없고 부패도 있을 수 없어요. 이미 창세 전부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확정된 교회이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해 있고 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리고 그 은혜만 감사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자가 있을 수 없고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즉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아멘”
사도는 지금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본문을 통해서 증언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돈이라고 하는 아주 민감한 문제를 통해서.
오늘 설교 제목이 ‘균등케 하심’이거든요. equality. 여기서 균등케 한다는 말은 돈을 서로 나누어서 균등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균등하게 나누어지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은혜의 균등. 모든 성도에게 차고 넘치게 나누어주신 연보, 그리스도라는 연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라는 그 연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예수님의 피와 살, 그 그리스도의 연보를 너희가 알라는 거예요. 이미 그것이 나누어졌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섬기는 것을 한 번 실천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나누어 주신 것처럼.
그래서 11절과 12절에서 사도는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돈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 믿음을 받으시고 우리 자신을 받으시는 거예요. 우리 안에 아들의 피, 아들의 사랑이 있는지를 보시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다시 돌려받기를 원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죽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마중물로 우리 안에 부어졌으면 반드시 우리 안에서 그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닌 겁니다. 그 사랑이 한 몸 된 지체들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지는 것까지가 구원의 완성이에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 사랑이 나누어질 때, 균등케 나누어졌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토브. 그게 하나님의 선이란 말이에요. 모든 것이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되는 그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하나님만 선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게 선이라는 고백을 자기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받아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던 일이 다 잘 되고, 자식도 잘 풀리고, 몸도 건강하고 하면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하고 찬송하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는 일마다 다 안 되고 자식은 애 먹이고 몸도 아프고 한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게 선입니다’라는 그 고백이란 말이에요. 이게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고백을 받아내시기 위해서 성도의 삶에는 환난과 고난이 있어요. 나의 뜻, 나의 소원, 나의 계획이 다 끊기고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만 옳습니다는 고백.. 그것을 한 단어로 ‘송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다는 뜻이에요. 보통 교회에서 예배 시작 전에 하는 게 송영이죠. 예배 시작 전에 시편을 읽는 것 예배 마칠 때 하는 것도 송영이에요. 송영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 때 그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송영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말로 율법의 완성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부으신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부으신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그게 율법의 완성이에요. 그렇게 아들의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완성, 다른 말로 십자가의 영광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상 교회에서 없는 게 그 십자가에요 그러나 십자가 없는 송영은 송영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연보는 돈을 나누는 게 아닙니다. 뭘 나눴다? 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거예요. 예수를 나누는 이게 연보요 구제입니다. 그렇기에 액수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오늘 본문 말씀이에요. 있는 자는 있는 대로 하고 없으면 안 하면 돼요.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기 의로 연보를 하고 있는가, 어떤 자기 목적이 있어서 헌금을 하는가, 그도 아니면 두려워서 하는가.. 성경은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게 죄라고 해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연보를 하기 때문에 형제를 도운다는 그것으로 자기 의를 삼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형편이 어려워서 헌금을 못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보라는 행위를 보시는 게 아니라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연보에 대해 칭찬하신 사람이 둘 있어요. 과부의 두 렙돈. 연보한 돈은 몇 푼 안 되는데 칭찬하셨어요. 저 과부는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렸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이에요. 또 한 사람은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마리아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잖아요. 왜일까요? 마리아가 칭찬을 받은 이유가 뭐예요? 향유 옥합이 비싸서? 그게 요즘 월급으로 하면 샐러리맨 월급 십 년 치 정도로 비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흔히 그 비싼 것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다 부었기 때문에 칭찬하셨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건 예수님의 죽음에 마리아 자신을 부은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의 연합.. 그 자체로 복음이에요. 그 부음 자체가 복음이에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바로 그 말이에요. 먼저 예수님의 죽음에 자기 자신이 부어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되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과부의 두 렙돈이나 마리아의 기름 부음처럼 그들은 다 자기 자신을 주께 드린 자들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성도는 동일하게 균등하게 그 은혜와 사랑이 나누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더 받고 더 적게 받고, 은혜를 더 받고 더 적게 받는 게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천국 가니까 누구는 백 평짜리에 살고 누구는 합숙소에 살고 하는 게 없다니까요. 그런데도 목사들이 이렇게 말 하죠. 고생 죽도록 했던 사도 바울과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려서 마지막에 낙원에 간 강도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낙원과 천국이 다른 곳이라고...이게 마귀의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은혜에 차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랑에 차별이 있을 수 있느냐고요. 그런 차별이 있는 곳이 천국이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천국 가고싶으세요?
15절입니다.
15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게 출애굽기 16장 말씀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항했죠? 풀 한포기 없는 광야에서 굶어 죽겠다고 애굽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하늘 만나를 내려 주셨어요. 본 적도 먹은 적도 없는 하늘의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도록 각자의 식량대로 거두라고 하셨어요. 결국 이 만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시켜 주는 그런 학습 현장이었어요. 그 광야가. 그래서 스데반은 그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양식이기 때문에 그건 이스라엘의 능력이나 자격과 상관없이 주어진 거예요. 다 고르게 균등하게 적게 거둔 자와 많이 거둔 자와 상관없이 하루치 식량. 오늘의 양식.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게 어떤 버전에서는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인데, 그 내일의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대표하는 애굽 정신, 애굽의 삶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는 곳이 하나님 나라예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것을 가르치신 거예요. 너희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는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날들이 광야 인생이잖아요. 이 인생 동안에 그거 하나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르치는 체험 삶의 현장으로 세상이고 그런 광야 학습장으로서 교회가 있어요. 세상에서는 그것을 못 배우니까 교회에서 그 은혜의 필연성을 배우라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능력 있는 자들이 많이 가지잖아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늘 부족하게 살아요. 그런데 교회 너희는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는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것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만큼 큰 복이 없어요. 말을 바꾸면 우리에게는 ‘주가 계신다’는 거예요. 주가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확인당하면서 살아요. 어떻게? 우리의 믿음 없음이 폭로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소유가 된 행복, 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고 내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내어놓고 서로 나누라는 거예요. 그것을 맛보라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잠시 보여준 적 있잖아요. 내 것, 네 것 없이 다 내어놓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거죠. 공산주의가 거기에서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건 그런 좋은 세상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라고 가르치신 게 아니라 잠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교회를 통해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그 예루살렘 교회는 바로 깨져버렸잖아요. 하나님이 일부러 다 흩으셨어요. 이 세상 속 교회는 그런 나눔이 지속될 수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아직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악한 영들의 공격이 계속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악한 영들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 교회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런 영적 전투를 일찌감치 포기한 거예요. 세상과의 구별, 지켜야 할 경계선을 포기했단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하고 싶어서...세상 교회에서 지금 십자가 이야기 피 이야기 합니까? 기독교에서 피를 빼면 이야기할 게 없어요.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계속 피를 이야기해요. 또 레위기는 전체가 피 이야기예요. 언약의 피. 그리고 신약에 넘어와서도 사도들이 서신서를 통해서 그 피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죠. 십자가은혜, 그 은혜의 영광이 대주제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교회는 피에 관심이 없어요. 십자가에 관심이 없다니까요. 그저 자기 구원, 복 받은데만 관심을 둡니다. 사실 구원이 뭔지도 몰라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에는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는 그런 구원이 없어요.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원만 있어요. 한 몸으로 구원이라니까요. 이건 2강에 나오니까 다음에 하기로 하고..
그렇게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교회여야 해요. 그래서 에베소서 마지막에 보면 바울이 악한 영과의 전투를 설명하면서 에베소서가 끝이 납니다. 그런 전투, 그런 말씀의 사건들 속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떡으로 사는 게 아니야.. 너희는 세상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야.. 돈으로 사는 게 아니란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거야.. 그것이 너희가 있어야 할 처음자리다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이 연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절대 돈을 못 이깁니다.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간다고 해서, 자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돈을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모두 돈으로 삽니다. 자크 엘륄이 유명한 이야기를 했어요. 돈을 이기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건 돈을 그냥 내어버리는 것이라고. 그것밖에 돈을 이길 방법이 없어요. 제가 그거 해봐서 잘 알아요
세상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 성도란 말예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딱 하나예요. 생명, 영생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신 생명입니다. 세상 무엇으로 그 생명을 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참 어리석은 게 장례식장 가서 울고불고 부의금을 주고 그러는데, 그러면서도 죽음이 자기 현실은 아닌 줄로 알아요.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현실은 죽음입니다. 다른 건 다 현실이 아니라니까요. 죽음만 현실이에요. 그런데도 장례식장에서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만 알지 그게 자기 죽음인 줄을 몰라요.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잔칫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하죠. 그 진자 현실을 알라고
그런 우리에게 뭐가 주어졌습니까? 요청한 적도 없고 협조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졌어요.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말에요. 그 생명을 누리라고 모든 세상 만물과 사건들이 우리 일상에 펼쳐져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 얼마나 큰지. 찬송가에도 있잖아요. 그 복을 한번 헤아려 보라고. 그 복은 모르고 맨날 복타령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거 아니에요
성도는 창세전 이미 하나님 아들의 피가 뿌려져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 은혜의 영광을 배우고 찬송하기 위해서 우리가 잠시 인생을 살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요.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뭔가 하면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알고 우리가 그 찬송이 되어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늘의 영광, 하늘의 부요함을 버리고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의 그 가난이 어떻게 저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는지, 그 엄청난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알기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십자가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 그 십자가의 영광, 은혜의 영광. 그 고백, 그 찬송이 형제 사랑, 형제 섬김으로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사도가 지금 본문에서 빌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 지난 일 년 동안 힘든 일이 많아서 아들을 먼 곳으로 보냈는데, 재미있는 건 언제부턴가 아들이 있는 곳의 날씨도 보게 되고, 아들이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있으면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게 된단 말이에요. 하나님도 그러세요. 자기 자녀들을 이 세상에 보내놓고 우리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일들 하나하나를 보살피고 계세요. 그러면서 원하시는 게 있어요. 하나님의 마음, 사랑,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그 사랑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하세요.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세상과 함께 심판당하지 않도록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사건들을 자꾸 일으키고 계신 거예요. 이 세상으로부터 사랑하는 분이 계시는 그곳으로 우리 눈이 들리게 하는 그런 사건들로 우리 인생이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우기 위해서 그 학습 현장으로 우리 인생이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 말씀과 그 돌보심과 그 가르침으로 이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아보라고 하는 게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 모든 사도의 권면이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연보, 나눔도 그중 하나예요. 천국의 삶을 살아보는 체험 삶의 현장, 그렇게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는 곳으로 우리 인생이 있음을 아시고, 하나님도 그런 우리에게서 약간의 기쁨을 얻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그것,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그러잖아요. 나도 너희들에게 약간의 안위함을 얻고 싶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여러분도 사도처럼 이런 서로 안위함, 서로 위로함, 서로 섬김, 서로 나눔이 있기를 빕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인생이 있는 것이, 우리가 굳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의 영광을 알고 그렇게 우리가 그 찬송이 되어서 돌아가는 것인 줄 압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면서 왜 우리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그 죽음 같은 사랑이 아니면 안 되는지를 체험하고, 또 그 사랑 안에서 날마다 자라나고, 또 무너져 내리는 우리 옛사람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